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9 . 브뤼셀의 일상여행자 9
젊은이의 죽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에게 절대적인 비애를 안긴다.
오늘, 플로리다 고등학교의 비극 앞에 나는 다시 2018년 1월 19일날 갔던 브뤼셀 공동묘지의 한 조각상을 떠올리게 된다. 젊은 청년의 죽음을 기리는 듯, 그 무덤엔 아름다운 청년의 조각이 비석을 대신하고 있었다.
현대 학생들이 인터넷과 미디어 매체 등의 영향이나 자본 중심의 사회구조 속에서 방치되며 겪게 되는 괴물로의 진화에 대해 우리는 너무 둔감하다. 열등감과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나이의 적고 많음을 떠나 점점 괴물체로 변화하기 마련이다. 사랑받지 못하고, 일정한 관계 속에서 소통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은 일상적인 사고와 관계를 풀어가는 지혜를 갖기가 쉽지 않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한다는 옛사람들의 말이 맞다.
트럼프의 미국이 불안해보이것도, 트럼프 주도의 미국정부의 정책들이 대체로 단 하나의 정답(미국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미국국민들 개인에게도 이익이다라는 극단적 논리?) 아래 다른 정답의 가능성을 봉쇄하고 미국 외의 것을 배척하는 이기적 개인주의가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나에게도 그런 이기주의가 있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본다.
단 하나의 정답을 맹신하는 리더가 있는 사회가 건강한가?를 모두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단 하나의 국면에만 모든 조직의 시스템을 집중시켜 단 한 가지 답만을 양산하는 사회와 조직과 개인의 삶은 건강할 수 없다.
그곳엔 다양한 형태의 죽음의 향기가 깃든다.
자신을 죽이는 자살부터 타살까지 ... 물리적으로 진짜 살인이 일어나기도 하고 정신적인 살인이 자행되기도 한다. 국가, 그 하부조직, 직장, 가정 모두 마찬가지다. 어쩌면 그래서 인간의 근본적 앎에 이르는 인문학과 그에 대한 교육이 더더욱 중요한 것일 것이다.
단순히 경제 법 사회 문화 예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사는 지역과 사회와 인간관계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맥락적인 학습과 배움이 일어나도록 교육 또한 다시 혁신적 구조화에 나서야한다. 먹고 입고 자고 배설하는 것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돈을 버는데 모든 힘을 다 바치도록 구조화된 교육과 사회 시스템이 진짜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청소년들이 그 존재 자체로 빛나며 아름다울 수 있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나? 희생자도 가해자도 모두 다 시대의 희생자일 가능성이 높다. 인간들의 욕망과 욕심에 의해 구축된 물질만능 시대에 소외된 괴물들.... 그게 바로 현재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우린 누구도 오늘 같은 비극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다만, 오늘은 운이 좋았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