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에이전트
“인터스텔라”를 보고 나서 이렇게 훌륭한 영화도 사람에 따라서는 형편없는 영화라고 느낄 수 있구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킹스맨”을 보고 모두가 재미있다고 야단일 때 나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쉬웠다. 인터스텔라 때는 SF가 무슨 사랑 타랑이냐고 별로라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던 반면에, 킹스맨이 별로라는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번에는 내가 극심한 마이너측에 선 셈이다.
모두가 뭔가를 칭송할 때 혼자 투덜대는 것은, 마치 반에서 가장 예쁘고 공부 잘하는 여자아이가 만들어온 쿠키를 나눠 먹고 다들 맛있다고 야단일 때 혼자 맛없다고 하는 것처럼 어렵고 분위기 파악 못하는 짓이 틀림없겠지만, 이런 감상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 같은 게 아니라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까 좀 아쉽다는 소리를 한다고 도덕적으로 비난받지는 않겠지.
(먼저 이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보신 많은 분들께 죄송합니다. B급을 B급 그대로 즐기지 못해서 죄송힙니다.)
아무튼, 킹스맨의 내용은 이렇다(이후 전문 스포일러 포함).
비밀 첩보조직 킹스맨의 채용 과정에서 주인공 에그시의 아버지가 동료들을 구하고 전사한다. 이에 요원 해리는 에그시를 찾아가 메달과 암호를 전하고 나중에 메달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하면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한다. 에그시는 학교도 퇴학당하고 해병대도 때려치운 놈팽이로 자라나 동네 양아치를 골려준다고 차를 훔쳤다가 경찰에 잡히는데, 마침내 메달에 적힌 번호로 연락해서 해리의 도움으로 풀려난다. 마침 과학자 실종 사건을 추적하다 살해당한 란슬롯의 후임을 찾아야 했던 해리는 에그시의 성적, 신체 능력, 그리고 신의가 뛰어나다는 걸 알고 그를 추천하고, 에그시는 온갖 험난한 훈련과 도련님들의 조롱을 견디고 최종 후보가 되지만, 훈련을 시작하면서 받은 개를 죽이는 마지막 관문에서 탈락한다. 한편 란슬롯이 조사하던 사건을 추적하던 해리는 그 뒤에 천재 과학자 발렌타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의 뒤를 캐는데, 발렌타인의 음모는 전세계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료 유심카드를 배포하고 이를 이용해서 핸드폰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만들어 세계 인구를 청소하는 한편으로 자신에게 동조하는 중요 인사들에게는 칩을 심어 직접적인 생사여탈권을 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다 알아내기 전에 함정에 빠진 해리는 교회에서 학살극을 벌인 끝에 발렌타인에게 살해당하고, 에그시는 발렌타인에게 회유당해 자신을 죽이려는 킹스맨의 수장 아서를 슬기롭게 처치한 뒤 정식 요원이 된 동기 록시, 교관 멀린과 함께 발렌타인의 기지로 쳐들어가 음모를 분쇄하고 인류를 구하며 당당한 킹스맨으로 다시 태어난다.
줄거리 자체는 대단히 평이해서 평이하다는 점말고는 특별히 아쉬울 것도 없는데, 각 부분을 뜯어보면 이건 좀 이상하다고 느껴지거나 아쉬웠던 부분이 적지 않았다.
일단 에그시를 비롯하여 젊은 층의 존재 자체가 가장 큰 문제였다. 주인공 에그시가 동네 꼬마에서 비밀 첩보조직의 요원으로 성장하는 구조니까 이건 너무한 소리가 아닌가 싶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댄디하고 멋들어진 영국 신사 요원 해리를 보고 싶었지, 에그시와 그의 철없는 친구들의 훈련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건 “익스펜더블 3”를 보면서도 느낀 아쉬움인데, 여기서도 간판스타들의 노익장은 그리 오래 나오지 않고 첨단 기술로 으스대는 젊은이들이 오래 나와 영 맥이 빠졌던 것이다. 뭐랄까, "바람의 검심"에서 켄신이 빨간기와 손님들을 학살하다 총맞아 죽은 뒤 야히꼬만 줄창 나온다면 느낄 법한, 혹은 “콘스탄틴”에서 콘스탄틴이 민간인에게 총질하다 죽고 채즈가 활약할 때 느낄 법한 기분이었다.
특히 이 별 재미없는 ‘훈련’ 과정이 귀중한 플레이 타임을 잡아먹은 것은 이만저만 아쉬운 게 아니었다. 헐리웃 영화들을 보다보면 이쪽 사람들이 ‘훈련’에 무슨 로망을 갖고 있거나 새로운 집단에서 반드시 이런 일을 겪고 있는게 아닌가 싶을 지경인데, 바로 이런 것들 말이다.
1. 동기 남자들은 대개 껄렁껄렁하고 순식간에 파벌을 만들어 주인공을 조롱하고 괴롭힌다.
2. 주인공은 혈통이나 신분 또는 널리 알려진 운명 따위로 괴롭힘 당한다.
3. 그런 와중에 악수를 청하고 친해지는 여자가 꼭 한 명은 있다.
4. 주인공은 남다른 지혜와 슬기, 신념을 발휘하고 친해진 여자의 도움으로 부당해 보이는 훈련의 역경을 이겨낸다.
5. 교관은 악랄하고 악독해 보이지만 나중에는 큰 조력자가 된다.
킹스맨의 훈련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데다가 제시된 역경들도 어째 어디서 들어봤을법한 것들이라 나는 한 명만 낙하산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고, 개를 줄 때부터 그걸 죽이는 게 최종 관문이 될 거라는 것을 짐작했다. 아니, 이건 어디까지나 내 문제겠지만.
게다가 이 훈련들은 아무리 봐도 그냥 군사훈련이라 ‘첩보’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그나마 흥미로운 첩보적 훈련이 최종 직전 훈련으로 파티장에서 여성을 꼬셔 밤을 보내는 것이었으나… 이건 한창 재미있어지려는 때 충성심 테스트로 바뀌고 말았다. 대체 거기서 정말 열차에 깔려 죽을지도 모른다고 긴장하는 관객이 얼마나 있겠는가?
주인공 에그시를 둘러싼 드라마가 희박해서 그에 몰입하기 힘들다는 것도 대단히 아쉬웠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도 멋진 오비완이 죽고 아나킨이 성장하긴 하지만, 킹스맨의 주인공인 에그시가 자신의 운명이나 능력, 가족, 사랑 같은 문제로 깊이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에그시의 인생을 관통하는 문제로 ‘어머니와 가족을 지키는 것’이 제시되긴 했으나, 그가 정말 그 문제로 고민하는게 맞나 싶기도 했고(정말 고민했다면 훈련하러 간 사이 어머니 걱정을 한 번쯤은 했어야지) 관련된 장면들도 너무 가볍게 지나갔다. 개를 죽이지 못한 장면에서 ‘약자를 희생해서 얻는 힘 따윈 필요 없어’ 같은 에그시의 신념이 드러나고, '약자를 지킨다는 신념을 위해 죽어간 해리의 유지를 이어 요원이 아니더라도 싸우겠다’ 는 식으로 전개 되었다면 나도 에그시의 신념이 킹스맨의 힘을 얻고 정의로 구현되는구나 싶어 그를 역시 주인공이라고 인정했겠지만, “와호장룡"의 소룡이 청명검을 들고 객잔에서 깽판을 친 것처럼 에그시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폼나는 정장을 빼입고 신명나게 분풀이 한 번 해보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었고, 심지어 이 영화의 팔할로 느껴지던 해리는 심신미약 상태이긴 했지만 전력으로 양민을 학살하고 별 후회하는 기색도 없이 사살 당했다.
그래, 해리가 죽었다! 콜린 퍼스가 출연하는 작품과 인연이 없던 나조차 정장을 빼입고 우산을 들고 다니는 영국 신사 해리가 요원으로 활약하는 모습은 반하기 충분했고 이건 선전하던 대로 본드에 필적하는 캐릭터가 나왔구나 싶었는데, 어처구니 없이 죽어버렸다. 심지어 민간인을 아주 멋들어지게 학살하고 살해당했다. 아무리 죽어 마땅한 집단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학살해서, 나는 이들이 사실은 발렌타인의 악랄한 하수인들이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다. "다이하드 3"에서 맥클레인이 경찰로 위장한 악당들과 엘리베이터에 탔다가 우연히 동료 뱃지의 번호를 기억해내고 난투극을 벌여 간신히 살아남았던, 그런 장면인가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어처구니 없이 살해당하는 장면도 멀리서 잡혔길래 시시오 마코토처럼 ‘사실은 킹스맨의 비밀 방어구를 써서 치명상을 피했지’ 하고 등장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크레딧이 끝나고도 해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그 황망함이란. 액션과 동떨어진 필모를 밟아온 콜린 퍼스는(캐스팅된 이유도 액션과 동떨어졌기 때문이라던가) 킹스맨을 위해 6개월동안 훈련을 했고, 스턴트의 80%를 직접 소화했으며, 그 결과 교회 학살 씬은 원테이크에 끝냈다고 한다. 이건 정말 칭송해 마땅한 업적이고, 교회 학살 씬도 기가 막히게 멋들어지고 신나게 잘 뽑힌 액션 씬이긴 했으나, 그렇게 만들어진 장면이 영화의 내용상 별로 중요하지 않은 데다가 상식적으로 정의라고 할만한 영역의 정 반대에 있었다는 것은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어벤저스”에서 호크아이 최고의 활약이 '아군 항공모함 대파’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는데, 해리는 그것보다 더했다. 게다가 스타일리쉬한 학살 이후로 명예 회복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주인공의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고, 사실상 아버지에 가깝게 설정된 인물에 대한 취급 치고는 너무한 게 아닌가? 학살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죽어가면서 에그시에게 “미안하다 에그시, 킹스맨에 가면 양복이 다 됐을 거다” 같은 말 한 마디라도 남겼으면 그나마 수습이 되지 않았을까. 속편에서 다시 나올 예정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말도 안 되게 한심하고 황당한 비명횡사였다.
솔직히 말해서 해리가 죽은 뒤로는 어찌되든 상관 없다 싶을 정도로 영화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는데, 악당 발렌타인의 악행이 너무 재미없었던 탓도 있었다. 유심칩을 배포해서 사람들을 조종한다는 것까지는 참신한 생각이었지만, 그런 짓을 하는 이유라는 게 고작 지구의 바이러스적인 존재인 인류를 청소한다는 것이라 자신의 신념이나 이득을 위해 행동하는 것으로 볼 수 없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주요 인사의 생사 여탈권을 쥔다는 엄청난 이득이 생기긴 했지만 그것은 전혀 조명되지 않았고, 킹스맨 수장 아서의 배신이라는 사건으로 지구 청소만이 부각된 것이다. 인류의 몇 퍼센트가 죽고 그 부를 우리끼리 나눠 갖겠다는 것도 아니고, 인류의 수뇌부를 모두 내가 조종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아니, 왜 이렇게 욕심이 없는 거야? 첨단 IT스러운 느낌을 살리려면 전세계 사람들의 사생활 데이터를 수집해서 다른 음모를 꾸밀 수도 있었을 거고, 뻔한 포맷으로 갈 작정이었으면 그냥 '미치광이 과학자 발렌타인이 지구를 정복하려 해, 도와줘 킹스맨!’ 이 훨씬 이해하기 쉬웠을 것 같다. 요는 발렌타인이 악행을 해야만 했던 맥락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정말 지구 청소를 목적으로 설정한 거라면 발렌타인이 어릴 때 가난했는데 인구가 많아서 배식을 받지 못해 가족이 모두 죽었다든가, 아니면 단순히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천재 사이코패스라든가 하는, 빌런으로서의 배경이 있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동안 여러 대작에서 지혜로운 인물로 등장한 데다 하필 첩보물 주인공이었던 아서(마이클 케인)는 어쩌다 그렇게 간단히 넘어간 건지 알기 쉬운 복선이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다른 소품에서는 전반 배치 후반 회수를 잘 지키고 있으면서 어째서 이렇게 중요한 부분은 그냥 넘어간 걸까(혹은 편집한 걸까)?
그리고 전체적으로 영화 내에 위기라고 할만한 부분이 거의 없어서 긴장감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도 아쉬웠다. 나는 해리가 신분을 위조하고 직접 발렌타인의 파티에 찾아간다기에 첩보물의 꽃이라 할 만한 파티장 첩보, 심리전을 기대했다. 세계의 주요 인사들이 모인 파티장에서 해리가 멋지게 인사하고 파티를 즐기는 척 하면서 집안 곳곳을 뒤지고 자료를 수집하고, 그러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나타난 발렌타인에게 시치미 뚝 떼며 ‘집이 참 멋지군요’ 하고 인사한 뒤에 서로의 정체를 드러낼 듯 드러내지 않으며 ‘벌레는 모두 죽이는 게 인지상정이죠’ ‘하하, 하지만 무엇이 벌레인지 규정하는 건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같은 대사를 주고받은 뒤 유유히 빠져 나오는, 그런 장면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대는 배반 당했고, 발렌타인은 이것이 이 영화의 본질이라는 것처럼 손님 없는 식당에서 햄버거를 대접하고 관객조차 그 정체를 알면 안 된다는 듯이 형체없는 도청기를 먹인다. 해리는 돌아가면서 해피밀 고맙다고 재치있는 대사를 날리지만 이건 기대한 바가 아니었고, 이후로 해리는 멋진 일을 죽은 란슬롯만큼도 하지 않는다.
영화의 클라이막스 부분인 기지 내 전투와 록시의 대작전도 뭔가 중요한 게 빠진 것처럼 보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록시가 풍선을 타고 성층권 위까지 올라가서 위성을 파괴하고 에그시가 정보를 탈취한다는 당초 목적에서 발렌타인까지 잡아 죽인다는 것으로 목적이 바뀌는 전개는 좋았지만, 록시의 활약은 어째 외부의 방해도 없는데 혼자 비명 지르며 위성을 간신히 쏘아 맞추는 것으로 그려져 별로 멋지다고 할 수 없었고, 정식 요원인데 그 취급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한편 에그시의 활약에는 나름대로 작은 첩보와 전투가 끼어 볼만했으나, 공주의 감옥 앞에서 포위되는 위기 상황이 문제였다. 나는 거기서 해리가 돌아와 ‘뭘 꾸물거리고 있나, 에그시. 내가 그렇게 가르쳤나?’라고 하거나, 위성 파괴 임무를 마친 록시가 돌아와 에그시가 ‘록시!’하고 부르면 ‘록시가 아니라 란슬롯이야’라고 핀잔을 준 뒤에 손을 잡고 넘어진 에그시를 일으켜 줄 줄 알았다. 적어도 나는 그게 앞뒤가 잘 맞고 신나는 구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위기 상황에서 에그시는 뜬금없이 뒷목의 칩을 폭파할 수 있다는 걸 떠올리고, 그렇게 한다. 이건 상당히 황당한 전개였고, 때문에 거기서 이어지는 레밍즈식 불꽃놀이 씬은 마냥 즐겁게 볼수 없었다. 흔히 말하듯 ‘약빤’ 센스고 재미있는 장면이기도 했지만, 충분한 맥락이 구성되지 않은 서비스는 반갑기는 커녕 ‘이런 장면을 집어 넣으면 어찌되었든 좋아하겠지’ 하는 노림수로 보여 기분이 묘했다. 심지어 그 장면 후에 공주는 참사를 보고 미쳐버린 건지 에그시에게 임무 완수 후의 보상으로 애널 섹스를 제안하는데, 공주 이외의 어떤 캐릭터가 제안해도 이것보다는 말이 될 것 같다.
잠깐 딴 얘기로 넘어가서, 의도된 것도 아니고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여성에 대한 취급이 너무 끔찍하다. 발렌타인의 부하 가젤은 알수 없는 이유로 발렌타인을 따르며 아름답고 날렵하게 사람들을 죽여대는 장애인이고, 록시는 자기가 키운 개를 쏘아 죽이는 냉혈한에 왜 나왔나 싶을 정도로 뚜렷한 활약을 하지 않으며, 남편을 잃고 건달과 결혼하여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자식들만을 바라보고 사는 에그시의 어머니는 조종당해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처럼 열성적으로 문을 부숴 애를 죽이려고 하고, 발렌타인의 제안을 거절한 상식인인줄 알았던 공주는 처음보는 남자와 애널섹스를 한다. 가젤은 원작에서 남자였으니까 이건 우연이 틀림없지만 그래도 너무 비참한 우연이다.
아무튼, 그리하여 벌어진 가젤과의 최종 결전도 앞서 나왔던 킹스맨의 비밀 무기를 활용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었지만, 기대만큼 화려하거나 통쾌하진 못했다. 특히 에그시의 발차기가 어디서 어떻게 신묘하게 들어간 건지 잘 알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거기서 이어진 발렌타인의 최후 역시 맥이 빠질 지경이었다. 비밀병기로 반격하는 것도 아니고,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유일한 심복이 죽든 말든 컴퓨터만 보고 있다가 공격 당해 자기 피를 보고 토하면서 죽다니, 자기는 피만 보면 토한다는 말을 회수했다는 점은 재미나지만 악당의 최후 치고는 좀 심심하다. 가젤의 의족을 평소에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가젤도 그를 따랐고, 최후에는 가젤의 의족에 찔려 죽는 운명이었다고 치면 꽤 씁쓸한 분위기가 나서 좋겠지만, 이미 이 영화는 애초에 앞뒤없이 웃고 즐기는 물건이 었으니 그런 건 끼어들 겨를이 없다. 죽어가는 발렌타인과 에그시는 이건 영화가 아니라는 소리를 하는데, 그건 마치 이건 네가 기대한 그런 영화가 아니라는 말처럼 들렸다. 껍데기만 보고 별걸 다 기대한 내게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요는 킹스맨이 '멋들어진 첩보물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실상은 약빤 액션물’이라 기대와 달라서 실망스러웠다는 것인데, 사실 그렇게 실망만 하기에는 꽤 재미가 있었다. 정장을 맞춰 입고 우산을 들고 다니는 고전적 영국 중년 신사가 사실은 비밀 첩보조직의 요원이라 기똥차게 잘 싸우며 최첨단 비밀병기들을 사용한다니, 이 설정만으로 얼마나 가슴이 뛰는가! 매너를 외치며 싸우는 정장의 중년 신사란, 멘토도 웃음거리가 되고 노인, 아줌마, 아저씨, 복학생, 권력자 모두 노매너와 부도덕의 아이콘이 된 이 사회에서 존경하고 친근하게 여길만한 캐릭터임이 틀림없는데, 나로서는 그런 캐릭터였던 해리가 죽어버린 것을 비롯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마음에 드는 부분에 비해 많았던 것 같다. 나는 신사 요원 란슬롯이 몇 년산 술 타령을 하며 활약하던 '댄디 중년 스타일리쉬 액션 첩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지길 바랐던 것이다. 캐릭터와 아이템이 워낙 좋으니, 갤러해드(해리)와 란슬롯이 활약하는 스핀오프작이 나와주지 않으려나?
(2015.03.12.)
-후기
일 년이 지난 뒤라 속편 얘기가 좀 들립니다만, 속편에서도 해리는 등장하지 않을 거란 얘기가 있더군요. 이렇게 죽은 캐릭터는 위기 상황에서 등장하거나 속편에서 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싶은데, 뭐 원체 이 작품의 정체성이 클리셰를 두들겨 부수고 아무거나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나중에 안 것이지만, 해리가 초반에 두들겨 패서 비밀을 불게 만드려는 찰나에 머리가 터져 죽는 사람이 마크 해밀튼, 즉 루크 스카이워커였더군요.
(2016.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