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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y 04. 2022

고독한 소년과 소녀가 나오는 이야기에 끌린다 1

고독한 소년이나 소녀들이 나오는 이야기에 이상할 정도로 끌리는 편이다. 그런 작품 중에 가장 먼저 매료된 것은 아마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아닐까 싶다. 이미 너무나 잘 알려져있다시피 에반게리온의 주인공 신지는 정말이지 지독하게 외로운 소년이다. 정체 불명의 거대 괴수 ‘사도’를 막는 기관인 네르프의 수장인 아버지는 오래도록 신지를 버려뒀다가 아주 오랜만에 부르는데, 불러서 한다는 소리가 로봇을 타고 사도와 싸우라는 것이다. 외제차를 주차하라고 해도 겁날 판국에 로봇을 타고 싸우라니 이게 말인가 방구인가……. 아무튼 철저하게 고립된 소년이 아버지에게 인정받고자 무리한 싸움을 해나가고, 그러다가 또래의 파일럿들과 조금씩 친해지고, 모든 게 나아지는 듯하다가 기독교적 메타포 대잔치에 싸이코 드라마가 버무려져 천지가 다 박살이 난다는 얘기가 바로 에반게리온이다.


에반게리온은 큰 틀이 고전적인 특촬물에서 온 것 답게 로봇이 멋지고 기독교적 메타포가 자꾸 의미심장한 느낌을 줘서 어릴 때 크게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보니 신지를 비롯해서 모든 캐릭터의 처절한 고독감에 이입하게 되었다. 거의 모두가 사지에서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인정받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서툰 관계에 휘청인다. 보고 있자면 쓰라리기 짝이 없는데, 그래도 주인공인 신지가 또래 친구들과 투닥거리며 고치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 관계고, 타인이 두려워도 부딪히고 깨지면서 거리를 익히는 법이라는 얘기가 에반게리온의 큰 주제라면 주제겠다. 사실 그냥 그렇게 넘기기에는 사람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을 정도의 처참한 사건이 너무나 자주 일어나긴 하지만…….


(혼자만의 힘으로는 고독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그로부터 한참 지나서 눈에 들어온 작품은 우미노 치카의 만화 ‘3월의 라이온’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키리야마 레이는 일본 장기의 신동이라고 할 만한 소년이지만, 어린 시절에 일가족을 사고로 잃은 뒤 아버지의 친구의 양자가 되었고, 그 집안 자식들에게 뻐꾸기 취급을 당하다 못해 독립했다는 아픈 과거가 있다. 친아버지도 의붓아버지도 장기에 큰 뜻을 둔 사람이라 레이도 인정받으려고, 생존을 위해 장기를 공부했는데, 그 결과 편애를 받는 꼴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친구 하나 없는 학교 생활과 장기 기사들 틈바구니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아슬아슬해 보일 정도로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강 건너에 사는 떡집 삼자매와 알고 지내게 되는데, 이 사람들은 또 난봉꾼 아버지 때문에 똘똘 뭉쳐 살게 된 사람들이라 레이를 먹이고 챙기기를 서슴지 않는다. 당연히 어색하게 여기고 슬슬 피하려던 레이는 차츰 이들과 가까워지고, 종래에는 이 가족에게 찾아오는 온갖 재난까지 막아주는 가족 이상의 존재가 된다.


3월의 라이온도 1권부터 보자면 메마른 생활에서 보이는 고독감이 처절하다. 원래 가족은 모두 죽었고, 살기 위해 택한 새 가족에게는 없는 게 나았을 존재가 되었다. 학교엔 친구가 없고, 어른의 세계인 장기의 세계에서 직업인으로 싸우자면 반상에서든 그 외에서든 전쟁을 치러야 한다. 주목받기도 하고 경제적으로도 모자라지 않지만 부담은 끔찍스럽고, 독감에 걸려도 연락할 사람 하나 없을 정도로 고립되어 있다. 에반게리온은 괴물이 쳐들어와서 정말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극적인 설정 때문에 현실감이 덜하지만, 3월의 라이온은 그야말로 현실 세계의 이야기라 사회적 인간으로서 살 방법을 찾지 못하는 소년의 막막함이 싸늘하다.


나는 3월의 라이온에선 ‘죽을 힘으로 헤엄쳐서 겨우 무인도에 도착했는데 또 다음 섬으로 가야 한다’라는 초반의 대목을 가장 좋아한다. 천재로 여겨지지만 말 그대로 생존을 걸고 싸워야 했고, 그 이후로도 벽에 부딪히고 탈진해서 괴로워하는 레이의 모습을 보자면 내게도 존재하는 막막함과 고립감이 조금이나마 희석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레이도 삼자매를 만나 친해지고 그들을 도우면서 남을 지킬 수 있는 굳건한 사람이 되어가는데…… 에반게리온의 신지를 볼 때와는 달리 3월의 라이온의 레이가 성장하는 모습에선 어쩐지 점점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갖게 된 용기와 문제의 해결 방법들이 어째 좀 현실 인간보다는 만화 캐릭터에 가까워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타인을 구함으로써 자신도 구하게 된다는 교훈이 3월의 라이온에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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