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없는 자아로 시작된 사회생활
"자, 여러분. 민정 씨가 임신했답니다."
나처럼 고깃집 회식 자리에서 임신 발표를 당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예전 직장의 조직 문화는 구성원 간의 결속력이 강했다. 팀워크가 좋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사생활의 경계가 유독 희미한 곳이었다. 네 일이 내 일이고, 내 일이 네 일이 되는 것이 일상적이었고, 사생활을 공유하고 공유하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은 조직이었다.
"태명은 정했어? 아직 못 정했나?"
"팀장님, 홍보팀의 경사니까 태명은 '홍보'로 하면 어떨까요?"
"홍보 좋은데? 그럼 건배사 할까? 홍보를!"
"위하여!"
아이의 태명을 왜 자기들 마음대로 정하고 즐거워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 상황이 마냥 유쾌하지 않았지만 내색할 수도 없었다. 타인중심의 관계 성향이 강했던 때라 내가 불편한 게 낫지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싫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상대는 평가자인 팀장님이다. 바다 수영하고 샤워하지 않은듯한 찝찝함으로 태명의 탈을 쓴 팀명 '홍보'를 좋아하는 척 했다. '홍보'의 건배사는 연신 고깃집에 울려 퍼졌다.
직장을 다니는 동안 또 하나의 가족을 강조하며 가족과 회사의 경계가 없는 생활을 했다. 처음 입사했을 때는 이런 가족 같은 분위기가 친근하게 다가왔다. 형제, 자매가 없었기에 회사 선배들이 가끔은 언니, 오빠처럼 느껴졌다. 본격적인 인사 평가와 구조 조정을 거치면서 결국 서로가 경쟁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혼자 씁쓸해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따뜻해서 좋았다. 이처럼 회사의 분위기도 분명 영향을 줬지만 스스로 회사와 가족의 경계를 분명하게 만들지 못하고 나의 입지를 점점 좁혀 나갔다. 가장 결정적 이유는 엄마의 장례식이다.
입사 2년 차 때 엄마의 장례를 치르면서 회사로부터 물심양면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내내 마음의 빚처럼 남겨졌다. 요즘은 자녀가 하나인 경우가 흔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외동인 집이 한 손에 꼽힐 정도였다. 엄마가 돌아가신 2006년에는 20대 여자 상주가 조문객 맞이 하는 것을 유독 안쓰럽게 여겼다. 그래서 회사에 부고 소식이 올라가자 동료, 선후배가 발 벗고 달려와 형제 없는 나를 위해 자기 일처럼 장례식장을 지켜 주었다. 덕분에 장례 기간 동안 힘들거나 외롭지 않을 수 있었고, 장지까지 동행해 주는 그들과 함께 슬픔을 나눌 수 있었다. 정말 고마웠고, 평생 갚아야 할 빚이라 여겼다. 이 부채의식은 회사와 사람들에 대한 충성심이 되어 나의 에너지가 타인들을 위해 희생되는 것을 점점 더 정당화시켰다. 내가 나인지 회사인지를 모른 채 스스로 경계를 허물어갔다.
가족 같은 회사를 이야기할 때, 나의 가족은 집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와 타인의 경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의 존재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당시에는 오히려 가족 같은 회사가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 준다고 착각했다. 심리학에서 '애착'이란 용어가 나온다. 이것은 아이가 엄마에게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집착으로 살아남기 위한 유아기 생존본능이다. 그런데 유아기 생존본능이 엄마의 빈자리를 깨고 회사와의 관계에서 다시 나타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유아기 때 형성된 애착이 '불안정' 했기에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관계는 항상 '불안정'했다. 인정받기 위해 애썼고, 실수하지 않으려 긴장했다. 관계가 불편해지지 않으려 눈치를 살피고, 실적이 곧 나의 가치라 여기며 성과에 집착했다. 영혼을 갈아 넣듯 일하다 영혼이 사라졌는지 일의 중심에는 항상 내가 없었고 오로지 회사만 존재했다. 그것만이 회사에 대한 고마움을 돌려주는 유일한 방법이라 착각하면서 회사 일이라면 순한 양처럼 행동했다.
한 조직의 구성원이 되기 전에 자아에 대한 이해와 자존감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나의 스토리는 지금과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자신의 존재를 가치 있게 여기려면 자기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자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다양하게 배우고 익히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자기 이해는 그 과정에서 당연하게 온다고 믿었다. 사실상 다양하게 배우고 익히는 과정은 자신의 관심을 탐색하는 과정이지 밀도 있게 자신만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아니다. 나의 경우는 탐색만 하다 결국 자신은 못 찾고 사회에 진출해 버린 케이스였다.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회사에 머무르는 상황에서 온전히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은 가질래야 가질 수 없었다. 나를 위한 시간을 확보하더라도 그 시간에 정작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으니 회사를 다녔던 기간에 진짜 나는 없었다.
회사는 또 하나의 가족이 될 수 없다.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한다 해도 동료이지 가족은 결코 아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몰랐다. 나와 회사와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 서로 뒤섞여 내가 회사인지 회사가 나인지 헷갈리는 상황이 계속 만들어졌다. 인생은 나를 위한 삶이지 회사를 위한 삶이 아닌데 혼자만의 부채의식으로 회사만을 위해 살아갔다.
일로 자아실현을 한다고 말했지만 일을 빼고 나면 나란 존재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온전한 나 그 자체로는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인정받으려면 자신을 항상 돌봐야 한다는 것을 당시에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일과 회사는 언제 없어질지 모르지만 '나'는 죽는 날까지 함께 해야 하는 존재다. 어느 것에 먼저 가치를 두어야 하는지 지금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나 미숙한 어른에게는 숨은 그림 찾기 만큼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미숙한 어른의 성숙되어 가는 과정, 그것이 진짜 자존감을 만드는 일이란 걸 그때는 정말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