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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Sep 19. 2018

애플이 저만치 가네, 나홀로 남겨두고서

애플은 이제 나를 봐주지 않아

서기 2018년 9월 12일, 애플이 신제품을 발표했고, 나는 그것을 실시간 중계 영상으로 보았다. 일단 요즘 자는 시간이 늦어지기도 했고, 게다가 애플의 팬, 아니 팬 지망생으로서 이번에는 뭔가 그럴듯한 제품이 나올 거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여기서 말하는 ‘그럴듯한 제품’이라는 것은 대화면에 베젤이 좁아서 휴대성이 높으면서 가격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요컨대 내가 돈을 모으면 살 수도 있겠다 싶은 물건을 말한다. 물론 듀얼 카메라를 지원하면 더 좋고, 이어폰 단자가 돌아오면 더 좋다. 그럴 턱이 있나 싶었지만...... 


어쨌든 좀 기다리니 아이폰 신제품들이 소개되었다. 간단히 요약해서 첫 감상은 ‘뭐야! 벌써 노치를 없앴나!’ 였다. 이것은 착각이었다. 그냥 비겁하게 검은 화면으로 가린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감상은 ‘포기하자’였다. 혹은 ‘저 포도는 실 거야.’ 


흔히 우스갯소리로 말하듯 혁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값 때문이었다. 가장 저렴하게 나온(저렴이라는 단어가 부적절하지만) XR도 749달러부터 시작이면 한국에서는 이래저래 결국 100만원이 될 테니 이번 신제품들은 아예 꿈도 꿀 수 없는 물건들이 된 것이다. 심리적인 저항선을 넘은 것은 물론이고 경제적인 저항선도 한참 넘어가버렸다. 


자주 사용하는 물건일수록 좋은 것을 쓰라는 말이 있다. 나도 그 말을 참 훌륭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따르려 하니 당연히 스마트폰은 좋은 것을 쓰는 게 맞다고 본다. 사실 약정을 하고 2년동안 매달 5만원에서 7만원씩 두드려 맞기로 결정하면 어떤 스마트폰이든 절대 못 쓸 것은 없다. 금싸라기 땅에 지은 아파트 같은 것과는 상황이 달라서, 선택 받은 자들만이 최고의 스마트폰을 누리고 나는 평생 개처럼 일해도 누릴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실낱같은 희망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실낱같은 희망이란 결국 실낱이나 다름없는 것이고, 3만원어치 책 한 번만 사도 이번 달은 뭐 이렇게 빡빡하나 싶은 입장에서는 애플 제품들이 모두 요원한 물건들이 되었다. 작년에 아이폰 X이 강렬한 가격(그리고 노치)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때부터 그런 감이 있긴 했지만, 팀 쿡이 ‘비싸게 해도 잘 팔리니까’ 라며  앞으로도 값을 올릴 거라고 대놓고 말한 것이나 다름 없게 된 시점에서 이제 애플의 최신 제품은 앞으로 나올 것들까지 완벽히 구름 위로 넘어가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완벽히 구름 위라고 말하기는 힘들겠다. 절대 못 살 거야 없다는 점에서 사람을 더 피곤하게 만드는 영역이다. 뭐랄까, 여행지에서 친구가 45000원짜리 식사를 주문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먹고 싶고 못 먹을 거야 없지만 그래도 뒷일을 생각하면 도저히 주문할 수 없는 심정을 느끼게 하는 영역이랄까. 


(아침에 일어나서 맞아도 되는 걸 왜 굳이 실시간으로 두드려 맞았나)


앞서 나를 ‘애플 팬 지망생’이라고 했는데, 스마트폰에 3gs로 입문한 이후로 6s까지 아이폰을 이것저것 많이 써봤고, 태블릿은 아이패드 2로 입문한 뒤 지금 에어2를 쓰고 있으며, 맥북은 두 대째를 쓰고 있으니 나도 그럭저럭 애플 제품을 열렬히 써온 사람이 맞긴 맞다. 그리고 애플이 몇 년 전에 만들어서 무리하지 않고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한 기기만을 쓰면서도 자신은 애플 제품을 주력 기기로 쓴다는, 흔히 말하는 ‘애플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애플부심이 무엇인가? 멋진데 마이너한 물건을 쓰는 허세?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나의 애플부심의 핵심은 애플이 매번 원래 존재하는 기술을 잘 포장해서 시장을 선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내놓을 때마다 그 기술의 편린을 낡은 기기로 향유하면서(낡은 기기 업데이트는 참 잘해준다) 기술의 첨단을 체험하는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맛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야, 이제 이런 게 되네’ 하는 것을 남보다 먼저 체험하고 소개하고 자랑하는, 비유하자면 패키지 여행으로라도 남들보다 선진국에 먼저 갔다와서 어디어디는 뭐가 끝내주더라며 좋았던 곳을 얘기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이튠즈에만 존재하는 완성도 높은 생산성 앱과 매끄럽게 서로 연동되는 애플 기기들의 시스템으로 자신을 관리하는 것에도 살짝 첨단적 근미래인이 된 듯한 기쁨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애플부심의 기저에는 나도 언젠가는 애플에서 소개하는 최고의 신제품으로 최고의 기술을 누구보다 먼저 맛보고 싶다는 소망도 있었다.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만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기기적 신기술-가령 끝내주는 인물 사진 같은 것-도 가장 앞선, 혹은 앞섰다고 생각되는 자리에서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기껏 화성으로 이주했으면 3등 거주구역이 아니라 1등 거주구역에도 살아봐야 하는 것 아니겠어, 하는 심리랄까. 


하지만 작년에 애플이 아이폰 X을 내면서 그런 소망에는 관뚜껑이 덮였고, 이번에 초월적인 가격 정책에 아주 박차를 가하면서 관뚜껑에 못까지 박혔다. 이제 애플을 싫어하지 않으면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면의 깊은 심리가 눈치챈 것인지 이번 발표와 함께 애플에 대한 정도 상당히 떨어져버렸다. 


그리하여 원래 카메라로만 쓸 생각으로 구해둔 화웨이 P9을 메인으로 삼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다른 안드로이드 기기들도 꽤 많이 살펴봤다. 그러면서 새삼 깨달은 것은  애플이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딱히 대단한 기술적/디자인적 우위를 점하고 있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먼 옛날에 나온 G2만 해도 6S보다 디자인이 압도적으로 미래적(화면이 크고 베젤이 좁고)이고, 1년에서 2년쯤 지난 기기들은 그보다 훨씬 더 끝내주는 성능이나 특장점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까 몇 가지만 내려놓으면 어딜 봐도 안드로이드를 쓰는 게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셈이었다. 요는 화성만 끝내주는 줄 알았는데 화성 말고 다른 별도 한참 전에 끝내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나는 지금도 꾸준히 이주 준비를 하는 중이다. 언젠가 내가 떼돈을 벌거나 애플이 미쳐서 아이패드처럼 합리적인 가격의 아이폰을 내놓으면 돌아올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렴한 가격에 괜찮은 카메라를 쓰고 싶은 지금은 이주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다만 오래도록 쓰면서 구축해온 앱과 일상의 시스템을 안드로이드 진영에서 다시 구축하자니 그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아예 비슷한 것조차도 찾을 수 없어서 아이패드에 의지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고향땅을 처음으로 떠나는 듯한 이상한 기분도 발목을 잡는다. 생전 처음 보는 별 이상한 오류들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과연 내가 아이폰을 무사히 떠날 수 있을까?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전보다 더 나은 것을 쓰려는 욕심을 충족시키려면 아이폰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추신

제가 번역한 오카다 신이치의 "기묘건물 100LDK"가 카카오페이지로 선출간되었습니다. (https://page.kakao.com/home?seriesId=51554024). +종이책으로도 나왔습니다.

가벼운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미스터리로 진행되는 듯하지만, 거대 저택과 그곳에 사는 가족들의 이면에 숨겨진 어둠이 차츰 드러나는 이야기입니다. 라이트노벨풍의 섹드립과 헛소리와 전문용어, 심지어 중국어까지 튀어나와서 작업에 진땀을 뺐습니다만...... 가벼운 풋워크로 시작해서 늪으로 걸어들어가는, 그러면서도 반전의 쾌감이 있는 작품입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일한 문학 번역(특히 중간소설과 미스터리, 로맨스 분야) 의뢰를 계속해서 받고 있으니 문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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