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9. 브뤼셀의 일상여행자 7
벨기에 왕립미술관은 루아얄 광장과 몽 데 자르 사이에 있다. 1803년부터 2만점 이상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올드마스터스 미술관(Musee Oldmasters), 현대미술관(Musee Modern), 마그리트미술관 (Musee Magritte) 으로 구성되어있는데, 그 규모가 참 대단하다. 특히 올드마스터스 미술관의 루벤스 관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바티칸에서 느꼈던 경외감이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Peter Paul Rubens), 램브란트와 함께 루벤스는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예술가다.
벨기에는 본래 플랑드르지역으로 불렸고 루벤스는 바로 이곳 출신이다.
루벤스는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거장들의 그림을 연구했고, 당대에 인정받은 행운아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까? 루벤스 작품의 규모는 참 대단했다. 루벤스관은 압도적이었다. ‘성스러움’과 ‘경외’가 공존하는, 아름다움 자체가 성스러움이 되고 경외가 되는 치환의 극치를 경험했다. 그림을 보는 것으로 기도가 이루어지는 경이로움이랄까?
밀랍인형처럼 창백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박혔던 못을 제거하고 내려오는 예수의 모습은 참 우리의 원죄라는 것이, 인간들의 욕망과 습관적인 사고와 행동패턴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지독한 것 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우리 안에 잠들어있는, 아니 깨어있으나 억압하고 있는 ‘쾌’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들이 만들어낸 원죄! 그 원죄란 어찌 보면 내 무의식 속에 담겨있는 조상 대대로의 욕망의 축적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업장을 소멸한다거나 원죄를 씻는다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무의식의 차원이기에 더더욱 어려운 것이리라. 하지만 그런 무의식속 원죄를 우리 스스로가 깨닫기 까지는, 깨인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무지무지 어려운 일이기에 예수는 굳이 가시면류관의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처절하게 우리의 잠든 의식을 깨우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사에 감사해야하는 이유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 고통 자체가 행운이 되고, 축복과 감사의 기제(機制)가 된다는 것을 깊은 기도로 느낀다.
특정 종교를 가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실 우리 삶의 모든 국면과 순간 마다 종교와 기도는 숨어있다. 루벤스의 그림을 보며 압도적인 종교적 심상을 갖는 것과 거리의 집시가 안고 있는 아기를 보면서 갖게 되는 종교적인 감성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니체와 오쇼가 말하는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는 어쩌면 신은 본래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삶’ 자체가 신적 영역이며 종교적이라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닐까? 성속을 구분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불경과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도 결국 사람들의 이야기 아니던가? 그리고 붓다와 예수도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깨달은 사람들 아니던가? 자신의 존재 자체의 신성함과 정결함을 깨달은 자! 그래서 그들은 우리에게 스승이 되고 신적 존재가 된다.
루벤스관의 장엄한 경외심과 달리, 고흐의 초기 그림인 농부의 얼굴 또한 너무나 종교적이었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의 부분같이 어둡고 직설적인 눈빛을 가진 가난한 농부의 초상화는 예수의 초상처럼 성스러웠다. 이유는 하나다. 너무나 진실한 삶의 직시와 진심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고흐가 위대한 예술가라면, 바로 이렇듯 대상자를 명확하고 명철하게 뚫어보는 영적 통찰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고흐의 그림을 통해 나는 그 시대 농민들의 삶과 고뇌를, 그의 눈빛이 전하는 내면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는 듯 착각이 든다. 나는 고흐의 그림 속 농부와 한 참 이야기를 나눈다. 그가 가졌던 삶의 고통과 소망과 욕망에 대해, 나의 삶의 고통과 소망과 욕망에 대해 우린 서로 공유하고 공감한다. 그리곤 서로 다독거린다.
“ 알아, 알아. 괜찮아. 괜찮아. 다 지나가. 다 그런 거야. 그냥 그런 거야. 그냥 그대로도 좋은 거야. 지금 이대로도 좋은 거야. 너와 내가 주고받는 이 깊은 공감의 눈빛 하나만으로도 된 거야. 이대로도 좋은 거야. 지금 이 순간, 너와 내가 공유하고 있는 이 연민과 이해의 감정 하나만으로도 우린 행복한 거야. 된 거야. 이걸로도 우린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 있는 거야. 지금 이대로의 날 이해해주고 인정해주고 깊이 느껴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런 상상만으로도 우린 된 거야. 네가 내게 구원이고, 내가 너에 구원인 거야.”
갑자기 내 안에 음악이 흐르기 시작한다. 안드레아 보첼리가 부르는 La Vie En Rose , 다시 내 가슴은 성스러운 축복의 기분에서 세속적인 설레임으로 뛰기 시작한다. 행복해지기 시작한다.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