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걸음의 생존자 #9
내 머릿속에는 방이 하나 있다. 그 방의 공기 상태로 나는 오늘의 컨디션을 가늠한다.
해야 할 일의 윤곽이 선명할 때와 흐릿할 때, 그 차이는 방 안 공기의 매캐함으로 드러난다. 아는 일을 미뤄둘 때는 그저 먼지가 쌓인 정도지만, 감이 잘 오지 않는 일들이 쌓여있을 때면 방 안 공기가 탁해져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신기하게도 이 농도의 차이는 실제 일의 난이도와는 별 상관이 없다. 막상 글로 쏟아내 보면 '아, 그 정도는 아니였구나' 싶은 일들이 대부분이니까.
문제는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것들이다. 정리되지 않은 채로 부유하고 있는 여러 일정들. 마치 방 안에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모습이랄까. 그럴 때면 나는 한여름의 에어컨을 찾듯이 급하게 어딘가에 적기 시작한다. 오늘 한 일들, 해야 할 일들을 생각나는 대로 토해내듯이.
그러면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머릿속 잡다한 생각들이 해리포터의 한 장면처럼 스스로 날아올라 제자리를 찾아간다. 책들이 책장에 꽂히고, 잡동사니들이 정렬되고, 바람이 통하기 시작한다. 머리가 가벼워지면 마음도 따라서 가벼워진다. 마치 방 전체의 공기가 순환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 산듯한 상태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아무리 깨끗한 집이라도 먼지는 쌓이게 마련이고, 내 머릿속 방도 마찬가지다. 불쑥불쑥 솟아나는 새로운 생각들이 다시 창문에 묻어나기 시작하고, 공기는 서서히 텁텁해진다.
방법은 분명 알고 있다. 주기적으로 먼지를 털어내는 것이 가장 쉽고 편안하게 방을 유지하는 비결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있다. 그런데도 나는 늘 한계까지 가서야 청소를 시작한다. 몸도 마음도 실컷 지쳐 쓰러지기 직전에야 '아, 그래, 글을 쓰면 되지' 하고 탈출구를 떠올린다.
참 웃긴 일이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행복의 밀도를 높이며 살고 싶은데, 편안하고 여유롭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조바심을 낸다니. 급한 성질 때문에 여유를 놓치는 아이러니이다.
오늘 밤은 머릿속 방의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로 이 모순을 바라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마 내일도 나는 이 방을 어지럽히고, 다시 정리하기를 반복할 것이다. 마치 매일 아침 이불을 개는 것처럼, 그것이 일상이라는 이름의 리듬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