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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반성 내일의 할일

메모의 시작

by memo

나한텐 훈장이었으니까. 참 잘했어요. 도장이 꽝 박힌 일기장. 선생님한테 돌려받을 때 얼마나 떨리는지 한 번에 열어보지도 못했을 정도였어. 우선 대각선 방향으로 일기장을 틀어 놓고 아래부터 살살 공략해야 돼. 한 손으로 종이를 말아 쥐고 얼굴은 책상에 밀착하는 게 좋아. 선생님은 항상 내일의 할 일 그 칸에 찍어줬거든. 조금씩 말아가면서 파란 흔적을 찾아 보는 거야. 셋 까지도 안 가. 둘 쯤에서 결정 나 버리지. 그쯤 파란 실선 하나가 보여야 돼. 유리 테이블에 남는 동그란 물그림자처럼. 조각난 손톱달처럼. 여릿한 윤곽이 보여야 돼. 그 시절의 나는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기 위해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으니까. 일기답게. 하루도 빠짐없이 썼어. 그리고 하루도 빈틈 없이 참 잘한 내 하루를 인정받고 싶었어. 언젠가 안네의 일기를 넘어설 거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면서. 참 잘했어요. 그 하나를 남기기 위해 살았던 거야.


어느 날인가 그때 쓴 일기장을 다시 보니 섬뜩했어. 고작 한 장짜리 일기에 생략 된 정보 없이, 조금의 틈도 없이 내 하루를 적어야 했던 거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간첩으로 의심받았던 건 아닐까. 얼버무린 지점, 빈곳 같은 건 남기지 않는 게 그때 일기를 쓰는 규칙이기도 했으니까. 아침에 일어난 시간, 잠드는 시간, 날씨는 그림으로 채워 넣고, 오늘의 착한 일, 반성할 일. 그래서 결국 오늘 생활은 어땠는지 동그라미로 표시하는 칸도 있었어. 이웃의 어려운 일을 도우며 인사 잘 하고, 맡은 일은 꼭 실천해야 하고, 바른 말과 바른 행동을 써야 한다고. 여덟 살짜리 아이에게 매일 묻고 있더라고. 너무 가혹하잖아. 그 칸에 당당히 동그라미를 채워 넣을 수 없는 마음은 또 어땠겠어.

결국 매일이 실패인 셈이잖아.
아무리 넘겨봐도 없더라고. 그 모든 칸에
완벽하게 동그라미를 칠 수 있는 날이.




정말 없었어.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그때부터 난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더라고. 가까운 엄마로 시작해 친구들에게, 이웃에게, 모든 우주에 사는 누군가에게. 그래, 그걸 일찍부터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면 성공이야. 이제 다 커버린 지금, 내 하루는 어떨까. 잘은 아니더라도 적당히 살고는 있는 걸까. 그 칸에 동그라미를 채워 넣을 수 있는 날이 있기나 할까. 참 잘한 하루라고 누가 나에게 말해줄 수 있을까. 이제 그 도장은 다시 볼 수 없겠지. 나는 다시 보기로 했어. 그때의 내가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된 건 분명한 일이니까. 하나씩 거꾸로 보다보면 서른 한 살의 내가, 아니 최소한 오늘 하루에 대해서라도 알게 되지 않을까. 오늘의 반성, 내일의 할 일. 이것부터 차근차근 시작해볼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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