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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멘토 Jan 11. 2017

02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제목 좀 빌리겠습니다


제목만으로 질문을 던지는 책이 있다.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등등……. 그날 내가 서점에서 일없이 어슬렁거리다가 집어든 책도 그랬다. 호주의 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책,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지금 보면 특별할 것이 없는 제목인데 그날은 왠지 끌렸던 모양이다. 충동구매를 했다. 

공리주의에 바탕을 둔 윤리 체계를 정립하여 빈곤 및 기아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실천주의 윤리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

서점을 나와서도 제목만 들여다보다가, 왜 그랬는지, 멀리 떨어져 사는 친구에게 연락한 지 오래됐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여보세요. 잘 지내? 지금 책을 하나 샀는데, 제목이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야. 생각해 보니까 요즘 너한테 연락이 뜸했더라구.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전화했다오.” 마침 국회에서 여당이 미디어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는 소식이 오르내릴 무렵이었고 친구도 한마디 했다. “나도 요새 뉴스 보고 있으면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물음이 와 닿을까? 마침 나는 여기저기서 십대 학생들과 철학 수업을 할 기회가 있었기에 이 책을 수업에서 써보았다. 아니, “써보았다”고 하기는 좀 민망하긴 하다. 피터 싱어는 이 훌륭한 책에서 경제성장과 자연파괴, 종교개혁가들의 경제관, 일본인들의 기업윤리, 죄수의 딜레마 등등 다양한 내용들을 다루었지만 나는 학생들에게 달랑 표지만 보여줬으니까. 

“자, 이 책은 제목만 볼 거예요. 뭐라고 적혀 있죠?”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혹시 마음속에 이런 물음이 떠오를 때가 있을까요? 꼭 이런 문장의 형태로는 아니더라도……. 어떤 느낌인지 알겠죠?” 

잠시 침묵 후에 나온 대답. “성적표 받았을 때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그렇죠, 뭐.” 다른 학생도 입을 연다. “자율학습 시간에 소설책을 읽고 있었는데,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까 죄다 문제집 풀고 있는 거예요. 그럴 때, 내가 이러고 있어도 되나…….” “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남들은 계속 앞으로 가고 있는 것 같은데 나 혼자 멈춰 있는 것 같아서……?”

한두 사람 입을 열다 보니 차츰 다른 학생들도 말문이 트였다. “며칠 전에, 제가 좋아하는 그룹의 새 앨범이 나오는 날이었어요. 빨리 사서 듣고 싶은데,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고 있자니까 어쩐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고…….” 

“살 빼려고 여섯 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안 먹기로 했어요. 냉장고 문에다가 날씬한 모델 사진도 붙여놨거든요. 자극 받으려고. 아, 근데 아빠가 치킨을 사온 거예요! 이걸 어떻게 안 먹어요? 닭다리 하나를 들고 입에 딱 물었는데, 냉장고에 붙여놓은 모델이랑 눈이 딱 마주친 거예요. 그럴 때, 뭐랄지…….” 

“학교에서, 수업시간 끝나면 애들이 다 매점으로 가거든요. 쉬는 시간이 너무 짧으니까 종이 땡 치자마자 한꺼번에 막 몰려가요. 다다다다다다! 막 이렇게. 근데 한번은, 저는 매점에 안 갔는데, 애들이 다다다다다! 뛰어가는 걸 뒤에서 보고 있자니까…… 그냥 왠지, 우리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내친김에 즉흥적으로 숙제를 제안했다. “일주일 동안 최소 세 사람 이상과 이 물음에 관한 대화를 나눠봅시다.” 

학생들은 학교와 집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더러는 무시를 당했다고 한다. “제 짝한테 물어봤는데, 뭐 그런 걸 물어보냐고 이상하게 쳐다봐요.” “집에 갔더니 오빠가 게임하고 있었어요. ‘오빠,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을까라고 생각해 본 적 있어?’ 했더니 꺼지래요.” 

하지만 뜻밖의 반응을 경험한 학생들도 있었다. “친한 친구한테 슬쩍 물어봤는데, 되게 오랫동안 같이 얘기했어요. 그렇게 길게 얘기하게 될 줄 몰랐어요.” 

“엄마한테, ‘엄마,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있어?’ 하고 물어봤어요.” “뭐라고 하세요?” “엄마는 집에서 맨날 식구들 위해서 일을 하는데, 가끔 ‘내 인생은 뭔가? 나는 누굴 위해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대요.” 

“학교에서 국사 선생님한테 ‘선생님, 혹시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으세요?’ 했어요. 복도에서 얘기하다가 교무실까지 가서 계속 얘기했어요. 선생님은 교사 생활 하면서 가끔 회의가 들 때가 있대요. 교사의 역할이라는 게 이게 맞나, 그런 생각도 드신대요.” “평소에도 말이 잘 통하는 선생님인가 보네요?” “네, 근데 우리가 교무실에서 얘기하고 있으니까, 옆에 있던 다른 선생님들도 가까이 와서 같이 얘기하고 그랬어요.”


위험한 물음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이렇게 물을 때 나는 지금의 내 삶을 조심스럽게 돌아보고 있다. 뭔가 잘못 가고 있는 것 같은데? 이 길이 맞나? 나 잘 살고 있는 거 맞나? 이게 진짜 나인가? 이런 의혹을 포함하고 있는 물음이다. 그런데 지금의 내 삶에 대해 뭔가 의혹을 품는다는 것은 내가 실현해야 할 어떤 다른 삶의 가능성을 막연하게나마 더듬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라는 물음에는 ‘이렇게 말고 뭔가 다르게 살아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겹쳐져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처음에 주어진 생김새대로만 존재하는 물건이었다면, 또는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서만 작동되는 기계였다면, 나는 이런 물음을 마음에 품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를 떠올려볼 수 있다는 것은 자유로운 인간에게만 허락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라고 물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인간임을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은 언제나 가능성의 존재로서 자기 자신에게 과제이다. 인간은 저절로 있는 존재도 아니고 저절로 있을 (있게 될) 존재도 아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형성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김상봉, <도덕교육의 파시즘: 노예도덕을 넘어서>(길, 2005), 22쪽


어찌 보면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위대함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동시에 여기에 인간 존재의 위태로움이 있다. 어째서인가?

우리는 ‘현실의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는다. 동시에 내가 실현해야 할 이상적인 나에 대한 어떤 상(像)도 갖는다. 이 상은 흐릿하고 막연한 것일 수도 있고 선명하고 또렷한 것일 수도 있다. 거대한 것일 수도 있고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상은 내가 내 삶을 돌아볼 때 가치 평가의 척도가 된다. 그러니까 나는 ‘현실의 나’를 이 상에 빗대어보면서, 둘 사이의 거리가 멀다고 느껴질 때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라고 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적인 나’에 관한 상은 누가 그린 것인가? 내가 ‘이상적인 나’를 생각할 때, 이 생각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니까 당연히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라고 속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렇게 사랑해도 괜찮은가?     


주요섭의 단편소설 「사랑손님과 어머니」(1935)를 떠올려 보자. 한 20대 여성이 남편을 일찍 잃고 여섯 살 난 딸 ‘옥희’와 함께 살아간다. 어느 날 남편의 친구였던 남자가 하숙생으로 들어오면서 1930년대식 귀여운 로맨스가 시작된다. 여자는 남자가 좋아한다는 삶은 달걀을 밥상에 자주 올리고, 남자는 예배당에 몰래 따라가 뒷자리에서 여자 쪽을 힐끔댄다. 분위기가 간질간질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결국 두 사람의 이별로 마무리된다. 남자가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편지를 건네지만 고민 끝에 여자는 거절하는 답신을 돌려주고 마침내 남자는 떠나간다.

대체 여자는 왜 그린라이트를 껐을까? 평소엔 점잖던 남자가 술만 마시면 개가 됐나? 아니면 다른 여자들한테도 러브레터를 남발했나? 딱히 그런 혐의는 없었다. 그럼 누가 방해라도 했던 걸까? 남자네 엄마가 여자를 불러내서 돈 봉투라도 내밀었나? 얼굴에 물이라도 뿌렸나? 그런 일도 없었다. 그런데 왜? 여자가 딸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자.


“옥희가 이제 아버지를 새로 또 가지면 세상이 욕을 한단다. 옥희는 아직 철이 없어서 모르지만 세상이 욕을 한단다. 사람들이 욕을 해. 옥희 어머니는 화냥년이다, 이러구 세상이 욕을 해. 옥희 아버지는 죽었는데, 옥희는 아버지가 또 하나 생겼대. 참 망측두 하지, 이러구 세상이 욕을 한단다. 그리 되문 옥희는 언제나 손가락질 받구, 옥희는 커두 시집두 훌륭한 데 못 가구, 옥희가 공부를 해서 훌륭하게 돼두, 에 그까짓 화냥년의 딸, 이러구 남들이 욕을 한단다.”―주요섭, 「사랑손님과 어머니」


‘현실의 나’는 ‘사랑 손님과 재혼하기를 꿈꾸는 나’이다. 그런데 옥희 엄마는 자신이 실현해야 할 ‘이상적인 나’를 떠올렸다. 이 이상을 척도로 삼아 평가하자면, ‘재혼을 꿈꾸는 나’는 “망측”한 “화냥년”이다. 그래서 옥희 엄마는 결국 사랑을 포기하고 사랑손님을 떠나보낸다. 

여기서 가치 판단의 주체는 “세상”이었다. ‘사회’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가치 판단의 척도가 된 ‘이상적인 나’의 정체는 무엇인가? 옥희 엄마가 입에 올리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그 이름을 알고 있다. 바로 열녀(烈女)이다. 열녀란 어떤 여성인가? 한문학자 강명관이 쓴 책 <열녀의 탄생>을 보자.     


열녀는 ‘열행(烈行)을 실천한 여성’이다. 열행은 행위 주체의 강고한 의지에 의해 일어난 모종의 인상 깊은 행위를 의미한다.―강명관, <열녀의 탄생>(돌베개, 2009), 16쪽     


어떤 행위가 열행인가? 말뜻만 갖고 보자면 이 말은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는 말이다. 똑같이 ‘열’(烈) 자를 붙이는 열사(烈士)라는 말을 떠올려 보자. 사람들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얻어내는 일에 목숨을 바친 노동운동가 전태일(1948~1970)을 열사라 칭한다. 또 제국주의의 폭력에 맞서는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여학생 유관순(1902~1920)도 열사라 칭한다. 전태일과 유관순의 행위는 내용이 전혀 다르지만 둘 다 ‘열행’이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다. 

마찬가지로, 원론적으로 보자면 비범한 행위를 보여준 모든 여성이 열녀라 불릴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의 실제 용례를 보면 그 의미는 한 가지로 굳어져 있다. 열녀라는 말이 유포된 것은 조선 초기 세종 때 편찬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통해서이다. 이 책은 백성들을 훈도하기 위한 일종의 ‘국정 도덕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이 제시하는 이상적 인간상은 세 가지, 곧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이다. 그런데 여기에 수록된 사례들을 보면 열녀란 모두 정조를 지킨 여인들, 심지어 이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한 여인들이다. 강명관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열녀의 사례에서 열행의 성격을 정의하자면, 여성이 사회적으로 유일하게 공인된(혹은 공인될) 성적 상대자(대부분은 남편)에게 자신의 ‘성적(性的) 종속성’을 천명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학대하거나, 신체의 일부 또는 신체 전부를 희생하는 것(從死)이 될 것이다.―강명관, 앞의 책, 16쪽.


신체의 학대나 희생은 그 의지가 얼마나 강고한지를 보여주지만, 여기서 핵심은 결국 의지의 내용, 곧 “성적 종속성”이다. 그러니까 죽은 남편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지키기 위해 사랑을 포기한 옥희 엄마도 열행을 실천한 여성, 곧 열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조를 지키는 여성이 훌륭한 인간이라는 이런 상은 누가 만들든 것일까? 옥희 엄마가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세상”이, 정확하게는 남자들의 세상이 만든 ‘이상적인 여성상’이다. 물론 그것은 부당하기 짝이 없는 여성상으로서, 상대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고려사회와 비교해 볼 때 심각하게 퇴행한 것이었다.


열녀담론은, 남성이 복수의 여성과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 데 반해 여성은 사회적으로 인정된 단 한 사람의 남성과 성관계를 맺어야만 한다는 남성 중심의 성적 욕망을 윤리화한 것이었다.―강명관, 앞의 책, 17-18쪽 


“옥희 엄마랑 아저씨는 왜 헤어졌죠?” 학생들에게 물으면 쉽게 대답한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요.” “세상 사람들은 왜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볼까요?” “당시 관습 때문에요.” “유교 때문에요.” 그렇다. 하지만 관습이든 유교든 저절로 생겨나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파고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만들어내고 유포하고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삼강행실도>는 세종 때 편찬된 이래 조선 역사상 가장 많이 인쇄‧배포된 출판물이었다. 이 책에 그려진 ‘열녀’의 이상을 유포하는 것은 범국가적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모든 것은 조선을 지배했던 남성-양반의 의도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여성의 머릿속에 주입할 텍스트를 편집과 조작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내고 국가 기구를 통해 인쇄하여 의도적으로 또 강제적으로 5백 년에 걸쳐 유포했다. 그 결과 그 텍스트들은 여성의 대뇌를 차지하고, 여성의 행동과 의식을 통제하게 되었던 것이다.―강명관, 앞의 책, 553쪽      


이 5백 년에 걸친 훈육이 두 사람의 이별의 원인이다. 옥희 엄마는 이상적인 자아상에 따라 현실의 욕망을 억눌렀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신도 알고 있었겠지만) 자신이 아닌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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