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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메밀 Apr 09. 2019

지극히 평범한 연애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1 첫 만남


  처음 이터널 선샤인을 본 날 머리가 띵 했다. 이런 영화를 이제야 보다니! 속으로  분한 감정까지 들었다. 이 좋은 영화를 알려준 것은 바로 전 애인이다. 이제는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악연만 남은 바로 그 사람 말이다. 처음은 새벽녘에 맥주를 마시며 봤다. 1년 후, 우린 같은 시간에 같은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결국 남이 되었다.


  이터널 선샤인은 약 3년에 걸쳐 10번이나 본 영화다. 그리고 내가 차애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최애 하는 영화는 <타이타닉>인데, 오히려 더 많이 본 게 이 영화이다. 그것은 곧 곱씹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한 영화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2 지극히 평범한 연애


조엘 역의 짐 캐리와 클레멘타인 역의 케이트 윈슬렛

  영화에서 다루는 주요 소재는 ‘기억을 지우는 것’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하 클렘)은 연인 관계였다. 뜨겁던 감정이 식은 지는 오래전, 으레 장기 연인들이 그렇듯 권태가 찾아오고 싸움이 잦아졌다. 그 모든 것들이 클렘에게 상실감과 슬픔, 공허함을 남긴 걸까. 클렘은 조엘에 대한 모든 기억을 삭제해 버렸다.


사랑이 끝나니 괴로운 기억만 수면 위로 떠올랐다. 분명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도 있을 터인데, 수면 아래 깊은 곳으로 내려간 것인지, 도통 떠오르질 않는다. 그럴 때면 클렘처럼 기억을 삭제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아, 이 괴로운 기억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정확히는 기억을 지우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 사건 자체를 없던 일로 하고 싶은 것이었다. 현실에서 사건 자체를 지운 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기억을 지워주는 ‘라쿠나사’가 존재한다면? 곧이어 급한 발걸음 하나가 거기로 향할 테지.


  사실을 알게 된 조엘은 배신감에 클렘과 같은 결정을 한다. 바로 ‘라쿠나사’에 가서 클렘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우는 것! 기억이 지워지는 과정에서 조엘은 엄청난 후회를 하며,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기억만큼은 남겨달라” 외치던 장면이 있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간절히 빌어보지만 닿을 수 없는 기억 속의 목소리일 뿐.  결국엔 모든 기억이 지워져 버린다.


좋은 기억만 골라서 머릿속에 남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능하다면 헤어지는 연인 따위는 없을 것이다.


  조엘의 기억 속을 통해 본 조&클렘의 모습은 예뻤다. 사랑하는 모습, 미워하는 모습 다 보았지만 그저 예뻐 보이기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조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둘의 과거를 본 것뿐이다. 과연 클렘도 조엘과 같이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은 주관적이다. 같은 경험을 해도 각기 다른 포인트를 갖게 마련이다.


  기억이 지워진 아침, 조엘은 출근길에 갑작스러운 충동을 느끼고 몬톡행을 결정한다. 직장동료에게 식중독에 걸렸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면서까지 말이다. 직감이 그를 몬톡으로 이끈 것일까? 과연 기억이 완전히 지워진 게 맞을까? 그렇다면 그런 ‘직감’은 어디로부터 나온 것일까...?


살다 보면 한 번씩 ‘충동’이 일 때가 있다. 그때, 충동에 따랐다면 어떤 결과가 따랐을까? 확실한 건 그와 이별할 때마다 느꼈던 ‘다시 만나고픈 충동’에 너무나 따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매리 역의 커스틴 던스트

  영화 속에선 또 다른 커플을 조명한다. ‘라쿠나사’에서 일하는 매리와 닥터 하워드 박사이다. 매리는 클렘과 똑같이 하워드를 기억에서 삭제했다. 이미 결혼을 해 아내를 둔 하워드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상처 받아 기억을 지운 것 까지 비슷한 둘이지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후의 반응은 정반대이다. 클렘은 조엘과 다시 사랑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매리는 ‘라쿠나사’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영원한 사랑’만 하지 않는다. 끝을 예상하면서도 시작하는 사랑도 있다.

  


#3 연애의 끝


  클렘은 조엘과의 사랑이 식은 후 어떠한 이유에서 ‘라쿠나사’에 방문해 기억을 지웠다. 그러나 기억을 지우고도 서로에게 다시 이끌려 사랑을 시작하려 한다. 다시 시작한 두 사람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둘의 관계가 괴로운 순간이 되면, 클렘은 다시 한번 ‘라쿠나사’를 찾진 않을까. 내가 그와 헤어지고 사귀는 것을 수십 번 반복했듯 말이다.


  현실에는 ‘라쿠나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연인들은 기억을 지우는 대신 이별을 반복한다. 매리가 기억을 지운 후에 자신의 실수까지 망각하고 다시 하워드에게 반한 것처럼, 현실도 마찬가지다. 연인의 치명적인 실수나 단점, 권태를 참을 수 없어서 이별을 하고도, 밀려오는 외로움에 기억을 미화시킨다.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까지 망각하고 헤어진 연인과 다시 시작하려 한다. 어떠한가? 아직도 라쿠나사의 기억 삭제가 판타지로만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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