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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멘토 Jan 03. 2017

01 행복, 그 자체를 묻다

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윤리학, 좋은 삶에 대한 공부


‘윤리/도덕’이라 하면 흔히 규칙과 의무의 목록들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본래 윤리학은 ‘좋은 삶’이 무엇인지를 궁리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수련하는 공부였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윤리학은 곧 ‘살아가는 방식’(modus vivendi) 또는 ‘삶의 기술’(ars vivendi)을 뜻했습니다. 실천적 성향이 강한 스토아 철학을 익힌 로마의 정치가 세네카는 아예 철학을 가리켜 행복하게 잘 사는 기술(ars bene beateque vivendi)이라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윤리학은 특별한 정의감(!)을 지닌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이들의 관심 분야가 될 법합니다.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은 우리 모두의 자연스런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을 가리켜 “행복하게 잘 사는 기술”이라고 했던 로마의 정치가 세네카


행복에 대한 건강한 욕망이 먼저다


물론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설명했다시피, ‘행복한 삶’이 모든 사람의 자연스런 소망이라 해서 그것이 절대적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자연스런 소망을 거스르는 비범한 행위에서 참으로 가치있는 삶의 전형을 발견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광주항쟁에서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았던 시민군의 선택을 ‘행복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마지막까지 학생들을 구하다 나오지 못한 승무원 박지영 씨의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행복을 넘어선 ‘절대적 의무’에서 비로소 참된 도덕이 시작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칸트의 생각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칸트의 의무 윤리학이 서양 고전윤리학의 역사에서 거의 끄트머리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다양한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한 역사가 2천 년 이상 축적된 후에야 비로소 의무 윤리학이 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의무’나 ‘올바름’보다는 행복에 대한 건강한 욕망이 윤리학적 논의의 출발점에 놓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긍정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은 넌센스이듯이, 자신의 행복에 대해 충분히 마음쓰지 못한 사람이 처음부터 행복을 넘어서려고 한다면 위선에 빠지기 쉬운 법입니다. 


무엇이 행복인가, 그 자체에 대한 질문


차분히 들여다보면, ‘의무’나 ‘올바름’ 같은 무거운 개념들을 일단 괄호 속에 넣은 채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주요 과제로 설정한다고 해도 문제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했듯이, 누구나 행복을 가장 좋은 것이라 여기지만 과연 무엇이 행복인지는 우리에게 자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문제는 우리가 이기적으로 행복만 추구한다는 데 있다기보다 행복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는다는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저마다 행복하게 잘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지만 ‘내가 잘 살고 있는 건가?’ 또는 ‘나는 지금 행복한가?’ 같은 물음들이 불쑥불쑥 일어납니다. 이런 의문이 단지 ‘내가 추구하는 목표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더 많은 노력을 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문이 ‘내가 추구하는 목표 자체가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라는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바로 이때가 윤리학적 성찰이 필요한 때입니다.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행복이란 무엇인지 처음부터 차근차근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때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하다면 집단이나 관습 등 어떤 외적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은 채 다양한 관점에서 순전하게 행복을 소망했던 고대 철학자들의 논의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의 아리스토텔레스


다르게 사는 기술로서 윤리학


이렇게 보자면 고대인들이 말한 ‘삶의 기술로서의 윤리학’은 단지 사회가 규정해놓은 삶의 방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따라잡기 위한 처세술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윤리학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재고하는 적극적인 성찰에서 시작됩니다. 이 성찰은 어쩌면 지금까지 익숙했던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고,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을 거스르는 길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플라톤은 ‘여성들도 교육을 시켜서 탁월한 사람을 만들어야 아테네가 좋은 나라가 된다’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했습니다. 퀴니코스 학파의 디오게네스는 극단적인 무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에피쿠로스는 노예와 여성까지 포함시킨 평등한 친구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고대인들의 소박한 윤리학이 결과적으로는 가장 급진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고대윤리학은 다르게 사는 기술(ars aliter vivendi)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이 연재를 통해 독자들에게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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