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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y 12. 2022

고독한 소년과 소녀가 나오는 이야기에 끌린다 2

최근에는 쓸쓸한 소녀가 나오는 ‘슈퍼 커브’를 애니메이션으로 봤는데, 실생활에 가깝기로는 이게 제일이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코구마는 여고생으로, 설명은 나오지 않지만 가족도 가까운 친척도 친한 이웃사람도 없는지, 혼자서 작은 연립주택에서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며 매일 자전거로 학교에 다니고 있다. 밥은 레토르트로 처리하고, 학교에도 친구는 없다. 따돌림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조용히 학교와 집을 왕복할 뿐인 생활이다. 생기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보기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생활이었다.


그런데 그런 코구마가 힘들게 하교하던 어느날, 시원하게 달려가는 오토바이를 보고 좋아보였던지 근처의 오토바이 취급점에 가본다. 물론 학생이 도저히 지불할 수 없는 가격이다. 그런데 포기하고 돌아서려니 주인장은 아주 싼 중고가 있다고 슈퍼커브(한국에서 배달에 흔히 쓰는 오토바이와 유사) 하나를 꺼내준다. 이유를 물으니 주인을 세 명이나 죽인 사고 물건이라고. 하지만 코구마는 상관없다고 구입한다. 그 반응은 미신을 믿지 않는다기보다는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 정도로 메마른 삶이었다.


그러나 중고 슈퍼커브를 사서 길들이고 정비하고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고, 행동 반경을 넓혀가면서 코구마의 생활에는 조금씩 색채가 돌아온다. 학교간의 사환 같은 아르바이트도 하고, 이상할 정도로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반 친구와도 친해진다. 전반적으로 잔잔해서 엄청난 역경을 극복하고 전국 바이크 대회에서 우승을 한다는 식의 드라마틱한 얘기가 펼쳐지는 것은 아니지만, 중고 바이크 하나를 구입함으로써 우울과 죽음의 문턱에 있는 것처럼 보이던 학생이 조용히 생동감 넘치는 세계로 나아가는 모습은 사소한 변화가 만들어내는 삶의 기적이 얼마나 대단한가 느끼게 해준다. 직접 손을 더럽혀가며 관리한 오토바이로 학교를 가고, 편의점을 가고, 일을 하고, 여행까지 간다. 정신 건강을 위한 공익 광고처럼 느껴지는 구석도 없진 않지만, 건강한 취미가 만들어내는 삶의 상승 곡선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다.


이런 종류의 ‘고독한 소년이나 소녀가 나오는’ 작품 중에서 소설로는 두 작품이 떠오른다.

그중에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너무 유명하니 생략하고, 곽재식 작가의 ‘로봇 살 돈 모으기’ 얘기를 하자. 이 작품은 “지상 최대의 내기”에 실린 단편인데,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소년 경진이 주인공이다. 경진은 먼 옛날 드라마인 ‘수사반장’ 보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감사가 나와 애들에게 줄곧 TV나 보여주는 것은 교육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시청을 막고, 경진은 결과적으로 돈을 모아 독립하기로 결심한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된 근미래 사회에선 적절한 기능과 자격을 갖춘 로봇을 갖게 되면 로봇을 보호자로 삼은 독립 가구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경진은 보육원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 로봇 살 돈을 모으는데…… 경진은 과연 독립해서 수사반장을 볼 수 있을까요?


‘로봇 살 돈 모으기’가 다른 작품들과 특별히 다른 점은 가만 보면 주인공이 별로 고독하지 않다는 부분이다. 따지고 보면 고독과 반대되는 집단 생활을 하고 있고, 심각한 결핍을 안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이유는 취향을 충족할 자유를 얻겠다는, 다소 소박한 것이다. 그럼에도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주인공을 절실하게 응원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보육원이 선의를 가졌으면서도 구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부조리를 안은 곳이고, 방송 시청이라는 사소한 문제로 대표되는 자유로운 삶에 대한 갈망은 결코 사소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보육원의 부조리에는 고독해질 수 없는 고통과 집단의 몰이해로 인한 고립이, 자유로운 삶에는 원할 때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고독과 보호자의 이해가 숨겨져 있다.


(다른 인간과 함께 있다고 고독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혼자 있다고 고독한 것도 아니다)


무슨 이상한 불행 자랑처럼 보이지 않으면 좋겠는데, 나 역시 남들처럼 오랫동안 고독을 느끼며 지냈고, 지금도 그렇게 지내고 있다. 대체로 그것을 편하게 여기긴 하지만 가끔은 텅빈 콘크리트 건물 지하에 갇힌 것처럼 고립감을 느끼기도 한다. 근처에 몇 명이 있든 상관없이 그 고립감은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 나와 비슷한 사람이 없으며, 어떤 외침도 지하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도둑처럼 찾아오는데, 그건 정말이지 고통스럽고 비참하며 부조리하고 탈진되는 감각이다. 인간은 그런 감각 속에서 오래 살 수 없다. 그런데 그런 감각의 편린들을 고작 열 살인 경진의 심리에서도 엿보게 된다. 작가가 묘사하지 않은 부분까지 마음대로 읽어내고 나의 경험에 비추어보게 되는 탓이다.


작년에 내게는 심리적으로 아주 힘든 시기가 찾아왔었다. 그러던 여러 날 중 하루는 이 소설을 다시 꺼내보고 지하철에서 눈물을 훔치며 울었다. 아마도 (사실이든 아니든) 절망적인 고립감이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이야기를 읽는 이유 중 하나이리라. 알든 말든 내 인생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가 상관 없지 않게 되는 순간이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주곤 한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식으로 고독한 소년과 소녀 이야기에 끌리거나 그런 이야기가 내미는 손을 잡고 일어나는 일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평범한 인간으로서든 창작자로서든 이런 식으로 타인에게 손을 내밀어준 경험이 없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한결같이 꾸준히 쓸모없는 짓으로 귀중한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도 들고. 내가 의심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좋은 작품을 소개하는 것 정도가 아닐까? 그리하여 이 글을 남기니, 마음이 가는 작품이 있으시거든 한번 살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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