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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body May 29. 2020

포스트미니멀리즘

별로 필요 없는 물건의 소중함

몇 년 전부터 미니멀리즘이 화두였다.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 남겨두는 방식으로 집을 정리하는 트렌드가 일본, 우리나라, 심지어 차고 딸린 주택에 살며 뭐든 대용량으로 사는 미국에서까지 유행하게 되었고, 정리 정돈 전문가들이 베스트셀러를 쓰고, 쇼호스트로 등장했다. 유튜브에서도 버리면서 정리하는 영상들이 인기다. 나도 한동안 미니멀리즘을 실천해보려고 했는데, 필요 없는 물건을 사지 않는 일은 그나마 쉬웠다. 필요한 사람에게 주거나 파는 일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추억이 너무 소중하거나, 정말 소중한 사람이 선물한 물건은 없애는 일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물건의 노예가 되기는 싫지만 물건을 없애기 위해 에너지를 소모하기도 싫어졌다. 사기도 버리기도 모두 지겨워졌다.


지금은 몇 세대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을 정도로 물자가 풍부한 시대다. 특히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 되면서 최근 몇 십 년 동안 공산품 가격이 말도 안 되게 싸졌고, 집집마다 필요 없는 물건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물론 사용하는 물건의 종류도 훨씬 다양해졌고,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물건들도 매일 사용하고 있다. 필요한 물건의 종류 자체가 많아졌다. 물건만 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풍요로운 천국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간은 그다지 넓어지지 않았고, 수납 시스템이 꽤 발전하고 효율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에 물건이 너무 많아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래서 미니멀리즘, 그리고 정리 정돈의 기술이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그 기술이 뭐가 그리 특별할까? 물건을 사용하고 제자리에 놓으면 정리를 특별히 하지 않아도 되는데, 문제는 그 제자리에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물건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정리의 마법은 가능한 많은 물건을 버려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 상태를 유지하려면 더 이상 사지 않든가 계속 버려야 한다. 플러스알파가 생기면 정돈의 균형이 깨지는 것이다.


많이 사는 사람들이 반드시 물건을 많이 쟁여두는 것은 아니다. 자주 사면서도 싫증 난 헌 물건을 쉽게, 그리고 빨리 버리거나 남에게 주는 사람들은 언제나 물건의 일정량을 유지하면서 수납 부족의 문제에 시달리지도 않는다. 어찌 보면 가장 똑똑하고 효율적으로 사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유명한 일본인 정리 전문가는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라고 말한다. 꼭 필요한데 설레지 않는다면? 설레는데 필요는 없다면? 그리고 그 물건을 만드는데 사용된 자원과 버렸을 때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어쩔 것인가? 더 설레는 비슷한 물건을 사기 위해 소비되는 자원과 소모되는 환경에 대한 책임감은 느끼지 않아도 되는가?


일해서 돈 벌어서 물건 사는 기쁨을 누리는 것을 죄악으로 몰수는 없다. 쓰기 위해 돈을 번 것은 맞지만 버릴 때 내는 종량제 봉투값이나 대형폐기물 처리비,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의 수고는 환경 비용의 전부가 아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 이 땅에 살게 될 사람들은 더 열악한 환경에 살면서 더 큰 비용을 내고 쓰레기를 버리게 될 수도 있다. 지금만 해도 몇 십 년 전보다 나쁜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으며 과거에는 마구 버리던 쓰레기를 이제는 법에 따라서 정확하게 버려야 한다.


잘 버리는 기술이 내 집은 깨끗하게 만들어주겠지만 환경에는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잘 버리는 사람이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버리면서 정리하는 일도 꽤 어렵고 힘든 일인데, 깨끗하고 쾌적한 주거 환경을 위해 부지런하게 시간과 노력을 바친 미니멀리스트들을 비난하자니 미안하긴 하다. 내 동생과 친한 친구가 이 부류에 속하고 집을 언제나 깨끗하게 해놓기 때문에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이 나를 “폐지할매”라고 놀리던 것에 대한 복수 같아서 마음이 더 불편하다.


그러나 실제로 내 마음은 폐지 줍는 분들과 통하는 면이 있다. 미니멀리스트들이 버리는 물건을 얻어와서 잘 쓰기도 한다. 필요해서 얻어오고 아까워서 주워왔다. 그런데 가끔은 남을 위해서도 가져왔다. 남에게 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집에 어쩌다 오게 될 손님을 위해서다. 수납공간이 부족하고 물건 하나 사려면 넣을 곳부터 고민해야 하는 처지이지만 나와 가족을 찾아온 사람에게는 편안하고 쾌적한 밥상과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다. 옷장이 좁아 옷 사기 고민되더라도 '설레지 않는 짐'을 끌어안고 살면서 마음이 풍요롭고 따뜻한 집주인이 되고 싶다. 그렇다고 집에 손님이 그렇게 자주 오는 편은 아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집에서 만나는 것을 피하는 분위기가 되어 서로 집으로는 안 가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누가 오면 좋다. 계획한 것이든 갑자기 들이닥친 것이든 잘난 것도 없는 나 보려고 누추한 집구석 찾아준 것이 고마워서 한참 붙잡아놓고 싶다. 서울 한복판에 살면서도 길손이 그리운 내가 이상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전 세계 언론사의 인터넷 사이트가 손안에 있는데도, 뉴스 안 봐도 카톡방에 다 올라오는데도, 외지 소식을 생전 못 듣고 사는 무인도 주민 같은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이 자랑은 아니다. 하지만 필요 없는 요를 버리지 않음으로써 아이 친구들이 어쩌다 자고 간다고 할 때 더 기쁘게 맞이할 수 있다. 매일 카톡방에서 만나는 친구들이 갑자기 온다 하면 손 안 닿는 부엌장 안에 차곡차곡 정리해 둔 금박 두른 접시들을 신나게 꺼낼 것이다. 깔끔한 미니멀리스트들이 와서 보고 “제발 좀 버려라!”라고 타박하면 금박 접시에 안주 담아 술을 먹여 요 깔고 꿀잠을 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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