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신령의 선물
나는 거의 날마다 아파트 뒷산에서 개 산책을 시킨다. 등산복과 스틱으로 무장한 아주머니, 아저씨들과 같은 부류가 되기 싫어 후줄근한 티셔츠 차림으로. 하지만 나무가 드리워진 산길을 걷다 보면 나도 마음은 등산복 부대원이다.
몇 달 전 벚꽃과 살구꽃이 뒷산, 앞산, 집 앞에까지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꽃비 내리며 사라졌다. 사실 완전히 사라졌다기보다는 한동안 산길에 연분홍색 카펫으로 깔려 있었다. 나와 개의 입에서 내뿜는 이산화탄소 말고는 자연에 아무것도 보태준 것이 없는데 자연은 내 눈, 코, 그리고 발 (꽃 카펫은 흙보다 약간 푹신하다)을 행복하게 해 주었다.
몇 주 전부터 산길에 살구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로 짓이겨져 있었지만.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어서 피해서 걸어 다녔다.. 며칠 전에 사람들이 별로 안 다니는 뒷길을 개랑 걷고 있는데 할머니 두 분이 약간 비탈진 곳에서 살구를 주워 모으고 계셨다. 한 분이 나를 보시고는 살구 하나를 반으로 쪼개 먹으라고 내미셨다. 벌레가 있을까 봐 조금 찜찜했지만 눈 딱 감고 먹었다. 새콤달콤한 향이 확 올라오면서 부드럽고 쫀득하니 맛있었다.
“맛있지? 맛 별로 없는 것도 약되는겨.”
“진짜요? 잘 먹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일을 하다 살구향 나는 와인에 대한 글을 읽었다. 한 시간 전에 맛봤던 그 야리야리한 풍미가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살구가 너무나 먹고 싶어 졌다. 비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는데, 다음 날 가면 다 뭉개졌을 것 같고... 에라 모르겠다. 개를 데리고 그 뒷길로 달려갔다. 가서 보니 어마어마하게 큰 살구나무 두 그루가 사이좋은 자매처럼 손 붙잡고 서 있었다. 높은 가지에 수없이 많은 살구들이 잎 사이에 점점이 박혀 있었다. 여름 햇살 받은 열매들은 탱탱하고 예뻤다.
하지만 나무 밑 비탈에는 뭉개진 살구 밖에 없었다. 에잉, 허탕인가? 그냥 한 번 빌어봤다. “신신령님, 살구 하나만 주세요...” 그 순간 살구 하나가 뚝 떨어졌다. 줍는 순간 반으로 쪼개졌다. 그리고 다른 살구가 내 머리를 딱 때리고 비탈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고는 사방팔방 살구 우박이 내렸다. 바람이 살살 불면서 익은 살구들에 나에게로 내려왔다.
“산신령님 고맙습니다!”
집에 와서 정신 차리고 향을 음미했다. 반으로 쪼개지면서 자그마한 씨가 쏙 빠져버리는데도 과육에서 씨 맛이 많이 났다. 자두나 앵두보다는 약간 텁텁하고 가루가 느껴지는 맛. 바닐라 향기. 살구잼처럼 달콤한 향. 짜릿하고 이를 시리게 하는 신맛. 살구를 알게 되었다. 몇 년 전에 마셨던 뤼나르 로제 빈티지 샴페인에서 딱 이런 향이 났었다. 사실 살구향이 난다는 와인 종류는 많지만 살구향을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던 것 같다. 살구잼, 살구 페이스트리, 살구 맛 사탕으로 추측한 맛이었을 뿐이다.
살구 할머니들과 살구나무 자매님들 덕분에 이제 나는 비오니에, 샤르도네, 리슬링, 베르데호 같은 와인을 맛볼 때 숨어있는 살구향을 망설임 없이 콕 집어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