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훌륭한 사람?
철학 이전에 노래가 있었다. 예로부터 희랍인들은 신과 영웅의 이야기를 노래로 지어 불렀다. 많은 노래가 공기가 되어 사라졌지만 호메로스라는 가인(歌人)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문자로 기록되고 이방인들의 말로 번역되어 오늘날까지 읽히고 있다. 호메로스라는 사람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태어난 곳도 살았던 시기도 정확치 않다. 애초에 호메로스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가 지었다는 서사시의 영향력은 압도적으로 크다.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그리스인의 성서로 불렸다. 이 두 시는 수백 년 동안 공식적인 학교 교육과 일반 시민의 문화생활을 통틀어 그리스 교육의 기본이었다. …… 이 성서가 다른 성서로 교체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도덕이나 행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려면 자연스럽게 호메로스를 인용했다.(H. D. F. 키토, 박재욱 옮김,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 갈라파고스, 2008, 69-70쪽)
영국의 고전학자 H. D. F. 키토의 말이다. 여기서 “다른 성서”란 물론 기독교 성서를 가리킨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절대적 권위를 얻어 일점일획도 손댈 수 없는 엄숙한 종교 경전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 성서가 그랬듯이 (또는 동아시아의 성서인 <논어>나 <맹자>가 그랬듯이) 이 시들은 희랍인들에게 바람직한 삶과 행위에 대해 가장 표준적인 이상을 그려 보여주었다. 당대인의 말을 들어보자.
저의 아버지는 저를 훌륭한 사내로 만들려고 애쓰셨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호메로스의 모든 구절을 암송하도록 시키셨지요. 지금도 저는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전체를 말로 암송할 수 있습니다.(크세노폰, 오유석 옮김, <향연>, 3:5)
소크라테스가 몇몇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니케라토스라는 젊은이가 한 말이다. 여기서 “훌륭한”이라고 옮긴 말은 희랍어 ‘아가토스’(agathos)이다. 그런데 당대 희랍인들은 어떤 사람을 훌륭하다고 여겼을까? 이 물음을 염두에 두고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살펴보자.
<일리아스>의 줄거리
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이간질로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 세 여신이 누가 가장 아름다운지 서로 다투고 있었다. 판정을 부탁받은 트로이아의 왕자 파리스가 아프로디테를 뽑아주자 아프로디테는 파리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트로이아로 데려가게 해주었다. 이에 격분한 헬레네의 남편 메넬라오스는 형 아가멤논을 부추겨 아카이아 인들(=희랍인들을 가리키는 말. ‘아르고스 인들’이라고도 함)을 규합하여 트로이아를 침공한다. 이로써 10년에 걸친 기나긴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이것이 <일리아스>의 배경이 된 트로이아 전쟁이다.
<일리아스>는 24권으로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24장) 된 수백 페이지 분량의 방대한 서사시다. 하지만 이 서사시는 전쟁 막바지 고작 며칠 간 일어난 사건만을 다루며, 실제로 전투가 벌어진 것은 그중에서도 나흘뿐이다. <일리아스>의 줄거리를 간단히 살펴보자.
트로이아 전쟁 10년째 되던 해, 아카이아 군의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이 전리품을 챙기는 과정에서 아폴론 신의 노여움을 사는 바람에 아카이아 인들이 재앙을 입게 된다. 가장 뛰어난 전사인 아킬레우스는 회의장에서 아가멤논에게 신의 노여움을 풀어 주라고 권하다가 그에게 모욕을 당한다. 화가 난 아킬레우스는 전쟁에서 빠지겠노라 선언하고 군에서 이탈한다. 아킬레우스의 사정을 들은 그 어머니 테티스 여신은 신들의 왕 제우스에게 청탁하기를, 아들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당분간 아카이아 군이 고난을 겪게 해달라고 한다(여기까지가 1권이다).
청을 수락한 제우스의 계략으로 다시 전면전이 벌어진다. 첫날에는 뛰어난 전사들의 활약에 힘입어 아카이아 군이 다소 우세인 듯했지만(2-7권), 다음날엔 트로이아 군이 승세를 잡게 되고 아카이아 군은 패퇴하게 된다(8권). 위기감을 느낀 아가멤논은 그제야 아킬레우스에게 사절단을 보내 많은 선물을 약속하며 화해를 청하지만 마음이 단단히 뒤틀린 아킬레우스는 복귀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9권).
초조해진 아카이아 인들은 전세 파악을 위해 야간 정탐조를 파견하고 그들의 야습으로 약간의 성과를 얻기도 하지만(10권), 형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다음 날, 전투가 계속되자 아카이아 군은 심각한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된다. 아킬레우스와 함께 있던 친구 파트로클로스는 전우들의 위기를 안타까워하다가 아킬레우스의 무구(武具)를 갖춰서 대신 전장에 나가 위기 상황을 수습한다. 그러나 잘 싸우던 파트로클로스는 결국 트로이아 최고의 전사인 헥토르에게 목숨을 잃고 만다(11-18권). 이에 아킬레우스는 한층 더 큰 노여움에 휩싸여, 다시 전투에 뛰어들 결심을 하고 군에 복귀한다. 마침내 전투 넷째 날, 전장에 나간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와 맞붙게 되고 그를 쓰러뜨린다(19-22권).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장례식과 기념경기를 치른다(23권). 그래도 슬픔이 가라앉지 않은 그는 헥토르의 시신에 계속 모욕을 가한다. 그러나 신들의 중재와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의 부탁을 받아들여 결국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준다(24권).
위의 줄거리에는 다섯 명의 이름이 나온다. 아카이아 최강의 전사 아킬레우스와 트로이아 최강의 전사 헥토르가 양대 주역이다. 그리고 양측 최고 지도자인 아가멤논과 프리아모스가 있고, 두 전사가 대결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는 인물 파트로클로스가 있다. 양측에 두 사람씩만 더 추가하자. 아카이아의 아이아스와 오뒷세우스, 트로이아의 사르페돈과 글라우코스. <일리아스>에는 무수히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일단 이 정도만 알아두면 이 글을 읽는 데 무리가 없다.
살벌한 세계
우선 작품의 분위기를 살펴보자. <일리아스>는 전쟁 서사시이니 역시 전투 장면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우리가 <초한지>나 <삼국지> 등에서 익숙하게 봐온 지략과 용병술은 여기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잔머리를 쓸 틈이 없는 순수한 폭력과 폭력의 부딪침, 그것이 호메로스가 그리는 전투다.
먼저 안틸로코스가 무장한 트로이아 전사, 즉 선두대열에서
용맹을 떨치던 탈뤼시오스의 아들 에케폴로스를 죽였다.
안틸로코스가 먼저 그의 말총 장식이 달린 투구의 뿔을 맞혀
창을 이마로 밀어 넣자, 청동 창끝이 뼈 속으로
뚫고 들어갔다. 그리하여 어둠이 그의 두 눈을 덮자
그는 격렬한 전투에서 탑처럼 쓰러졌다.
그가 쓰러지자 기상이 늠름한 아반테스 족의 지휘자이며
칼코돈의 아들인 통치자 엘레페노르가 되도록 빨리
그의 무구들을 벗기기 위하여 그의 발목을 잡고 사정거리 밖으로
열심히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도 잠시뿐이었다.
그가 시신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그가 몸을 구부리는 순간,
기상이 늠름한 아게노르가 방패 옆을 드러나는 그의 옆구리를
청동 날이 박힌 창대로 찔러 그의 사지를 풀어 버렸기 때문이다.
(4권 457-469행)
<일리아스>에서 우리는 창과 돌이 날아다니고 청동과 청동이 부딪치고 피와 살점이 튀는 전장으로 인도된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내내 죽고, 죽이고, 시체를 턴다. 살상 장면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게다가 어찌나 세세하고 사실적인지…….
이번에는 아마륑케우스의 아들 디오레스(A)를 운명이 포박했으니,
그는 들쭉날쭉한 돌에 오른쪽 다리의 복사뼈 옆을 맞았던 것이다.
던진 자는 트라케 전사들의 지휘자 페이로스(T)인데,
이 자는 암브라소스의 아들로 아이노스에서 왔다.
무자비한 돌이 두 힘줄과 뼈를 박살내자
그는 먼지 속에 뒤로 나자빠졌고 숨을 거두며
사랑하는 전우들을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그를 맞힌 페이로스가 그에게 달려들어
창으로 그의 배꼽 옆을 찌르자 창자가 모두
땅 위로 쏟아졌고, 어둠이 그의 두 눈을 덮었다.
(4권 517-526행)
호메로스의 전투 장면이 생동적인 것은 자세한 상황 묘사나 노골적인 살상 장면 때문만은 아니다. 각각의 전사는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으로 그려진다. 전투 장면을 보면 딱 한 번 등장해서 죽는 이들이 많은데, 우리가 흔히 보는 전쟁영화에서 이런 사람들은 무명의 엑스트라다. 하지만 <일리아스>에서는 죽이는 자에게도, 죽는 자에게도 이름이 있다. 호메로스는 마치 경기 해설자처럼 각 인물의 개인적인 이력을 소개하기도 한다.
메게스(A)는 안테노르의 아들 페다이오스(T)를 죽였다.
페다이오스는 서자였지만 고귀한 테아노가 남편을
기쁘게 해주려고 친자식들 못지않게 정성껏 길렀다.
이름난 창수인 퓔레우스의 아들이 가까이 다가가
날카로운 창으로 머리의 힘줄을 치자, 청동이 이빨 사이를
뚫고 나가며 혀뿌리를 잘랐다. 그래서 페다이오스는
차가운 청동을 이빨로 깨문 채 먼지 속에 쓰러졌다.
에우아이몬의 아들 에우뤼필로스(A)는 휩세노르(T)를 죽였다.
이 자는 스카만드로스 강의 사제로 임명되어 백성들 사이에서
신처럼 존경받던 용맹무쌍한 돌로피온의 아들인데,
에우아이몬의 빼어난 아들 에우뤼폴로스가
앞에서 도망치던 그를 뒤쫓아가, 그의 어깨를
칼로 내리쳐서 그의 억센 팔을 잘라 버렸다.
그래서 팔은 피투성이가 되어 들판 위에 떨어졌고,
두 눈은 검은 죽음과 강력한 운명이 내리덮쳤다.
(5권 69-83행)
이것이 <일리아스>의 세계다. 호메로스는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를 배경으로 훌륭한 사람의 이상을 노래했다. 참 아이러니하다. 훌륭함의 미덕을 이야기하기에 너무나 살벌한 세계가 아닌가. 하지만…… 꼭 그렇기만 할까? 우리 삶이 전쟁터 같다고 여길 때가 있지 않나?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일리아스>가 우리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이 전장 같은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훌륭한가?
가장 뛰어난 자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형용사로 ‘아리스토스’(aristos)라는 말이 있다. 앞에서 말한 ‘아가토스’(agathos)의 최상급으로 ‘가장 훌륭한/좋은’이라는 뜻이다. “그는 가장 훌륭한(aristos) 데다 가장 많은 백성들을 지휘했다”(2권 580행), “……아카이아 인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aristos) 자가 맞소이다”(5권 103행), “두 분은 전투에서나 회의에서나 모든 면에서 가장 훌륭한(aristos) 분들이시니……”(6권 77-78행)에서처럼 쓰인다. 그런데 전쟁터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뛰어난 전사, 곧 전쟁에 능한 자일 것이다. 전투는 전사의 임무이니 이를 일반화시켜 보면 자기의 일을 탁월하게 잘해내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 호메로스는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한 아카이아 전사들의 이름을 열거한 다음, 누가 가장 뛰어난 자인지를 말한다.
말들 중에서는 페레스의 손자의 말들이 가장 뛰어났다(aristos).
에우멜로스가 모는 이 말들은 걸음이 새처럼 빨랐으며,
털 빛깔도 같고 나이도 같았으며 키도 자로 잰 듯이 똑같았다.
적에게 전쟁의 공포를 안겨다 주는 이 한 쌍의 암말은
은궁의 아폴론이 페라이에서 기른 것들이다.
전사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aristos) 자는, 아킬레우스가 노여워하고 있는
동안에는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였다.
(2권 763-769행)
아카이아 인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뛰어난 전사는 아킬레우스다. 지금은 아킬레우스가 부재 중이기 때문에 아이아스를 가장 뛰어난 전사로 꼽고 있다. 그런데 호메로스가 가장 뛰어난 말도 언급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바로 에우멜로스의 말이다. 아폴론 신이 제우스에게 벌을 받아 페라이의 아드메토스 왕의 가축들을 돌보며 종살이를 한 적이 있다. 에우멜로스는 아드메토스의 아들로, 그의 말들은 아폴론이 길렀기 때문에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말들이 뛰어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당연히 잘 달린다는 말이다. 에우멜로스의 말은 “걸음이 새처럼 빨랐”다고 한다. 결국 인간이든 말이든 자신의 일을 탁월하게 해내는 자가 가장 훌륭하다(aristos)는 뜻이다.
전사가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내려면 신체가 강인해야 한다. 또 정신의 강인함도 필요하다. 적의 뼈를 쳐부술 수 있는 힘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내 뼈를 부수러 오는 적들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이름난 창수인 오뒷세우스만이 혼자 남고 그의 곁에는 이제
아르고스 인은 한 명도 없었으니 모두들 공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침통하게 자신의 고매한 마음을 향하여 말했다.
“아아,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군사들 앞에 겁을 먹고 달아난다면
큰 불행이다. 그렇다고 혼자 버티다가 붙잡히는 날에는 더욱
참담할 것이다. 다른 다나오스 인들은 크로노스의 아드님(=제우스)께서 모두
쫓아 버리셨으니까.”
(11권 401-407행)
아카이아 군이 열세에 몰린 상황이다. 트로이아 전사들이 맹공을 퍼붓고 있다. 아카이아 군의 이름난 전사들이 차례로 부상을 당해 후방으로 수송되고, 급기야 오뒷세우스 주위에는 한 사람의 아군도 보이지 않게 된다. 오뒷세우스는 두려웠다. 달아날까? 그것은 수치스런 일이다. 계속 싸워야 할까? 하지만 포위된 상태에서 맞서 싸우다 적에게 붙잡히기라도 하면 어쩌나. 초조해하고 있는 오뒷세우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용기다.
“……하지만 왜 내 마음은 이런 생각들을 하는 것일까?
싸움터에서 도망치는 자들은 비겁한 자들이고,
전투에서 으뜸가는 자는 맞든 아니면 맞히든
완강히 버텨야 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11권 407-410행)
오뒷세우스는 다시 창을 고쳐 쥐고, 자신을 둘러싼 트로이아 전사들에게로 달려든다. 그리고 옆구리에 창상을 입으면서도 여섯 명의 전사들을 연달아 쓰러뜨린다.
이것이 호메로스가 그리는 전사의 모습이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가장 원초적으로 요구되는 미덕은 용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