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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멘토 Jan 18. 2017

03 나는 누가 만드는가

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이렇게 살이 쪄도 괜찮은가?


지난주에 우리는 남성-양반들이 지배했던 조선 사회가 여성들에게 ‘열녀’라는 인간상을 강요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사회가 구성원들의 가치관을 통제하는 이런 일이 전근대 사회에서만 일어났을까? 


내 자신에 대해서 만족을 못하게 되니까 그래요. 내가 이것밖에 안 되고, 이렇게 자제력이 없고, 의지력이 없는 내 자신이 너무 짜증이 나서 한번 내 자신을 이겨보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오기도 생기고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지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한서설아, <다이어트의 성정치>(책세상, 2000), 117-118쪽  


자기가 살이 쪘다고 생각하는 어느 20대 여성의 말이다. “아, 살 빼야 되는데.” “지금 보기 좋은데, 굳이 다이어트 안 해도 되지 않아?” “안 돼, 빼야 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대화 장면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주 많은 여성이 살을 빼야 한다는 숙제를 스스로 안고 있으며, 이 숙제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한다. 이런 평가의 척도는 무엇인가? 


여자의 몸을 갖고 있다는 것,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몸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나라는 존재를 정의하고 평가하는 데 너무나도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한서설아, 앞의 책, 8-9쪽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몸”, 이것이 많은 여성이 가치 판단의 척도로 삼는 이상적인 자아상이다. 이것은 조선 시대의 <삼강행실도> 같은 국정교과서를 통해 교육된 것은 아니지만 온갖 방식으로 유포되어 우리의 의식 속에 공기처럼 스며들어 있는 여성상이다. 가령 매스미디어는 끊임없이 ‘날씬한 여자’를 ‘표준적인 여성상’으로 그려낸다.

“왜 여성은 마치 성욕을 느낄 때처럼, 초콜릿 케이크를 보고 식욕을 느낄 때 죄의식을 느끼는 것일까”-정희진


텔레비전에서 가장 많이 그러는 거 같아요. 대부분이 그렇게 나오니까 그래야 되는 거 같구 그런 거 있죠. 묘사되는 게 그렇잖아요. 캐릭터를 봐도 드라마 같은 데서 뚱뚱한 여자가 지적이거나 전문직을 갖고 있는 그런 경우는 거의 없어요. 제가 봤을 때 거의 주부거나 아니면 아주 조연이거나 아니면 웃기는 아줌마, 그 정도예요.―한서설아, 앞의 책, 56쪽. 


그런데 ‘날씬한 여자’라는 표준은 단지 텔레비전 속의 비현실적 가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서 엄격하게 통용되는 표준이다. 취업 면접에서 여성들의 몸매가 중요한 평가 요인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라 이제 대학의 총여학생회에서 취업 대비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개설하는 광경도 낯설지 않다.  


교수님들도 그래요. 몸매 관리를 잘 해야 한다구. …… 공부를 한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나름대로 학점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부터 막 취업 의뢰가 들어오는데 학점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들어가는 거야. 그러니까 학점이 2.0대 애들에게 취업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3.5가 넘는 애들한테는 안 들어오는 거야.―한서설아, 앞의 책, 57쪽 


기묘한 것은 여성의 몸매에 대한 시선이 인격의 영역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의 몸매는 그의 인격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지만 이상적인 여성의 이미지에서 몸매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지배적이다 보니 몸매에 대한 평가가 인격에 대한 평가와 뒤섞이는 일까지 벌어지는 것이다.


음, 바라보는 시선들, 그런 거. 사람을 미련하게 보는 거 있잖아요. 살이 찐 사람들 죄악시하는 거랑 먹는 거에 대해서 내 의사를 잘 밝힐 수 없다든지, 제일 싫은 게 그거예요. 내가 살쪘다고 내 내부까지 규정되어버리는 것들. 어 그렇게 안 생겼는데 참 뭐 그러시네요, 뭐 이런 표현들이라든지 그렇게 안 생겼는데 참 부지런하시네요, 그렇게 안 생겼는데 날렵하시네요, 이런 말 들으면 굉장히 짜증나죠.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 쉽게 하는 말들…….―한서설아, 앞의 책, 71-72쪽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여성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성적인 시선을 내면화하게 된다. 세상의 요구가 마치 자기 자신의 욕망인 것처럼 혼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여성은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서 다이어트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바람직한 자기 이미지’는 미디어 등을 통해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교양인, 2005, 100쪽)이기 때문에 결국 내부 분열을 피하기 어렵다. 이 분열을 이해할 수도, 해소할 수도 없는 여성은 마침내 다이어트를 까닭 모를 의무감, 어떤 맹목적인 숙명 같은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정말 여자는 불쌍한 거 같아요. 끝없이 그래야 되는 거 같아요. 끝없이 절제하고 끝없이 해야 될 거 같아요. 끝나지 않는 전쟁 같아요. 그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여자한테는 끝없는 숙제이고 전쟁인 거 같아요.―한서설아, 앞의 책, 123쪽


어느 스무 살 대학생의 말이다. 그에게 날씬한 몸매를 가꾸는 것은 이제 “절제”의 미덕이요 “전쟁” 같은 의무로 여겨진다. ‘여자는 한 남자에게만 절개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조선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한 가치관이라면, ‘여자는 자기 몸을 날씬하게 가꿔야 한다’는 것은 현대 한국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가치관이다. 앞의 것은 성욕을, 뒤의 것은 식욕을 종속시킨다는 차이가 있을 뿐 둘은 몹시 닮아 있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말한다. “왜 여성은 마치 성욕을 느낄 때처럼, 초콜릿 케이크를 보고 식욕을 느낄 때 죄의식을 느끼는 것일까…….”(정희진, 앞의 책, 98쪽)


타율성의 덫


<열녀의 탄생>에서 강명관은 “조선 시대 남성-양반이 국가권력을 동원해 가부장적 욕망을 실현하는 텍스트를 여성의 대뇌에 설치하는 과정을 추적”했다.(강명관, <열녀의 탄생>, 돌베개, 2009, 6쪽) 그런데 사회의 권력이 구성원들의 가치관 형성에 강압적으로 개입하는 이런 사태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말한다.


내가 일상에서 내뱉는 언어, 어떤 사태에 갖는 태도, 나아가 나의 가치관, 미의식 등은 과연 나의 것인가? 국가와 자본은 교육과 미디어라는 권력 기구를 통해 개인을 끊임없이 제작하고 간섭한다. …… 이렇듯 ‘나’는 권력적 타자에 의해 제작된 존재다.―강명관, 앞의 책, 6-7쪽 


우리는 ‘이상적인 나’에 대한 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상이 사회에 의해 주입된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나는 남이 만들어놓은 거짓된 이상을 실현하는 데 내 삶을 소진하게 될 것이다. 이 경우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라는 물음은 표면적으로는 나 자신을 돌아보는 물음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내 삶을 남에게 예속시키는 덫이 되고 만다. 그리고 우리는 숙제를 하지 못한 학생처럼 선생님의 검사를 앞두고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잘살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하는 것은 내가 실현해야 할 ‘이상적인 나’의 상을 나 스스로 그릴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는 우리가 실현해야 할 궁극적 인간의 이상, 곧 참된 의미에서 선한 인간성의 이상을 타율적 강요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되어야 할 우리의 모습을 우리 스스로 정립한다는 바로 거기에 인간성의 자유 또한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김상봉, <도덕교육의 파시즘: 노예도덕을 넘어서>(길, 2005), 23쪽


철학자 김상봉이 <도덕교육의 파시즘>에서 이렇게 쓴 것은 지난 날 한국 공교육의 교육과정을 지배했던 국가주의적 도덕교육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국가주의 교육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 관습과 관행, 검토되지 않은 선입관, 온갖 형태의 권력과 속임수 등 모든 종류의 “타율적 강요”에 우리는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고대윤리학의 모험


돌이켜보면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나 자신의 참된 가치를 주체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과제는 꽤 오래전부터 문제시되어온 것이다. 서양 철학사를 보면 고대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잘사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묻기 시작하면서 처음 쟁점으로 떠오른 문제의 하나가 노모스(nomos. 복수는 nomoi)의 정당성에 관한 것이었다. 노모스란 일차적으로는 ‘법’을 뜻한다. 그런데 이는 좁은 의미의 실정법만이 아니라 관습, 도덕을 포함해서 넓은 의미의 사회적 규범 일반을 가리킨다. 

모든 인간 사회에는 그 사회를 규제하는 노모스가 있다. 노모스는 바람직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지시한다. 사회의 구성원들은 노모스에 따라 행위한다. 그 사회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노모스야말로 만물의 왕”이라 칭해지기도 했다.(헤로도토스, 천병희 옮김, <역사>, 숲, 2009, 3:38)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왕’의 권력을 의문시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는 이렇게 말한다.


“법(nomoi)을 제정할 때 지배자들은 제각기 자기의 편익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 일단 법 제정을 마친 다음에는 자기들에게 편익이 되는 이것이 정의로운 것이라고 피지배자들에게 공표하고, 이를 위반하는 자를 범법자 및 불의를 저지른 자로서 처벌하죠.”―플라톤, 박종현 옮김, <국가>(서광사, 1997), 338e.


트라쉬마코스의 이 말은 정치권력의 행태에 관한 것이지만 모든 종류의 사회적 규범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사회 규범을 누가 만들었나? 그 사회에서 지배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규범을 만드는 데 참여하지 못한 이들의 편에서 보자면 사회적 규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결국 “남 좋은 일”에 불과하며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이다.(플라톤, <국가>, 343c) 그런 것을 왜 굳이 따라야 하는가? 이것이 고대 그리스에서 생겨난 물음이다. 

이후의 고대 윤리학의 역사는 이 물음을 출발점으로 삼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것은 사회가 요구하는 기성품 가치를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무엇이 참으로 좋은 삶인지를 스스로 묻고 탐구한 모험의 역사이다. 그러니 고대 윤리학의 역사를 따라가 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느 대학에서 <가치와 윤리>라는 수업을 할 때, 한 학생이 물었다. “교수님이 20대 학생들에게 권하고 싶은 가치관은 어떤 것인가요?” 뭐라고 해야 할까? 내세울 만한 지혜랄 것이 없다는 것을 나는 그럴듯해 보이는 말로 감출 수밖에 없었다. “저는…… 어떤 특정한 가치관을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가치관을 스스로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사정은 그리 나아지지 않은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장광설을 싫어했지만, 누군가 비슷한 질문을 다시 한다면 나는 결국 호메로스부터 아우구스티누스까지 고대 윤리학의 역사를 중언부언 늘어놓게 될 것 같다(이제부터 내가 하려는 일이다). 그렇게 하고도 모자라서 나는 거꾸로 부탁할 것이다. 이것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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