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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멘토 Mar 02. 2017

09 네 영혼을 돌보라: 소크라테스 3

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누가 자유인인가

     

<구름>에서 페이딥피데스가 아버지와 논쟁하는 대목을 다시 보자. 지금까지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았던 가장 중요한 말이 있다. “나도 자유인으로 태어났어요!” 여기서 희랍인들이 삶의 이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 ‘자유인(eleutheros)답게 사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어떻게 사는 것일까? 

페이딥피데스의 말은 결국 ‘내가 왜 남들이 만들어놓은 도덕규범에 복종해야 하는가?’라는 뜻이다. 남이 만든 규범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은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규범을 거부하는 것이 자유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유인은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일까?     


힘이 곧 자유인가    


유명한 소피스트인 고르기아스가 아테네를 방문하자 많은 젊은이가 고르기아스에게 변론술을 배우러 왔다. 소크라테스가 그를 찾아가자 고르기아스는 변론술을 배우면 뭐가 좋은지 말한다.     


고르기아스  그것은 진실로 최고로 좋은 것이며, 사람들 자신에게는 자유의 원인이 되고, 동시에 각자 자신의 나라에서 남들을 다스릴 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되는 바로 그것이오, 소크라테스.(<고르기아스>, 452d.)     


변론술은 “가장 큰 선”(megiston agathon)이다. 동시에 그것은 “자유의 원인”이며, “다른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된다. 이 말에 따르면 좋음(to agathon)과 자유(eleutheia)와 다스림(archē)은 하나로 얽혀 있다. 곁에 있던 고르기아스의 제자 폴로스는 변론술의 가치를 한껏 과시하여 말한다.      


폴로스  그들은 나라에서 가장 큰 힘을 행사하지 않습니까? …… 그들은 참주들처럼 죽이고 싶은 자는 누구라도 죽일 수 있고, 재물을 빼앗을 수도 있으며, 내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는 자는 누구든지 나라 밖으로 내쫓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고르기아스>, 466b-c.)      


폴로스에 따르면, 연설가가 가치 있는 것은 그의 (dynamis)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원한다(boulesthai)와 좋다고 여겨진다(dokein)는 말을 구별 없이 쓰고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이 둘을 구별한다. 그는 권력자들이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일을 다 한다고 해도 그것이 자기가 원하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한다. 폴로스는 이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한다.     


폴로스  조금 전에 그들은 자기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일을 한다는 데 당신이 동의하셨잖습니까?

소크라테스  물론이지, 지금도 동의하고.

폴로스  그렇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일을 하는 거잖아요.

소크라테스  나는 아니라고 주장하네.

폴로스  자기들이 좋다고 여기는 일을 하는데도요?

소크라테스  그렇지.

폴로스  정말 고약하고도 해괴한 주장을 하십니다, 소크라테스.(<고르기아스>, 467b.)  

   

내가 누군가에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주었다고 치자. 그런데 그것이 그가 “원하는 일”이 아닐 수 있다. ‘착하지만 센스가 부족한’ 남자친구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선물을 받은 적 있다면, 또는 부모에게 (“널 위해서야”라는 말과 함께) 원치 않는 대학 학과에 입학하라고 강요받은 적 있다면 이해할 것이다. 

혹은 내가 나 자신에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는데, 그것이 사실은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던 적은 없을까? 여고생들과 수업을 할 때 이 질문을 했더니 한 학생이 딱 한 마디로 모두의 공감을 얻었다. “미용실.” 남자친구가 선물한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불만이었던 적이 있다면, 내가 직접 산 옷은 언제나 내 마음에 들었던가? 스스로 선택한 대학 학과에 당신은 만족했는가?     


소크라테스  만약 어떤 사람이, 그가 독재자든 연설가든, 사실은 더 나쁜데도 자신에게 더 좋다고 생각해서 누군가를 죽이거나 나라 밖으로 내쫓거나 재물을 빼앗을 경우에, 물론 이 사람은 자신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하는 거겠지. 그렇지? 

폴로스  그렇죠.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도 하는 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사실은 나쁘다면 말이네. 왜 대답이 없지?

폴로스  아니요,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고르기아스>, 468d.)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사실은 더 나쁜데도 …… 더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것을 베풀었을 때, 좋은 것이란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생각하기에 (그에게) 좋은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에게 좋다고 여긴 것이 사실은 (그에게) 좋은 것이 아닐 수 있다. 그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타인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까? 내가 나에게 좋은 것을 주었다. 여기서도 좋은 것이란 정확하게는 내가 생각하기에 (나에게) 좋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로 (나에게) 좋은 것일까? 아니라면 나는 나 자신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 자신을 더 모른다. 나 자신을 알게 되기까지 미용실에서 몇 차례 더 실패를 경험해야 할 것이다.

자유란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힘이 있으면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이나 원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좋은 것을 원한다. 나 자신이 좋은 삶을 살기를 원한다. 따라서 어떤 삶이 나에게 좋은지 알지 못한다면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다. 어떤 옷이 여자 친구에게 좋은 선물일지 알려면 그녀의 취향을 알아야 하듯이, 어떤 삶이 나에게 좋은지 알려면 나 자신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너 자신을 알라     


부잣집 아들이자 아테네 최고의 미소년이었던 알키비아데스는 야심이 대단했다. 고등학교 졸업반쯤 되는 나이에 품고 있던 진로가 대충 이 정도다. ① 조만간 정치 무대에 데뷔한다. ②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과시한다. ③ 큰 권력을 얻는다. ④ 아테네뿐 아니라 희랍의 다른 폴리스들에도 힘을 행사한다. ⑤ 유럽의 다른 이민족들 사이에서도 세를 떨친다. ⑥ 아시아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⑦ 페르시아의 대왕 퀴로스나 크세륵세스처럼 거대한 인물이 된다.(<알키비아데스1>, 105a-c.) 소크라테스는 외부로만 뻗어나가는 알키비아데스의 생각을 붙잡아 내부로 향하게 되돌려놓는다.    

알키비아데스 

소크라테스  자네는 자신에 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가? 지금의 상태로 남아 있을 생각인가? 아니면 뭔가 돌볼 생각인가?(<알키비아데스1>, 119a.)     


페르시아 대왕을 꿈꿀 정도는 아니겠지만 우리의 관심사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우리에게 “그대는 자신에 관해서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소크라테스  자, 자신을 돌본다는 것이 무엇이고(돌본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정작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돌보지 않는 일이 일어나지 말라고 하는 말일세), 또 이 일은 언제 하는가? 자신에게 속하는 것들을 돌볼 때면, 그때 자신도 돌보는 것인가?(<알키비아데스1>, 128a.)        


자기에게 무관심한 채 다른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자기를 돌본다고 하면서도 자기를 안 돌보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자신”과 “자신에게 속하는 것”을 구분한다. 무슨 말인가?     


소크라테스  우리는 어떤 기술로는 각각의 것 그 자체를 돌보는 한편, 다른 기술로는 그것에 속하는 것들을 돌보지. 

알키비아데스  그런 듯합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면 자네 자신에게 속하는 것들을 돌볼 때, 자네는 자네 자신을 돌보는 것은 아니군. 

알키비아데스  전혀 아니죠.(<알키비아데스1>, 128d.)     


구두는 발 자체가 아니라 발에 속하는 것, 발에 딸려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 자신’과 ‘나 자신에 속하는 것’은 다르다. 나 자신에 속하는 것들이란 달리 말하자면 ‘나의 그 무엇’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나의 지갑, 나의 자전거, 나의 학벌, 나의 인맥, 나의 직장 등등……. 이것들은 내 존재의 일부를 이루지만, ‘나 자체’라고 할 수는 없다.

구두를 돌보는 기술(구두수선 기술)과 발 자체를 돌보는 기술(발마사지 기술)은 다르다. 어떤 사람이 구두를 벗어서 손에 들고 열심히 주무르고 있다고 해보자. “뭐 하시는 거죠?” “아, 종일 걸었더니 발이 피곤해서요.”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런데 우리는 의외로 이 바보 같은 짓을 자주 한다. ‘나의 그 무엇’들을 열심히 주무르느라 오히려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은 소홀히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의문이 든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이게 진짜 나를 위한 삶인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자기 자신과 자신에게 속하는 것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혼동이 일종의 무지함, 곧 자기에 대한 무지라고 보았다. 퓌토 지역 델피에 있는 아폴론 신전에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적혀 있었는데,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즐겨 인용했다. 소크라테스에게 자기에 대한 무지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해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소크라테스  그런데 어떤가?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 자신이 무엇인지를 모르면서 어떤 기술이 사람을 더 낫게 만드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긴 하겠는가?

알키비아데스  그럴 수는 없겠지요.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말이지, 자신을 알기란 쉬운 일이고, 퓌토에 있는 신전에 [너 자신을 알라라는] 그 말을 봉헌한 사람은 하찮은 사람인가? 아니면 그것은 어려운 일이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인가?

알키비아데스  소크라테스, 제게는 누구나 다 하는 일로 보인 적도 많았고, 가장 어려운 일로 보인 적도 많았어요.(<알키비아데스1>, 128e-129a.)     


남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 자신을 아는 것은 쉬운가? 알키비아데스가 인정하듯이, 나를 아는 것은 그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다.      


너는 영혼이다     


나는 무엇일까? 이것은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와 같은 물음이다. 앞에서 소크라테스는 “각각의 것 그 자체”와 “그것에 속하는 것”을 구별했다. 이번에는 비슷하지만 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자”와 “사용되는 것”을 구별한다.(<알키비아데스1>, 129c.) 구두를 예로 들면, 나는 구두를 사용하는 자이고 구두는 나에게 사용된다. 내 몸은 어떨까? 몸을 사용하는 나와 나에게 사용되는 몸이 구별되지 않을까?     


소크라테스  그러면 도대체 사람은 무엇인가?

알키비아데스  저로서는 답변을 못하겠는데요.

소크라테스  그래도 몸을 사용하는 쪽이라는 점만큼은 자네가 말할 수 있네.

알키비아데스  예.

소크라테스  그러니까 영혼 말고 다른 무엇이 몸을 사용하겠나? 

알키비아데스  다른 것이 아니라 영혼이 사용하죠.

소크라테스  영혼이 다스리면서겠지? 

알키비아데스  예.(<알키비아데스1>, 129e-130a.)     


영혼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프쉬케(psychē)다. 본래는 호흡, 생명이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생물학적 개념에 가까웠다. 예를 들면 <일리아스>에 나오는 전사들이 죽는 장면에서 “그에게서 프쉬케가 떠나갔다”라는 말이 나온다. 소크라테스에게 프쉬케, ‘영혼’은 여전히 생명의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몸과 구분되는 정신적 실체의 의미도 가진다. 즉 삶의 내면성을 함축하는 인문학적 개념인 것이다. 

우리는 가끔 ‘영혼 없는……’이라는 말을 쓴다. 이를테면 ‘영혼 없는 대화.’ 누군가를 만나서 깔깔대며 웃기도 하고 진지한 얘기를 나눈 듯한데 헤어지고 나면 무슨 얘길 했나 싶다. 그렇다면 ‘영혼 없는 생활’도 있지 않겠나. 살고는 있지만 사는 시늉만 하는. 도대체 뭐가 빠졌기에 삶이 공허할까? 

소크라테스는 삶의 핵심을 이루는 내면성의 본질이 사용함(chrēsthai), 다스림(archein)이라고 한다. 영혼은 사용하는 주체, 다스리는 주체다. 고르기아스와 폴로스는 남을 다스리는 것을 가리켜 자유라고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 자유란 자기를 다스리는 것이다. 영혼이 빠진 삶은 내가 나를 다스리지 못하는 삶, 내가 도구로 사용되기만 하는 삶이다. 왜 이런 삶을 살게 될까? 나 자신과 도구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주체는 도구를 사용해서 어떤 행위를 한다. 그런데 주체와 도구가 너무 밀착되다 보면 도구를 주체로 착각하는 일이 벌어진다. 

몸은 내가 사용하는 가장 직접적인 도구다. 몸과 나는 너무나 밀착되어 있기에 몸이 곧 나 자신이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몸을 돌보는 일이 ‘자기관리’라고 여겨지고 맛집 탐방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 된다. 넓은 의미에서 ‘몸’을 내 삶의 외형적인 측면이라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몸과 그 비슷한 것들을 돌보고 있는 셈이다.     


소크라테스  신체를 보살피는 사람은 누구든 ‘자신의 것들’을 보살피는 것이지 ‘자신’을 보살피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알키비아데스  그럴 것 같네요.

소크라테스  그런데 돈을 보살피는 사람은 ‘자신’도 ‘자신에 속하는 것들’도 보살피는 것이 아니고, ‘자신에 속하는 것들보다도 훨씬 동떨어져 있는 것들’을 보살피는 것이 아닌가?

알키비아데스  제게는 그렇게 보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니 결국 돈을 버는 사람은 자신에 속하는 것들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군. 

알키비아데스  옳은 말씀입니다.(<알키비아데스1>, 131b-c.)     


장 밥티스트 르뇨, <쾌락의 품안에서 알키비아데스를 끌어내는 소크라테스>, 1791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자기 삶을 돌본다고 하면서도 정작 엉뚱한 것들을 돌보고 있다고 말한다. 평생 동안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권고한 것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가장 훌륭한 양반, 그대는 지혜와 힘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이름난 국가인 아테네 사람이면서, 돈이 그대에게 최대한 많아지게 하는 일, 그리고 평판과 명예는 돌보면서도 현명함과 진실, 그리고 영혼이 최대한 훌륭해지게 하는 일은 돌보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게 수치스럽지 않습니까?’(<소크라테스의 변론>, 29d-e.)      

‘네 영혼을 돌보라’는 소크라테스의 권고는 서양 윤리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가까이는 제자 플라톤부터 멀리는 소크라테스의 신랄한 비판자였던 니체까지, 이후의 서양 윤리학사는 결국 ‘네 영혼을 돌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 역사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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