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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멘토 Feb 22. 2017

08 삶을 검토하는 대화: 소크라테스 2

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소크라테스의 길거리 토크쇼 

    

언젠가 두 지인과 맥줏집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철학 얘기 좀 해주세요.” 술 마시다 느닷없이 ‘철학 얘기’라니.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데카르트의 자기의식? 의무론적 윤리와 결과론적 윤리간의 논쟁? 내가 우물쭈물하자 화제가 금세 바뀌었다. “언니는 결혼할 거야?” “글쎄, 모르겠어. 근데 난 결혼은 안 해도 아이는 갖고 싶어.” “결혼 안 하고 어떻게 아이를 가져? 입양할 거야?” “음, 정자를 기증받아서 인공수정을 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언니, 그건 옳지 않은 것 같아.” “왜?” “그건…… 사람들의 인식이 좋지 않잖아.” 이 대화를 듣고 있다가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라면 여기서부터 ‘철학 얘기’를 시작했을 텐데.

소크라테스는 커리큘럼을 정해놓고 학생들을 가르친 교사가 아니었다. 그는 평소에 자주 어울리던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을 훗날 ‘제자들’이라 일컫기도 한다. 하지만 정식 사제관계는 아니었다.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가 이들과 대화할 때의 방식이 좀 독특했다고 한다.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가도 질문을 한다. 우리와 맥줏집에 있었다면 이렇게 물었을 법하다. “사람들의 인식이 좋지 않은 일은 옳지 않은가?” 혹은 “옳다는 게 뭔가?”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상대가 대답을 한다. 그 대답에 소크라테스가 다시 새로운 질문을 한다. 상대가 다시 대답하고, 소크라테스가 다시 질문을 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문답식 대화는 점차 철학적 토론이 되어갔다. 대개는 사람들이 잘 오가는 곳에서 대화가 이뤄졌으므로 자연스레 구경꾼들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움직일 때마다 도시 곳곳에서 즉석 토크쇼가 벌어진 셈이다. 어쩌면 아테네 주민들은 여행객들에게 이렇게 말해줬을지도 모른다. “참! 키가 작달막하고 들창코에 못생긴 양반이 사람들이랑 뭔가 이야기하고 있거든 옆에 가까이 가서 들어보슈. 재미있을 거요.”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장면1. 용기란 무엇인가?     


뤼시마코스와 멜레시아스라는 아버지가 있었다. 이들은 자기 아들들을 훌륭하게 키우려면 어떤 교육을 받게 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둘은 아테네 최고의 장군인 라케스와 니키아스(이들의 활약상은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나온다.)를 불러 이 문제에 자문을 구했다. ‘명사에게 듣는 자녀교육법’이라고 할까. 평소 젊은이들의 교육 문제에 관심이 많던 소크라테스도 어쩌다 보니 이 자리에 끼게 됐다. 

대화 주제는 ‘젊은이들에게 중무장전투술(hoplitikē)을 가르치는 게 좋을까’(교과선정)에서부터 ‘용기 있는 젊은이를 길러내야 한다’(교육목표)는 데까지 자연스레 옮아갔다.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묻는다. “용기가 뭔지 알아야 용기 있는 젊은이를 길러낼 수 있지 않을까요?” 모두 고개를 끄덕이자 소크라테스는 장군 라케스에게 질문을 한다.       


소크라테스  자, 제가 묻는 것에 대해 말씀해 보십시오. 용기란 무엇입니까?

라케스  소크라테스, 제우스에 맹세코, 그건 말하기 어렵지 않소. 누군가 대오를 지키면서 적들을 막아 내고자 하고 도망치지 않는다면 그는 용감한 사람일 거라는 점을 잘 알아두시지요.(<라케스>, 190e.)      


숱한 전투를 겪어온 라케스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용기에 대해 자신만만하게 대답한다. 고대 희랍의 중무장보병대(hoplitai)는 밀집대형(phalanx)을 짜서 싸웠다. 방패를 든 병사들이 서로 바짝 붙어선 채 견고한 대오를 이루어 전진하면서 창으로 공격하는 전법이다. 여기서 각각의 병사는 적군과 맞설 때 동요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대오가 흐트러지면 전술이 효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케스처럼 경험이 확신을 주는 경우가 많다. “내가 경험해봐서 잘 아는데…….” “너도 겪어보면 알게 된단다, 엄마처럼.” 그러나 경험은 언제나 제한적이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하는데, 이것이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곤 한다. 

용기에 관한 라케스의 생각도 그렇다. 대오를 지키는 병사는 물론 용감하다. 하지만 이것이 용기의 전부라면, 용기 있는 삶을 살고픈 사람은 먼저 군대부터 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신념을 위해 군 입대를 거부하는 사람은 어떤가? 짝사랑하던 친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소녀는? 자신이 속한 조직의 내부 비리를 고발하는 사람은? 이들 모두 용감하다고 여긴다면, ‘용기’란 이것들을 포괄하는 그 무엇일 것이다. 용기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제한된 경험을 넘어서서 볼 줄 알아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용기의 다양한 사례를 열거한 뒤에 다시 묻는다.      


소크라테스  용기에 대해 다시 말씀해 주시지요. 이 모든 상황 속에 동일하게 있는 용기란 무엇인지 말입니다.(<라케스>, 191e.)     


라케스는 자신이 자신 있게 내놓은 대답이 불충분하다는 말에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숨을 고르고 천천히 생각해본 다음, 용기의 다양한 사례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만한 보편적 정의를 내놓는다.     


라케스  그러면 그건 내 생각엔, 일종의 ‘영혼의 인내’인 것 같소. 모든 경우에서 나타나는 그 본성을 말해야 한다면 말이오.(<라케스>, 192c.)     


라케스에 따르면, 용기란 우리 영혼이 뭔가를 인내하는 것이다. 용감한 중무장보병은 죽음의 공포를 인내한다. 사랑을 고백하는 여자는 거절의 두려움을 인내한다. 내부 고발자는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에 대한 불안감을 인내한다. 이렇게 보니 라케스의 정의는 처음보다 한 단계 발전하여 모든 사례에 적용되는 듯하다. 그런데 고개를 끄덕이던 소크라테스가 다시 고개를 갸우뚱한다.     

 

소크라테스  제가 보기엔, 선생님은 모든 인내가 다 용기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라케스>, 192c.)     

무슨 말인가? 소크라테스의 설명은 이렇다. 용기는 일종의 미덕이다. 즉, 그것은 훌륭한 것이다. 그런데 인내 중에는 훌륭하다고 보기 어려운 것도 있지 않은가? 담력을 과시한다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위험하게 거리를 질주하는 폭주족을 떠올려 보자. 이렇게 질주하기 위해서는 마음속으로 두려움을 견뎌낼 수 있어야 하니 이들은 일종의 정신적 인내를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용기라 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인내에는 ‘현명함을 동반한 인내’와 ‘어리석음을 동반한 인내’가 있다고 구분을 한 뒤, 라케스를 도와 다시 대답을 수정해준다.     


소크라테스  그럼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현명한 인내가 용기일 수 있겠습니다.

라케스  선생 말이 맞소.(<라케스>, 192d.)     


이제 용기는 “현명한 인내”라고 새롭게 규정되었다. 앞의 대답보다 더 정교해진 대답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계속된다.     


소크라테스  그럼 봅시다. 무엇과 관련해서 현명한 인내인지요?(<라케스>, 192e.)      


이건 또 무슨 말이람? 라케스는 다시 긴장한다. 소크라테스가 질문한 것은 대략 이런 뜻이다. 싸우면 질 것이 뻔한 데도 무턱대고 전투에 나서는 병사는 용감하다기보다는 어리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 반대는 어떤가? 전세가 절대적으로 유리해서 싸우면 이길 게 뻔한 전투에 자원하는 병사는 용감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현명하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용감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용기가 “현명한 인내”라고 할 때 이 ‘현명함’이란 무엇에 관한 현명함일까? 상황이 나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미리 아는 것? 그게 아니라면, 그것은 어떤 현명함일까? 

라케스는 여기서 말문이 막혀 더 나아가지 못한다. ‘나라면 어떤 대답을 할까’ 생각해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용기가 ‘영혼의 현명한 인내’라면 이 현명함은 무엇에 대한 현명함일까?     


장면2. 경건함이란 무엇인가     


품팔이 일꾼 하나가 고용주에게 벌을 받다가 실수로 그만 죽어버렸다. 과실치사다. 상황을 알게 된 에우튀프론이라는 사람이 고용주를 관청에 고발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이 사람은 바로, 고용주의 아들이었다! 친척들이 펄쩍 뛴 것은 당연한 일. “세상에, 아버지를 고발하겠다니! 그건 불경스러운 짓이야!” 하지만 에우튀프론은 완고하다. “그럼 아버지라고 해서 살인죄를 덮어주는 게 경건한 일이란 말입니까? 그것이야말로 신 앞에서 불경스런 일이지요.” 

끝내 고발장을 쓰러 온 에우튀프론은 관청 앞에서 소크라테스를 만났다. 그는 자초지종을 풀어 놓았다. “친척들은 경건함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고요.” 에우튀프론은 자칭 종교 전문가였다. 신화를 줄줄 꿰고 있고 민회에서는 계시를 받았다며 예언을 하다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소크라테스가 물었다. “자네는 경건함이 뭔지 잘 알고 있나 보군. 나한테도 말해줄 수 있나?” “그야 어렵지 않죠!” 이렇게 해서 둘의 대화가 시작된다.     

 

소크라테스  그럼 말해 보게. 자네는 무엇이 경건함이고 무엇이 불경건함이라고 주장하나?

에우튀프론  그러니까 경건함이란 지금 제가 하고 있는 바로 이것, 즉 살인이든 성물 절취든 불의한 짓을 저지른 자에 대해서, 또는 이런 유의 다른 어떤 잘못을 저지른 자에 대해서, 그가 아버지든 어머니든 또는 그 밖의 누구든 기소하는 것이지만, 기소를 하지 않는 것은 불경건한 일이라고 저는 말합니다.(<에우튀프론>, 5d-e.)    

 

에우튀프론의 대답은 라케스의 첫 번째 대답과 비슷하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바로 이것”이 경건함이라는, 자기 경험 위주의 대답이다. 소크라테스는 에우튀프론에게도 경건함의 보편적 특성을 말해달라고 다시 요청한다. 에우튀프론은 다시 대답을 한다.     


에우튀프론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경건하고, 신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은 불경건합니다.(<에우튀프론>, 6e-7a.)     


이것은 당시 희랍인들의 상식적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대답에는 맹점이 있다. 그것은 희랍의 신들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것이다. 신들끼리 때로 의견이 갈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다투는 경우도 있잖은가? 트로이아 전쟁의 발단이 된 파리스의 선택만 봐도 그렇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라는 명예를 안겨준 대가로 아프로디테의 애정과 도움을 받은 파리스는 경건한 사람인가, 아니면 헤라와 아테네에게 미움을 받은 불경건한 사람인가?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동일한 것들이 신들한테 미움 받기도 하고 사랑받기도 할 것 같거니와, 따라서 동일한 것들이 신들의 미움을 받는 것들이기도 하고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들이기도 하겠네. (…) 그러면, 에우튀프론! 이 주장대로라면, 동일한 것들이 경건한 것들이기도, 경건하지 못한 것들이기도 하겠군.(<에우튀프론>, 8a.)   

  

‘여럿’을 ‘하나’로 혼동하면서 범하는 이런 오류는 우리 주위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정치인들은 ‘국익을 위한 결정’이라는 말을 잘 쓴다. 그런데 ‘국익’이란 나라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 중 누구의 이익을 가리키는 말인가? 어떤 집단에게는 이익이 되고 어떤 집단에게는 해가 된다면 그것이 국익이라 할 수 있는가? 자신의 대답이 적절치 못했다는 게 드러나자 에우튀프론은 대답을 수정한다.     


에우튀프론  저로서야, 모든 신들이 사랑하는 것, 이것이 경건함이며, 그 반대의 것, 즉 모든 신이 미워하는 것은 불경건함이라고 말해야겠군요.(<에우튀프론>, 9e.)     


‘신들에게 사랑받는 것’이라는 대답에 에우튀프론은 ‘모든’을 끼워넣어 ‘모든 신에게 사랑받는 것’으로 수정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번에는 ‘사랑받는 것’이라는 말을 검토한다.     


소크라테스  경건함은 그것이 경건하기 때문에 사랑받는 걸까, 아니면 그것이 신들에게 사랑받기 때문에 경건한 걸까?(<에우튀프론>, 10a.)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사랑 받는다’는 것은 수동적인 상태다. 다시 말해 부수적인 결과다. 에우튀프론은 경건함의 부수 효과를 말하고 있을 뿐, 경건함 자체가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은 것이다. 마치 “좋은 대학이란 어떤 대학인가?”라는 물음에 “취업이 잘 되는 대학”이라고 답하는 것과 같다. 소크라테스라면 다시 물었을 것이다. “좋은 대학이라서 취업이 잘 되는 걸까, 취업이 잘 되니까 좋은 대학인 걸까?” 옥희 엄마는 옥희가 새 아빠를 갖게 되면 ‘세상이 망측하다고 욕을 할 것’이라며 사랑을 포기했다. 그런데 “망측해서 세상이 욕을 하는 걸까, 세상이 욕을 하기 때문에 망측한 걸까?” 어떤 사태의 본질적 특성과 부수적 속성을 혼동하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소크라테스  자네는 경건함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받고서는, 내게 그것의 본질(ousia)을 밝히려고 하지 않고, 그것과 관련된 어떤 부수적인 것(pathos)을, 즉 이 경건함이 처한 상태(모든 신들에게 사랑받음)를 말하고 있는 것 같네.(<에우튀프론>, 11a.)      


이상한 대화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당시 아테네 시민들의 일상 속에 녹아 있는 기본적인 가치들(용기, 경건, 정의, 절제, 아름다움 등등)에 대해 사람들과 문답을 주고받았다. 문답을 활용한 소크라테스의 대화 기법을 엘렝코스(elenchos)라고 한다. 검토, 검증, 논박 등의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이다. 법정용어로는 ‘신문’(訊問)이다. 

소크라테스는 무엇을 검토했을까? 그는 삶의 중요한 가치들에 대해 상대가 명료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검토했다. 생각과 삶은 얽혀 있다.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느냐는 가치에 대한 선명한 이해를 갖고 있느냐와 무관하지 않다. 생각이 꼬여 있으면 삶도 꼬일 수 있다. 그런데 생각을 검토하려면 말을 주고받아야 한다. 말을 한다는 것은 생각을 입 밖에 내고 검토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삶을 검토하는 대화였던 셈이다.

기본적인 가치일수록 깊게 생각해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그러한 가치들이 자명한 것인 양 대강 생각하고 대충 살아간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말문이 막힌다. 대화가 난관에 봉착하는 것을 아포리아(aporia)라고 한다. 더 나아갈 (poros)이 없는(a) 상태라는 뜻이다. 전문가들이라고 해서 별다를 게 없다. 당황한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보인다.     


라케스  난 내가 용기에 관해 그게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그게 방금 내게서 빠져나가 그걸 말로 모아 내지도 못하고 그게 무언지 말하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소.(<라케스>, 194b.)     


또는 이런 반응.     


에우튀프론  다음에 얘기하죠, 소크라테스 선생님. 제가 어딜 좀 바쁘게 가던 중이거든요. 이제 갈 시간이네요.(<에우튀프론>, 15e.)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할 뿐 대답을 주지는 않는다.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다른 지혜의 스승들과 달랐다. 이를테면 <논어>(論語)를 주도하는 어구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子曰)이다. 이에 비해,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주도하는 어구는 ‘그게 뭘까?’(ti esti?)이다. 소크라테스는 ‘말씀’이 아니라 ‘물음’을 준다. 그래서 답답하다.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사람들과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읽는데, 읽을 때는 대화의 논리를 따라가기 위해 낑낑대지만 다 읽고 난 후에는 뭔가 찜찜하다. 들인 공에 비해 시원하게 얻은 대답이 없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위험하기도 하다. 답을 주지도 않으면서 흔들어놓기만 하기 때문이다. 몇 주 동안 소크라테스 수업에 참여한 중3 여학생이 마지막 수업에서 말했다. “철학 수업을 하고 난 후로,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하시는 말씀이 곧이곧대로 들리질 않아요. 정말 그런가? 왜 그럴까? 이런 생각이 자꾸 들어요.”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라고 비난받은 것이 영 이유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우리 애는 참 착한 애였는데…… 글쎄, 소크라테스랑 어울려 다니더니 이상해졌다니까.” 

<아테네 학당> 부분, 노란색 옷을 입은 소크라테스(오른쪽)


그래서 소크라테스와 대화하는 일에 참을성이 필요하다. 이 대화를 통해 얻는 것은 눈에 보이는 대답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성숙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에우튀프론은 경건이 무엇인지 대해 불완전한 대답 몇 가지만 얻었을 뿐이다. 하지만 에우튀프론이 한 첫 번째 대답과 마지막 대답은 같은 수준의 것이 아니다. 아마 에우튀프론이 자신을 차분히 돌아보았다면, 소크라테스를 만나기 전과 후에 영혼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는 몇몇 중학생과 함께 <에우튀프론>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추석 연휴 뒤에 모인 자리에서 안부 인사를 나누다가 1학년 남학생에게 물었다. “추석이 좋은 건가요?” 좋은 것 같다고 한다. “맛있는 것도 먹고, 사촌동생도 만나고, 친척들한테 용돈도 받고…….” 한 번 더 물었다. “추석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걸까요?” 그러자 옆에 있던 3학년 여학생이 얼른 대답했다. “아니요.” “여자들한텐 안 좋아요.” 이때 처음에 말한 남학생 얼굴에 ‘아!’ 하는 표정이 스쳐갔다. 이 남학생은 ‘내게 좋은 것이 누군가에게는 좋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 깨달음은 ‘경험’이라는 좁은 세계를 깨뜨릴 작은 힘이 되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는 다른 무언가가 자신에게 좋은 것이라 여겨질 때 멈춰서 자신과 다른 경험을 가진 이들에 대해 상상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누면서 얻은 것은 이런 보이지 않는 성숙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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