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메모
마지막은 무조건 깨야, 깨.
이때까지 엄마에게 배운 요리의 핵심은 다름 아닌 깨다. 새 김치를 담가서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 줄 때도 곳곳에 깨가 잘 뿌려졌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마지막엔 현관까지 깨가 든 통을 들고 쫓아와서 몇 번 더 톡톡 뿌리고 나면 그제야 먹음직스럽네. 겨우 배달 사인이 떨어지곤 했다. 출발해도 될까요. 나는 깨 범벅 김치를 가만히 보면서 어쩌면 깨가 쏟아지는 신혼 생활을 못 해본 한이 이 사태를 만든 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깨찬론자 엄마에게 깨를 빼는 요리는 있을 수 없다. 그건 요리의 정신이자 젓가락질을 시작할 수 있는 힘. 요리가 요리다워지는 것이자 진정한 완성이다. 언젠가 서울에 있는 내 자취방에 와서 부엌에 달린 문이란 문을 죄다 열어본 후에 이 집은 요리할 준비가 안 돼 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깨가 없어. 그 말만 몇 번이고 반복했다.
깨 쏟아지는 엄마의 사랑은 서울까지 계속되었다. 음식이라고는 시리얼 말아 바나나를 얹어 먹는 게 전부인 딸에게 2주에 한 번씩 얼려서 보내주는 소고기 뭇국, 육개장, 잡채, 미역국, 김치찌개, 강된장. 여름이면 갓으로 담근 물김치, 깍두기, 동치미, 오이소박이. 그것도 모자라 고등어까지 일일이 다 구워서 보내주곤 했다. 엄마가 보내온 박스를 다시 냉장고에 정리해 넣으며 국에 깨를 못 넣는 것이 얼마나 큰 아쉬움 일지 생각하면서 혼자 웃곤 했다. 그리고 박스 안에 깨처럼 콕 박혀있는 엄마의 쪽지 한 장. 딱지처럼 접어서 꼭 숨겨놓은 편지를 한쪽 다리부터 찬찬히 풀어서 보는 것이 나를 살게 하는 힘이 되곤 했다. 내일은 어떤 걸 먹을까. 그 생각만으로 오늘을 보낼 의미가 생겨났다.
서른한 살이 된 지금 엄마의 요리를 다는 아니지만 조금씩 따라 해 먹는 버릇이 생겼다. 그 덕에 소고기 뭇국에 셔벗 같이 아삭한 무를 먹는 불행한 일은 없어졌지만 깨를 안 써서 그런지 엄마 맛을 따라가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무엇보다 엄마의 편지가 그리운 날이 있다. 급할 땐 전화번호부 맨 뒷장을 찢어서라도 어떤 것부터 먹어야 할지, 물은 얼마나 붓고 끓여야 할지 자세히 적어주던 엄마. 때로 떨어진 깨 하나가 보석처럼 박혀 있던 편지. 그래서 엄마의 음식이 그리워질 때면 깨를 듬뿍 얹어서, 아니 와르르 쏟아 먹어보곤 한다. 다르긴 다르네. 엄마 말대로 훨씬 더 먹음직스러워.
그러면 꼭 엄마가 어디서든 뛰어올 것 같아 현관문을 보게 된다. 캐스터네츠를 손에 쥔 것처럼 찰찰 거리며 쫓아오던 엄마의 발소리. 아닐 걸 알면서도 계속 현관문을 보고 먹게 된다. 분명 엄마다. 엄마 오는 소리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