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스쿨혁명 3-7
종교와 교육의 본질은 각(覺)에 있다.
종교적 일상을 삶의 패턴으로 만드는 교육
노틀담 성당의 종교적 상징성은 파리 시민들의 관혼상제와 결합되면서 프랑스 사람들의 일생을 지켜보는 친구와도 같은 인격체로 의인화되었다. 명품 브랜드들이 앞 다투어 재건 성금을 기탁한 것 또한 공간의 인간적인 상징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노틀담 성당에서 결혼식과 장례식에 참석하고, 주일에 미사를 드리고 성당 앞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것이 파리 사람들의 일상이며 일생인 것이다.
종교는 이처럼 강력한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을 재현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부모들을 따라 성당이나 절, 또는 모스크에 다니면서 각 종교가 제안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그대로 배우며 익히게 되고 각 사회의 전통이 된다. 꾸준한 반복학습에 의해 종교적 일상을 습관화 하여 삶의 패턴으로 만드는 강력한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마누법전은 인도인의 라이프 스타일?
종교는 한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변형시킬 뿐만 아니라 국가단위로 작동할 때는 인도의 카스트제도처럼 한 나라의 전통과 정체성으로 뿌리를 내리기도 한다.
힌두교의 성전인 ‘마누(Manu)법전’은 인도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규정하고 국가전체 운영 시스템이 되어 현재까지도 카스트제도라는 불평등한 신분제도 안에서 브라만 계급의 특권을 위해 불가촉천민들은 기꺼이 노동력을 바치고 억압당한다. 인도인들에게 사회규범에 따른 윤리와 도덕을 교육한다는 것은 결국 ‘마누법전’이 교과서가 된다는 이야기다. 종교가 곧 교육 내용의 전부이며 삶의 전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슬람교 또한 단순한 신앙이 아니라 이슬람교도들의 라이프 스타일 그 자체다, 이슬람교의 성전인 ‘코란(Koran)’의 가르침대로 무슬림은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고, 헌금하고, 배교자와 불신자에 맞서 싸우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종교는 곧 의식주 일상이고 교육이다.
얼마 전 프랑스의 중학교 역사 교사인 사뮈엘 파티가 자신의 수업 시간에 표현의 자유를 설명하기 위해 이슬람교 선지자 무함마드를 풍자 소재로 삼은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 2장을 학생들에게 보여줬다가 이슬람청년에게 참수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코란과 선지자 무함마드 자체가 이슬람교도들의 삶의 목표이자 교육의 목적인 것이다. 그러니 종교와 일상을 분리해서 교육을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종교 자체가 삶의 양식이며 총체이기 때문에 의식주는 당연히 영향을 받는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종교에 따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조정하고 더 많은 복과 은총을 받기 위해 신이 만든 계율에 따라 행동한다. 이에 따라 의식주가 달라지기도 한다.
종교라는 하나의 신념뿐만 아니라 각 사회를 지배하는 사상과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강력하게 지배하다보니 정치 사상적 이슈로 변질되며 분쟁은 더욱 큰 파장을 불러일으켜 사람들의 사고패턴과 일상을 변화시킨다. 이때 교육이라는 건전하고 안전한 시스템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조종하여 지배자의 안전과 권력을 도모하기도 한다. ‘교육은 좋은 것이다’라는 명료한 답에 대해 우리가 성찰적이고 비평적인 관점으로 다시 생각해야한다는 것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데올로기가 만드는 일상과 라이프 스타일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유태인들의 삶의 변화라는 것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였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미래 사회에서의 종교와 사상 또한 어쩌면 곧 AI와 인공지능을 가능하게 한 기술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아니, AI 자체가 뛰어난 지식과 지능과 속도로 인간들을 통제하며 또 하나의 종교와 사상이 될 수도 있다. 가정에서 부모들이 먼저 명상 등 영성적인 교육에 집중해 나가야할 이유다.
종파와 신념을 떠나 우린 먼저 주체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지키고 그를 위한 평화를 주장할 수 있어야한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무의식에 관계된 부분이다. 무의식이란 꾸준히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생활패턴을 통해 형성되어진다. 각 가정마다 아침밥상 앞에서 행해지는 감사기도 만큼 반복적인 것이 있을까?
아이와 함께 책을 읽고, 산책을 하고, 낚시를 하거나 멍 때리고 있을 때라도 부모의 언행에 따라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배워나간다. 종교가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이 되는 이유다. 아침 식사 기도가 아이에겐 커다란 영성으로 자리 잡는다. 그래서 홈스쿨링에서는 어떤 신앙을 가졌다고 해도 종교적이고 영성적인 부모의 태도와 자세가 중요하다.
수행자의 자발적인 수행 자세가 미래 학습의 형태다.
교육이 수행적 관점으로 이동해야한다는 말이다. 이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생활 패턴과 자세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배워나가는 것이 미래의 학습 패턴이라면 수행자가 자발적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며 꾸준히 정진하는 태도의 패턴과도 맥락이 같아진다. 학창시절 공부를 하면서 참아 내야하는 것이 한 두 가지였던가? 유발하라리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한 말은 매우 유의미하다.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앞으로는 기술이 나를 대신해 나의 목표를 결정하고 나의 삶을 통제하기가 너무나 쉬워질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을 잘 모른다.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할수록 외부 조직의 희생물이 되기 쉽다. 우리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조차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것은 언제나 국가 선전, 아니면 이념적 세뇌, 상업 광고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나 자신의 목소리이고 어떤 것이 시장 전문가가 주입한 내용인지 식별할 수 있을까? 공룡기업들은 모두 우리를 속속들이 알기위해 AI 알고리즘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무엇을 사고, 누구를 만나는지 지켜보고 있다. 우리 개인의 존재와 삶의 미래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싶다면 알고리즘보다 먼저 나 자신을 알아야한다.
이미 우리는 코로나로 집콕과 자가격리라는 ‘통제’를 경험했다. 가택연금과도 같은 통제는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유발하라리의 말처럼 공룡기업과 정부 등 강력한 디지털 권력에 의해 삶이 통째로 통제를 당하는 현실은 이미 코로나로 증명되었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지키고 내 삶의 주인이 되려면 두려움과 공포를 초월하여 깨어 있어야한다.
깨임은 곧 ‘각(覺)’이고, 교육의 본질 또한 자각(自覺)에 있다. 교육이 더욱 자발적인 학습체계와 자기 성찰에 집중해서 수행적 관점으로 직관과 통찰력을 키워나가야만 살아남는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홈스쿨링도 삶을 융합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종합하는 융합프로젝트 학습이 절실하다. 종교성과 명상이 강력한 미래교육 코드로 떠오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