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적인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이 다양성을 만든다.

코로나 스쿨혁명 3-5

by 김은형

독자적인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이 다양성을 만든다.


독자적인 부모와 자녀의 라이프스타일이 사회의 다양성을 만든다.

같은 가족이라도 서로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각 세대만의 차별적인 라이프스타일대로 개성 있게 살아가는 사회는 더욱 진보한다. 아이가 부모로부터 카피된 라이프스타일을 비평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새로운 지향점을 가진 자신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창조하고 나와 타자의 지향점의 차이를 인정하도록 스스로 묻고 대답하게 도와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하나의 프로젝트를 협력하며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사유의 깊이를 더할 수 있는 인문학 코드를 학습과정에 구조화한 공동체 협력 프로젝트 학습은 더욱 중요하다.


사회학자 노명우는 ‘가족은 훌륭한 관계를 서로 맺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힘을 발휘하는 제도이다.’라고 말한다. 표피적이고 슬로건적인 ‘가족’이나 ‘가정’이 우리에게 최선을 말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봉준호 영화 ‘기생충’에서도 언급되었다. 핵가족 제도 자체가 자본주의의 속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제도다. 자기 가족만 잘먹고 잘살면 그만인 사회에서 소비는 최고의 마술이자 미덕이 된다. 현대의 부모들이 자녀에게 아침에 건네는 첫인사는 “밥 먹어!”이고 밤에 건네는 인사는 “밥은 먹었니?”이다. 교육이 아닌 사육의 나날이다.


자녀가 20세가 되어 독립을 하게 되면 내 가족이라기보다는 이웃사촌으로 인식하며 그가 독립개체임을 인정해야한다. 이런 선긋기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우리 아이들은 부모가 죽을 때 까지 아들과 딸의 수준에서 성장할 수 없음은 물론 부모는 죽을 때까지 의존하는 자녀들을 업고 가야한다.


의존적인 관계는 결국 상호간 불행을 낳는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못할 때 우리는 존재 자체의 자유와 행복이라는 근원적인 교육의 목표에 다다를 수 없다. 자기와 타자의 균형을 맞추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자신을 잃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지향점과 니즈를 반영한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갖고 살아가지도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ICT기반 매체들의 강력한 영향은 주체의 존재를 더 위태롭게 만든다.


그것이 꼭 필요한가? 아니면 불안한가?

이미 AI와 빅데이터는 물론 코로나가 우리 삶의 전통적인 스타일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삶의 스타일이 변환되었다는 것은, 사고 패턴의 변화를 의미한다. 학교에 가지 않고 직장에 가지 않아도 삶이 영위된다는 것을 코로나는 이미 세계인들에게 ‘집콕’의 체험으로 납득시켰다. 인간 사고의 극적인 변환을 초래한 상태임은 물론 사회적 시스템도 극적으로 바꿔놓았다. 코로나와 공룡 IT기업들은 어쩌면 천생연분이다. 짝이 잘 맞는 파트너? 궁합이 잘 맞는다.


앞으로 우리에게 광장에서 만나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집단행동과 공동체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더 허락될까? 코로나 집콕은 다소 부정적으로 무섭게 환기해보자면 가택연금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코로나의 위험으로부터의‘ 안전한 보호’로 인식했다. 이성적이 되기에는 미디어로 전파된 코로나의 불안과 공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서로를 돕겠다며 카피해서 나른 ‘코로나 안전수칙’이 오히려 코로나의 공포를 더 키웠는지도 모른다. 이미 사회의 방향은 일인 가구 시스템으로 가닥이 잡혔고, 공룡 IT기업들이 개발한 솔루션들은 새로운 사회의 운영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코로나 시대에 마트에 가는 것이 바보고, 학원도 아닌 학교를 보내는 학부모들은 어리석다는 암묵적 언어들..... 그러나 과외와 학원을 지속적으로 보내는 성실함?에 대해 우린 스스로 질문해야한다.


그것이 꼭 필요한가? 아니면 불안한가?


더 적극적인 자세로 부모교사를 자처해야한다.

틱톡과 같은 신흥 거대 플랫폼은 곧 10대들도 경제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될 것이다. 만 18세가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한다는 신화는 아마도 더 빨리 깨어질 확률도 높고, 의무적인 공교육 연령이 하향 조정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유아교육 시기부터 인문학적 사유를 훈련시키는 교육프로그램의 도입은 더 절실해진다. 유치원생이 더 철학적일 수 있고 철학 수업을 더 잘 이해할 수도 있다. 왜? 단순 명료함과 아직 프레임에 길들여지지 않은 본성 때문일까?


왜냐고 질문해야하고,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전 방위적 사고는 물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존중의 태도도 가정의 홈스쿨링으로 배워야 한다. 교육의 주체가 가정이냐 학교냐를 따지는 것은 이제 무의미하다. 다양한 독서와 질문을 통한 인문학교육은 유아기부터 시작한다가 핵심이다. 어릴수록 아이들은 더 많이 스스로 배운다. 그렇다면 홈스쿨링에서 부모들이 더 적극적인 자세로 부모교사를 자처해야한다.


우리가 가정에서부터 아이들을 자립심이 강하고 용기에 가득 찬 협력적인 사람으로 훈련시켜 나가야하는 것도 ‘행복한 삶은 공통의 행복을 향해 기여하고 협력할 때’ 더 커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고 해도 인간의 본성은 무리를 떠나서 행복하게 살기는 어렵다.


밥 그릇 인데요?

28년 전 쯤 무단결석하는 철이네 집에 가정 방문해서 받은 충격은 아직도 지워지지가 않는다. 벽지는 반쯤 뜯겨 나가고, 주황색 플라스틱 함지박에 가득 비벼있는 밥과 그것을 덜어 먹은 조그만 주황색 플라스틱 바가지들이 널 부러져 있는 양철 밥상은 충격 그 자체였다. “밥을 플라스틱 바가지에 먹어도 되니?” 라고 묻는 내게 학생이 되물었다.


“밥 그릇 인데요?”


학생의 일상에서 주황색 플라스틱 바가지는 의심의 여지없는 밥그릇일 뿐 이었다. 아들러는 고도의 능력은 특별한 유전이 아닌 오랫동안의 관심과 훈련으로 비롯된다고 했다. 만약 철이가 푸드스타일리스트의 아들로 태어나서 다양한 식기류에 대한 관심과 훈련 속에서 자랐다면, 왜 주황색 플라스틱 바가지에 밥을 먹어야하는지 질문했을 것이다. 그뿐인가? 철이는 학교도 꼬박꼬박 잘나왔을 것이다. 철이는 다른 친구들과 일반 상식이 통하지 않는 답답하거나 엉뚱한 친구로 치부되었기에 학교도 편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남루하고 거친 집안이 그를 쉬게 하지도 않았다. 손을 잡아주면 손을 빼고, 등을 토닥이면 몸을 비틀어 피하며 집과 학교를 끊임없이 방황하던 아이를 나는 이제 비로소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아이가 거부하는 것이 바로 그 아이가 요구하는 것이다.”

뛰어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문제가 발견되면 스스로 질문하고 자발적으로 깨달은 후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스스로 훈련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며 자신의 인생스타일을 만든 사람들이다. 부모에 의해 프로그래밍 된 라이프스타일 그대로 살아가며 불행의 악순환을 겪고 있는 아이가 있다면, 이제 우리가 함께 교육으로 그를 각성시켜야한다.


이미 우리는 하나로 연결된 존재들이다. 나만 잘산다고 잘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의 시작은 가정의 기능을 좀 더 넓게 확장한 것이다. 만일 부모가 자녀 교육을 전담하고 인생의 제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자녀들을 충분히 교육시킬 수 만 있다면 어쩌면 학교 교육은 필요 없을 것이다. 학교에 맡겨진 아이들을 위해 우리는 더 큰 비전을 갖도록 안내함은 물론이고, 더 아름답고 좋은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하도록 다양한 문화체험을 프로그램화하고, 손을 빼면 다시 잡고, 몸을 피하면 다시 안아 등을 두들기며 부모와 같은 사랑과 협력의 메시지로 소통해야한다.


이제 가정과 학교의 기능은 혼제 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었다. 아니 그보다는 융합이나 연계 또는 더 동등한 위계에서의 협력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학교는 가정의 역할을 분담하고, 가정은 학교의 역할을 분담하며 우리 아이들에게 최적의 교육환경과 양질의 교육 기회를 만들어 줘야한다.


교육의 범주도 우주적 차원에서의 연기론적 스케일로 확장시켜야하지만 교육의 대상과 주체에 대한 정의 또한 더욱 확장된 사고로 해석해야한다. 나의 삶의 여유도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초래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현재 내 삶의 지향점이나 취향들은 대부분 부모님과 살았던 어린 시절에 키워졌고, 성장 기간을 거치면서 조금씩 더해지거나 삭제되며 수정되었을 뿐이다. 오쇼 라즈니쉬(Rajneesh Chandra Mohan Jain)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대는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어떤 프로그램이 머릿속에 주입되면, 그대는 그 프로그램을 따르는 것이다. 잠에서 눈을 뜬 상태는 기계적인 습관들로 가득 차 있다. 그대는 단순히 그 습관을 반복할 뿐이며, 각 세대는 계속해서 그 기계적인 습관을 다음 세대에 전수해왔다. 이것이 진보가 그토록 불가능해 보이는 이유다. 왜냐하면 부모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프로그래밍을 아이들에게 각인시키며, 그 프로그래밍은 수세기 동안 계속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깨어있는 상태는 전혀 프로그램화되어 있지 않고 조건화되어 있지 않을 때만 일어나는 것이다.


오쇼 라즈니쉬가 말하는 세대를 이은 습관적인 프로그램이 바로 각 가정 고유의 라이프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상들로부터 습관적으로 학습된 프로그램, 라이프스타일을 우리집 가풍이니까 전통이라 좋은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질문하는 힘을 교육해야한다.


“왜?” 라는 의문을 제시하고 새로운 사유로 삶을 창조하는 인문학적 사유의 힘을 가정에서부터 키워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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