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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Dec 07. 2022

패딩을 사고 파는 장인 정신

중고 거래 외길 20년의 노하우가 빛을 발하다



2022년 올해의 가을은 이상할 정도로 긴 느낌이 들었다. 한 해 전체는 무슨 사기를 당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는데 그에 비해 가을은 길었다. 이상한 해다.


아무튼 이런저런 옷을 갖추어 입기엔 가을만한 계절이 없다. 봄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나는 가을이 낫다고 느낀다. 심오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단순히 가을엔 혹시나 해서 더 챙긴 옷을 ‘가져오길 잘 했군’ 하며 입을 때가 많고, 봄에는 ‘역시 괜히 챙겼어’하고 가방에 넣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봄은 여름이 다가오며 여벌 옷의 효용성이 점점 떨어지는 데에 비해 가을은 반대로 여벌 옷이 갈수록 유용해지기 때문에 느끼는 확증 편향일 것이다.


다만 이번 가을은 제법 길었음에도 여기저기 돌아다닐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친구들은 이래저래 시간이 맞지 않았고, 그럴 때면 나는 생산적인 일 하나라도 더 해볼 궁리에 쫓기기 마련이라 산책하러 뒷산에 올라가는 것 말고 거의 나다니질 않았다. 그 결과 가을 옷은 거의 다 손도 대지 않은 채로 남게 되었고, 나는 옷걸이를 볼 때면 가을은 다 갔으니 겨울은 뭘 입고 나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옷을 사고 싶어졌다. 언제부터인가 몇 년째 겨울 옷에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 탓이다. 여기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한국의 혹독한 겨울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영하로 내려가면 두꺼운 코트나 패딩을 입을 수밖에 없는데, 이것들은 보온성이 뛰어난만큼 자리도 많이 차지하고 값도 비싸서 입맛대로 이것저것 구비해놓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가장 편하고 가장 따뜻한 패딩만 걸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1. 파란색 우주복 같은 패딩.

2. 감람색(흔히 말하는 카키색) 롱패딩.

3. 형의 회사에서 나온 패딩.


이 세 가지 정도가 추위 걱정 없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로 좁혀지고 말았는데, 여기에는 나름대로 애석한 사연이 있다. 짙은 남청색에 겉으로 울룩불룩하지 않아 멋지고 점잖고 아주 따뜻한 패딩을 형이 가져가고만 것이다. 1번 패딩의 색깔이 쨍한 코발트 블루에 가까운 탓에 출퇴근용으로 입기에 뭣하다는 이유였으니 어쩔 수 없긴 했지만, 그래도 옷걸이를 볼 때마다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았다. 1번 패딩은 형이 꺼린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 나도 좋아하지 않는데, 2번 롱패딩은 너무 길어서(=내가 작아서) 어지간히 춥지 않으면 피하고 싶고, 형이 준 3번 패딩은 여러모로 편하게 입을 만하긴 하나 강추위를 견디기에는 얇은 편이다.


그리하여 나는 올해야말로 내 마음에 쏙 드는 패딩을 장만하기로 작정했다. 사실은 예전부터 나사의 우주복 같은 흰색 패딩이 탐나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당장 뒤적이기 시작한 곳은 다름아닌 중고장터였다. 옷을 사기로 해놓고 중고장터부터 뒤진다는 게 좀 궁상스러운 느낌이 없지 않지만, 과잉 생산의 시대에 중고 제품을 이용하는 버릇은 합리적이고 권장할 만한 일이다. 탄소 배출도 줄이고 동물도 보호하고 내 지갑도 배려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자랑스럽게 생각하자.


아무튼 여기저기 뒤져보니 말끔한 패딩을 팔려고 내놓은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내가 인식하기로 패딩은 튼튼하기도 하고 세탁도 자주 할 일이 없어 도통 닳지를 않으니 한번 사면 십 년은 입는 물건인데, 오히려 그런 내구재로서의 특징 때문에 패션 업계에서 유행을 자꾸 바꿔서 조성하고, 사람들도 그에 맞춰서 질리면 파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게 경제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같은 중고 생활자에게는 잘된 일이긴 했다.


그리하여 내가 적당한 가격에 살 만하며, 게다가 디자인도 마음에 드는 브랜드의 제품 몇 가지를 검색해 봤다. 중국이나 홍콩에서 들여와 수상할 정도로 싸게 파는 물건은 새 제품도 평이 좋지 않았다. 한편 디자인이 예쁘지만 중고가가 제법 싼 모 국내사의 제품은 처음 듣긴 했으나 찾아보니 회사가 오래 되기도 했고 제품들의 평이 아주 좋았다. 나는 이 회사의 제품을 사기로 마음먹고 흰색 패딩을 다시 검색해서 오픈마켓의 전문 업자가 파는 물건을 찾아냈다. 이상적이었다.


다만 중고라 문제가 있긴 했다. 팔 뒤쪽에 미세한 얼룩이 있다는 것, 후드에서 퍼가 없어졌다는 것, 그리고 사이즈가 내가 입는 것에 비해 약간 크다는 것. 이 세 가지였는데, 얼룩은 그렇다쳐도 퍼가 없는 건 꽤 아쉬웠다. 모양도 모양이지만 후드에 달린 퍼는 바람을 흐트러뜨려 보온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그래도 뭐…… 값이 싸니까 퍼는 필요하면 어디서 호환품을 구할 수 있겠지,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다음 문제는 사이즈였다. 나는 95에서 100을 입는데, 이 제품의 사이즈는 100 전후라고 나와 있었다. 이 부분은 고민이 길었다. 내 몸이 예전과 달라 95 중에도 너무 끼어 입을 수 없는 옷이 적지 않은데, 어째 100 중에도 너무 커서 보기 싫은 옷이 있기 때문이다. 옷과 신발의 치수란 항상 참고 사항에 불과한 것일까? 아무튼 작으면 못 입지만 크면 옷을 껴입으면 되는 일이라 생각하고 내친김에 주문하고 말았다.


뭐든 물건을 주문한 뒤에는 깔끔히 잊어버리는게 여러모로 이득이다. 괜히 더 찾아보다가 더 싼 걸 발견하면 속이 쓰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날은 휴일이라 주문 취소까지 여유가 있었던 만큼 고민이 사라지지 않았다. 과연 잘 산 게 맞을까? 나는 돌다리도 두들겨본다는 마음으로 그 제품의 쇼핑몰 후기를 검색해서 꼼꼼히 읽어봤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사이즈가 실제보다 크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사진 후기를 봐도 키 180cm인 사람의 엉덩이를 다 덮을 지경이라 내가 입으면 롱패딩이 될 판이었다.


결국은 주문이 완전히 처리되기 전에 결제를 취소했다. 그 값에 그 정도로 마음에 드는 물건을 구할 수 없을 것 같아 여간 아쉽지 않았지만, 큰 옷을 어벙하게 입고 다니고 싶지도 않았으니 별 수 없었다. 나는 중고장터에서 그 브랜드 옷을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마음에 드는 패딩을 찾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사이즈도 딱 맞고, 퍼도 있고, 다른 결함도 없었다. 오로지 문제라면 색깔이 밝은 감람색이란 점이었다.


이 색깔이 나에게 잘 맞는다는 건 평생에 걸쳐 체험했지만, 나의 드림 컬러였던 백색을 포기해도 되는 것일까……. 이번에도 사람들 평을 찾아 검색해 봤다. 그런데 찾아보니 흰색 패딩은 처음에만 예쁘지 때 타기 시작하면 감당이 안 되는 만큼, 세탁을 자주 할 각오를 하라는 말이 많았다. 결정적인 조언이었다. 기껏 산 패딩을 아껴서 가끔만 입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여차하면 세탁소에 보내자니 돈이 아까울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나는 또 감람색 패딩을 주문하게 되었다. 패션에 신경을 쓰려던 사람이 과감한 시도를 했다가도 자기에게 어울리도록 새로운 세팅을 하기가 어려워서 결국엔 옷장에 입던 색만 즐비하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나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아무튼 그렇게 도착한 패딩은 썩 마음에 들었다. 사이즈도 딱 맞고 충분히 두툼했으며 색깔도 밝아서 있던 색을 똑같이 또 샀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다만 유일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제품 포장이었다. 판매자가 옷을 아무 조치도 없이 접어서 박스에 넣어 보낸 것이 아닌가? 요즘 포장을 뜯을 때 칼을 아주 조금만 뽑아서 뜯는 게 습관이 되어서 망정이지, 여차하면 칼질을 했다가 판매자에게 따질 수도 없는 재난을 겪을 뻔했다.


그래서 판매자에게 한마디 하려다…… 그냥 그만두었다. 옷을 샀으면 당연히 조심해서 뜯어야 할 것 아니냐고 나오면 반박할 거리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가 미국이면 또 모를까. 게다가 주의를 주어 앞으로 더 훌륭한 판매자로 인정받게 돕고 싶지도 않았다. 괜한 실랑이를 겪어봐야 신경 쓸 부분을 알게 되겠지. 나는 내 일이나 잘 하기로 마음먹었다.


황량한 가을의 끝자락에서 겨울을 바라볼 때 마음을 든든하게 해 주는 것은 마음에 드는 방한장비다.


그리고 여기서 닥쳐온 ‘내 일’이란 물론 입지 않는 패딩을 처분해서 옷걸이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내게는 위에 적은 것 말고도 밝은 황갈색 광택이 감도는 패딩이 있긴 한데 이상할 정도로 손이 가지 않는터라 몇 년을 묵혀두고 있었으니, 어떻게 생각해도 파는 게 나았다. 그리하여 3만 원에 장터에 올렸다가, 일주일에 걸쳐 주제를 파악하며 12000원까지 내렸다.


그제야 사겠다는 사람이 나왔다. 나는 구매자가 묻는 대로 가슴둘레까지 다시 측정해서 답해줬고, 마침내 안전 결제까지 예약되었다. 이제 택배 예약을 하고 포장해서 보내기만 하면 되는데…… 어째 예약이 되질 않았다.


중고로 잡동사니 사고 팔기로는 나도 제법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 이런 문제는 처음이었다. 앱에서 구매자의 번호가 가입시와 다르다는 메시지가 나오며 진행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물으니 구매자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내가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도리어 진행 방법을 알려주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래서 약간 빈정이 상한 상태에서 길게 설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시간과 감정이 아까웠다. 큰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택배비 빼면 9000원이나 나올까말까 하는 물건을 처리하자고 이런 고생을 해야 하나? 할 일이 너무 많이 쌓여 짓눌려 죽을 것 같은 심정인데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그리하여 ‘관두시오, 난 안 팔겠소.’라는 문장이 손끝까지 올라왔을 때, 구매자가 문제를 파악했다. 구매자는 그 옷을 남에게 보내기로 하고 배송지를 적었고, 장터 앱은 이 상황을 공식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다른 앱을 써서 택배를 보내기로 하고 패딩을 포장했다.


솔직히, 이 시점엔 이미 지쳐서 포장이고 뭐고 대충 박스에 처넣고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물건을 팔지 않으면 모르되, 파는 이상 잘 싸서 보내는 게 인지상정이라는 것이 중고거래 외길 20년 내 주관이었다. 무엇보다 앱으로 파는 이상 나의 이력이 남는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나는 패딩을 잘 접어 쇼핑백에 넣은 다음 박스에 넣고, 박스 안쪽 날개를 약간 잘라서 박스의 바깥쪽 날개가 맞닿는 절개부 밑에 붙였다. 아무리 험악하게 칼질을 해도 칼이 내용물에 닿지 않게 처리한 것이다. 개봉시 주의라는 문구도 잊지 않고 적었다. 내가 겪고 아쉬웠던 부분을 해결해서 보낸 셈인데, 이건 사실 특별히 무슨 친절과 선한 영향력이 더 퍼지면 좋겠다든가 하는 식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 아니라 일종의 장인 정신에 가까웠다. 기왕 할 거라면 이 정도는 해야 속이 시원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낸 택배는 다음날인가 다다음날에 무사히 도착했고, 구매자도 잘 받았다며 고맙다고 했다. 혹시 옷에 내가 모르는 문제가 있거나 트집을 잡히면 어쩌나 싶었는데 아니라 다행이었다. 안전결제에 묶여 있던 돈도 바로 받았다. 그런데 고맙다는 말이 끝이 아니었다. 구매자가 구매평에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는데 잘 처리해주셨을 뿐더러 제품이 훼손되지 않게 포장도 철저히 해주셨다’며 ‘사업 번창’하시라고 칭찬을 남긴 것이다.


내가 중고 거래 기록을 수십 건 남긴 것도 아닌데 사업이 잘 되라고까지 하는 건 약간 맞지 않는 덕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무튼 장인 정신을 알아봐주어 기쁘기도 했고 나의 중고 거래 이력도 더 나아져서 즐거웠다. 아무튼 어떤 친절이나 정성은 본의가 아니더라도, 단순히 자신의 직성이 풀리게 하는 정도의 습관적 행위더라도 결과적으로는 더 나은 삶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아마 그것이 우리가 도덕과 예절과 에티켓과 매너 따위를 굳이 배우고 익히는 이유이리라. 중고 거래 외길 20년의 노하우도 헛된 것은 아님을, 반강제 격리에 의한 패딩 구매 욕구와 무성의한 판매자 덕에 새삼 느꼈다.

(2022.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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