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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Nov 16. 2022

주류가 아닌 입장 생각하기



남의 입장, 남의 관점으로 생각해본다는 게 바람직한 일이라는 건 누구도 부정하지 않겠지만, 실제로는 도통 쉽지 않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사람이라는 게 당연하게도 자기 입장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게 기본이고,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경우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조차 할 수 없게 되어 먹었으니 자꾸 노력해서 습관을 들이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잘난 척을 하는 나도 그런 습관이 들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라, 올 여름에는 참으로 한심하고 실례되는 짓을 저지른 적이 있다. 슬슬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가 가입한 커뮤니티에 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분의 글이 올라왔다. 이에 나는 공공기관의 지원을 받을 방법과 자기 심리를 살펴보기에 좋은 책을 소개하는 답글을 둘이나 달고 남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뿌듯해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당히 건조한 반응이 돌아오는 게 아닌가. 그래서 뭔가 내가 너무 나댔거나 실수한 부분이 있나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뿔싸, 내가 소개한 기관 중 하나는 서울시 산하기관이라 서울 시민만 이용할 수 있었다. 그분이 서울 시민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따위 소리를 했으니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다 싶었다. 서울 한 지역에만 너무 오래 산 사람은 한국과 서울을 혼동해서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더니 내가 바로 그랬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남보다 더 타인의 관점을 고려할 줄 알아야 할 텐데…….


그러나 그런 실수를 저지르는 자라도 남의 잘못에는 아주 날카롭고 예민해지는 것이 또 사람의 신기한 부분인데, 나는 전후세대인 부모님과 함께 지내며 이런저런 기기를 다룰 때 마다 인터페이스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도 딱히 다양한 사용자를 잘 고려하는 재주나 자세가 충분치는 않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가장 최근에 나로 하여금 이를 갈게 만든 것은 셋톱박스다. 우리집은 S모 통신사의 서비스를 할인 때문에 마지못해 이용하고 있는데, 이 물건의 사용법은 정말이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특히 어떤 방송의 재방송이 언제 어디서 하는지 찾아야 할 때 검색창으로 들어가 검색하면 몇회의 방송분이 언제 어디서 재방송으로 나온다고 알려줄 것 같은 결과가 뜨긴 하지만, 기껏 들어가보면 그냥 VOD 판매창에 불과하다. 당장 방송중이 아니라면 무료로 기다려서 볼 방법 따위는 알려주지 않는다. 하기야 사람을 안달나게 해서 콘텐츠를 파는 것도 큰 장사일 테니 그런 정보를 알기 쉽게 보여줄 턱이 없다. 그래서 결과적으론 편성표를 열어서 십수 페이지를 뒤적이게 될 때가 많은데, 방송 시간은 그냥 인터넷에 검색하는 게 제일 나은 모양이다. 콘텐츠 판매도 중요하니까 뭐, 어쩔 수 없지……하고 이해하려하다가도 지금 이 서비스를 공짜로 쓰고 있는 것도 아닌데 검색창이 이 꼴이라는 걸 떠올리면 화가 치밀어오른다.


스마트폰의 기본 설치 앱의 경우는 셋톱박스 같은 저주받은 망자의 함과 달리 비교적 양호한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소소하게 불편할 때가 없지 않다. 가령 갤럭시 시리즈의 갤러리 앱의 경우 사진을 보정하고 싶을 때 연필 모양 아이콘을 누르는 것까지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그 뒤부터는 뭘 눌러야 어떤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지 짐작이 쉽지 않다. ㄱ, ㄴ 모양의 두 모서리가 교차된 모양은 사진 크기를 조절할 때 그런 모양을 움직이니까 겨우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삼원색을 표현한 듯 원 세개가 모여 있긴 한데 교차되는 부분이 투명하지 않아 공이 튕겨 날아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아이콘이 ‘필터’라는 건 상당히 모호하다. 무엇을 그린 걸까? 다음으로 태양 모양은 밝기 조절이 아닐까 하는 추측으로 이어질 수 있긴 하나, 거기서 색조와 채도, 선명도 따위도 조절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기는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나와 있는 스마일 아이콘은 이중에서 가장 난해하다. 그림에 펜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형광펜 따위를 쓸 수 있는 메뉴라 상당히 자주 쓸 메뉴인데, 스마일 아이콘과 그림을 꾸미는 행위가 도통 매치되지 않는다. 요즘은 사진에 스티커를 붙이는 게 펜으로 줄을 치는 것보다 더 흔히 있는 일이라 그런 걸까? 그렇다면 왜 스마일 아이콘을 눌렀을 때의 첫번째 하위 메뉴가 스티커가 아니라 ‘그리기’일까? 분명 심오한 이유가 딸린 기획을 통과하여 정해진 사항들이겠지만 나로서는 상당히 이해하기 어렵고,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에게 이해시킬 자신도 없다.


그런데 이 아이콘들을 1초 이상 누르고 있으면 아이콘 밑에 기능의 명칭이 뜨는 것을 아셨는지? 나도 어머니께 스타일러스 사용법을 가르쳐드리다 커서가 잠깐 올라가 있으면 명칭이 뜨는 것을 보고 처음 알았다.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인터페이스는 데스크탑에서나 볼 수 있고 스마트폰 앱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데 놀라운 일이다(모바일 포토샵도 이런 식이더라). 나름대로 친절한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아서 마음이 약간 놓이긴 하나, 애초에 아이콘 밑에 설명을 작게라도 적어뒀다면 이런 비밀스러운 친절이 필요 없지 않았을까? 이와 비슷한 문제를 안은 앱들이 적지 않은 편인데, 굴지의 대기업인 네이버에서 만든 영상 편집앱인 ‘프리즘’ 역시 편집을 하려고 들어가 보면 설명 없는 아이콘 천지라 익숙해지기가 도무지 쉽지 않다. 사진 보정의 대명사로 쓰이는 포토샵도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같은 제작사인 어도비의 라이트룸은 아이콘 밑에 이름이 달려 있으니,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구분을 한 것인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한편, iOS는 안드로이드와 달리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자랑으로 삼았던 만큼 지금도 짚이는 대로 쓰면 될 거라는 이미지가 좀 있긴 하지만, 실제로 뭘 좀 해보려면 직관적이지 않은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위에서 갤러리 앱을 예로 들었으니 이것도 사진 앱을 보자면, 여러 사진을 선택해서 삭제하거나 앨범을 변경하고 싶을 때 ‘습관’대로 사진 하나를 2초 이상 누르고 있어도 하위 메뉴가 뜰 뿐 여러 항목을 선택하게 해주는 상태로 변경되진 않는다. 우측 상단의 ‘선택’ 버튼을 눌러야 한다. 대단히 많은 앱에서 공통으로 쓰는 방식과 다른 노선을 택한 셈인데, 홈화면이나 ‘파일’같은 애플의 다른 앱을 봐도 2초 이상 클릭하면 하위 메뉴가 뜨지 다중 선택을 바로 지원하지는 않는 것을 보면 애플은 아마도 이 방식을 표준으로 삼은 듯하다. 따라서 애플 내에서도 기준이 제멋대로라는 식으로 비난할 수는 없긴 하지만, 다른 앱에선 너무나 당연하게 쓰는 방법이라 애플의 앱에서 2초 눌렀다가 이게 아니지, 하고 취소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선택’ 버튼을 따로 만들어 배치해두는 게 직관적일까, 아니면 흔히 통용되는 방식을 따라서 2초 이상 누르면 여럿을 고를 수 있게 하는 게 직관적일까? 계산기나 리모컨을 모티브로 ‘거기 있는 버튼’을 누르도록 홈화면을 만들었다는 잡스의 디자인 논리를 따르자면 선택 버튼이 보이는 게 원칙에 맞게 직관적인 것 같고, 스마트 기기가 대중에게 제법 익숙해졌으니 주류의 맥락대로 하는 게 누구나 어색함 없이 쓸 수 있어 직관적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나로서는 양쪽 다 채용해줬으면 하는 심정이지만, 다른 앱 제작사라면 모를까 애플 만큼은 발빠르게 무슨 개선을 하리라 기대하기가 어려운 편이다. 사용자가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애플의 독자 노선은 옳든 그르든 이런 식이라, 나는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은 이상 애플 기기를 스마트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잘 권하지 않는다.


인터페이스 문제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방식을 채용했지만 기존 방식이 익숙한 사람들을 위해 양쪽 방식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미술관에 가서도 종종 한다. 예전에는 도슨트 프로그램을 들으려면 기기를 미술관에서 빌려야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게 제휴된 음원 제공 앱을 스마트폰에 받아서 알아서 듣는 방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간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사람은 곤란하고, 데이터 제공량을 소진해버린 사람은 약간 짜증이 나며, 배터리가 다떨어진 사람, 이어폰이 없는 사람은 억울해진다.


그리고 스마트폰은 갖고 있지만 이용이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앱 다운로드, 서비스 가입, 음원 재생앱 사용이라는 장벽을 모두 넘어야 하는데, 내가 그런 사람 입장이라도 잘 할 자신이 없고, 그런 사람을 에스코트할 입장이 된다 생각하더라도 요리조리 잘 쓰게 설명할 자신 역시 생기지 않는다. 게다가 도슨트 음원이 네트워크에 올라가 있는 이상 접속까지 몇 단계나 거쳐야 하는 서비스가 항상 정상 작동할 거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도슨트 좀 못 듣는다고 대단한 문제인가 싶기도 하지만, 전시회를 보려고 멀리서 세 시간씩 이동한 사람, 혹은 전시 마지막날 방문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면 전시장이 해결해야 할 서비스를 완전히 위탁해버리는 게 꼭 옳은가 싶기도 하다.


비슷하지만 더 심각한 사례로, 스마트폰에서 DMB에 이어라디오까지 사라졌다는 문제도 있다. 유튜브와 OTT가 넘쳐나는데 화질도 나쁜 DMB나 라디오는 누가 보나요?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한국의 통신망이 작은 사건 하나로 완전히 엉망진창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수차례에 걸쳐 증명된 데다  재난 대처마저 형편없기 짝이 없다는 사실까지 여실히 드러난 마당에 스마트폰처럼 복잡한 장비를 이용한 통신이 ‘당연히 언제나 되는 것’이라는 상정 하에 사회 전체가 돌아가선 안된다. 누구든 여차하면 DMB나 라디오를 켜고 속보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게다가 ‘누구나’ 데이터가 넘쳐나는 요금제를 쓰거나 집안에 설치된 공유기를 통해 무선 통신을 공기처럼 누리고 OTT로 영상을 감상한다는 생각은 엄청나게 심각한 착각이다. 재정 상황 때문이든 기술이 익숙하지 않아서든 최신 기술을 쓰지 않는 사람들은 항상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 부분을 고려하지 않고 낡고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구기대의 기술이나 채널을 없애버리는 건 연탄을 쓰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생산을 완전히 중단해버리거나 값을 올리는 만행이나 다름없다.

라디오를 처분할 용기 같은 건 내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그건 소화기나 완강기를 버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런 일이 2019년에 이미 일어나서 ‘플래그십’ 스마트폰에 아무 유선 이어폰을 꽂고 라디오를 청취할 수는 없게 되었다. 3.5파이 이어폰 단자를 없애버리고 라디오 수신기를 번들 이어폰에 내장하는가 싶더니 이제 이어폰도 동봉해주지 않고 3만원대에 따로 팔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불평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만큼 이를 대대적으로 문제시하는 기관이나 기사도 딱히 보이지 않는다. 지하철 화재 사건 이후로 피처폰에 플래시가 들어간 것을 생각해보면 또 무슨 재난이 닥쳐야 논의가 될 텐데, 정말이지 문제가 그런 식으로 해결되는 건 이제 사양하고 싶다.


얘기가 제법 엉뚱한 곳으로 굴러왔는데, 사람이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모습만을 표준으로 설정하게 되듯이, 사회가 이리저리 발전하다 보면 어떤 기술을 향유하는 표준적인 집단의 모습을 적당히 설정하고 그 밖에 있는 사람들에겐 아무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훌쩍 달려가버리기 쉬운 것 같다. 부모님이 쓸 스마트 기기를 설정할 때, 셋톱박스와 씨름할 때, 미술관의 작품 옆 설명이 작아서 보이지 않을 때, 완전히 영어 단어로만 이루어진 영화 제목이나 간판을 볼 때, 사용법이 제각각인 키오스크를 쓸 때, 신세대 유행어가 남발되는 자막을 볼 때 등등 많은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한다. 나도 흐름에서 뒤처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별다줄유대(별걸 다 줄이는 유행어에 대하여)’라는 잡문을 쓰거나 ‘AR글래스를 쓰면 어지러운데 종이 팸플릿은 없나요?’라고 미술관에서 소란을 피우는 날도 머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영 기분이 좋지 않다.





추신


제가 필진으로 참여한 에세이집 “한때 우리의 전부였던”이 판매중입니다. 90년대~2000년대 초반, 스마트폰 등장 이전의 기기들에 대한 추억을 다룬 에세이를 모은 책입니다.

짧은 호흡으로 읽기 좋은 책으로 올해 읽은 책 권수를 늘려봅시다!

http://aladin.kr/p/mzJ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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