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단 Nov 23. 2020

식탁 아래 낙서는 지우지 말아 주세요

식탁 아래에 흐르는 시간들



가구 회사에서 검사원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검사원의 일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가구를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확인하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주는 것인데요. '매의 눈'으로 도면과 가구를 비교해가면서 수정이 필요한 부분에 '빨간색 마스킹 테이프'를 붙이는 일이 주 업무입니다. 저는 성격이 꼼꼼한 편이어서, 다른 그림 찾기 놀이를 하는 것 마냥 재밌게 일했어요. 그런데 딱! 한 가지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가구를 만드는 분들과의 기싸움이었는데요. 자신이 열심히 만들어 놓은 가구에 새파랗게 젊은 것이 와서는 빨간 딱지를 덕지덕지 붙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다시 고치라고 지적질까지 해대니 기분이 상할 수밖에요. 저의 아버지뻘 되는 분들께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해야 하는 저도 마음이 편치 않았고요. 하지만, 문제가 있는 제품이 그대로 고객에게 가게 되면 그것은 명백한 저의 책임이 되기 때문에, 속으로는 벌벌 떨면서도 '손에는 빨간 테이프를, 입에는 따끔한 잔소리'를 장착하고, 냉정하고 꾸준하게 지적질을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서로 속으로 칼을 갈고 있던 어느 날.

칼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우리는 나란히 서서 똑같이 콧잔등이 시큰해져 버립니다.

검사원은 대부분 새 가구를 살펴보는데요. 가끔 오래된 가구를 검사할 때가 있어요. 오래전에 만들어진 가구가, 누군가의 집에서 제 할 일을 다 하고, 수리를 위해 공장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놓였던 수납가구는 노랗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돌아오고요, 열심히 누군가의 무게를 견딘 의자는 여기저기가 빠져서 오는 경우가 많아요. 책상이나 식탁은 상판에 크고 작은 생활의 흔적을 묻히고 돌아오지요.


그날은  오래된 식탁 하나가 공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어서 와... 애썼어..."


공장 사람들의 인사가 참 애틋하지요. 몇십 년 전에 이곳을 떠난 식탁 하나가 제 몫을 다하고, 오늘 이렇게 다시 돌아와 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감탄이 그들의 낮은 인사와 손짓에서 그대로 전해옵니다. 누군가의 부엌에서 수많은 아침과 저녁을 함께 했을 식탁. 그것의 오랜 애씀을 위로하고, 그 고단한 얼굴을 매만지며, 말끔하게 새 단장을 시켜줄 생각에 공장 사람들은 오랜만에 설렙니다. 냉정한 검사원도 마음이 물렁해져서는 한참을 바라보고 섰지요. 이래선 안된다며, 떨어트린 매의 눈과 빨간 테이프를 주워 담고, 식탁 위의 주문서를 들여다보는데... 아, 저는 그만 무장해제되고 말았습니다. 빨간 테이프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주문서에는 식탁을 공장으로 보내며 남긴, 한 부부의 당부가 쓰여 있었습니다.


식탁 아래 작은 딸




식탁 아래 낙서는
지우지 말아 주세요.
 아이들이 어릴 때
그려 놓은 것들이에요.




아...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저는 콧잔등이 시리고, 눈시울이 촉촉해집니다.


"아이들이 다 자라 집을 떠나고,

 새로운 생활을 준비하는 분들이겠지...

 아이들은 떠나도, 추억은 떠나지 않는 것이지.

 붙잡고 싶은 것이지...

 나도 그랬으니까...."


상사의 쓸쓸한 눈빛과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돕니다.


그 식탁은 오늘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말끔해진 얼굴을 하고 집으로 돌아간 식탁. 아이들의 추억을 모두 담아 돌아간 식탁. 그 아래에는 여전히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빛이 바랜 낙서들과 가족의 시간이 흐르고 있겠지요.


지금 제가 앉아 있는 여기 부엌에도 식탁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아이들의 시간이 식탁 이곳저곳에 쌓이고 있습니다. 먼 훗날 남편과 둘만 남아 쓸쓸한 날이 오면, 식탁 아래 아이들의 작은 놀이를 떠올리게 되겠지요? 식탁을 쓰다듬으며 아이들의 흔적을 찾는 날이 오겠지요.

오래오래 아이들의 시간을 담아주길 바랍니다.

오래오래 우리와 함께 살자고, 식탁에게 넌지시 말을 걸어 봅니다.




이전 29화 엄마, 기적은 조용히 자라나고 있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