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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Dec 14. 2022

충실한 죽음은 삶에 대한 존중에서 온다(북리뷰)

“죽음이 물었다” 북리뷰(세계사 출판사 제공)


자랑할 일도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지만, 평범하게 사는 남들보다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편이다. 대학 시절부터 주변에 부모님 중 한 분이 돌아가신 친구가 유달리 많았던 데다,  어머니 건강 문제로 병원에 갈 일이 종종 있었던 탓이다. 게다가 올해 나는 방문에 설치한 철봉이 빠지는 바람에 턱걸이를 하다 떨어져 엉덩이와 머리를 바닥에 찧었고, 나에 이어서 아버지마저 베란다에서 철봉 운동을 하다 타일 위에 거꾸로 떨어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름에는 형이 결혼한 터라 가족의 삶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구나 싶기도 했는데, 그 이후로 이런저런 사고가 겹치니 어두운 내리막길이나 종국 역시 새로운 국면으로서 다가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즐겁고 행복한 변화만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법이다. 올해 초, 어머니 혈압이 너무 높아져서 119 구조대원들과 응급실에 갔을 때, 코로나 때문에 혼자서 망연히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를 두렵게 했던 죽음은 언제든 올 수 있다. 노쇠와 질병처럼 천천히 오든, 아니면 철봉에서 떨어져서 머리를 찧는 것처럼 벼락같이 오든, 죽음은 결국은 온다.


죽음을 잊고 사는 게 좋을까, 의식하고 사는 게 좋을까? 죽음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살면 마음은 편하겠지만 언젠가 다가올 큰 충격에 견디기 힘들 테고, 항상 죽음의 공포에 쫓기고 살면 사는 것 같지가 않으리라. 답은 둘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죽음이 삶의 일부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비하되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


만사 유비무환이라고, 어떤 문제든지 대비가 되어 있으면 걱정은 덜하다. 심지어 그것이 설령 죽음처럼 극복할 수 없고 오로지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지라도, 변화를 미리 안다면 고통과 두려움으로부터 다소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다. 병에 걸렸을 때 그 병의 증상에 대해 잘 아는 것만으로 기분이 한결 나아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나 클라우디아의 “죽음이 물었다”는 우리가 죽음과 상실을 어떻게 마주하면 되는지 다룬 책으로, 바로 그런 지점에서 누구나 읽어둘만했다. 저자는 병으로 고통받는 할머니를 보고 자라서 의사가 되었으나, 고통받는 말기 환자들과,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의사의 모습에 심한 고통을 느낀다. 거기에 더해 가정의 재정적 문제로 끝도 없이 일을 한 탓에 모든 면에서 한계까지 내몰리는데, 무너지기 직전에 간디의 일화를 다룬 연극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는다. 그 일화란 이런 것이었다.


어느 아이 어머니가 아들을 간디에게 데려와서 설탕을 먹지 말라고 타일러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간디는 2주 뒤에 오라고 답한다. 그 말대로 아이 어머니가 2주 뒤에 다시 찾아가자, 간디는 아이에게 설탕을 먹지 말라 한다. 그 말을 하려고 2주를 기다리게 한 이유가 궁금해진 아이 어머니가 물으니, 간디는 2주 전에는 자기도 설탕을 먹고 있었다고 답한다.


이 일화를 통해서 저자는 남에게 헌신하려면 자신부터 돌봐야 한다는, 평범하지만 의사가 좀처럼 지키지 못하는 진리를 깨닫고 비로소 올바른 방법을 찾아 완화 의료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대충 읽고 넘어가자면 그게 뭐 꼭 크게 깨달아야 알 수 있는 일인가 싶어 호들갑스럽게 느껴지지만,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며 간병을 하다보면 자신을 밝고 건강한 상태로 돌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가까운 사람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연히 정신 건강도 육체 건강도 망가지기 마련인데, 저자는 ‘공감을 잘하는’ 의사이기에 자신을 괴롭힌 이 문제에 대해 이런 해결책을 제시한다. ‘공감’을 넘어서 ‘연민’을 하라는 것이다. 공감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자신을 잊게 만들어 위험하다. 반면에 연민은 자신이 하려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알고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기에 나를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해준다. 항상 자신을 잊지 않고 돌보는 것이 결과적으로 남을 구하는 일이 된다는 이 평범한 사실은 제각각의 이유로 고통의 수렁에 잠겨가는 이들 모두가 다시금 읽어볼 만하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타인을 돌볼 수는 없다는 메시지에 이어 저자는 죽음이 다가오는 과정과 이를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다루는데, 여기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두 가지다. 의사도 대부분 환자의 죽음을 대하는 방법을 전혀 모른다는 점, 그리고 생존해있긴 하지만 살아있지는 않은 사람, 즉 떠밀리듯 사는 사람이 많다는 점. 그런데 정리해 보면 이 두 가지 문제 모두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삶을 존중한다’는 방법으로 해결되는 것들이다.


피할 수 없는 상실의 슬픔과 고통을 받아들이게 해주는 것은 충실히 채운 삶뿐이다


그렇다면 삶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 타인의 삶을 존중하기 위해 나의 삶부터 충실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저자는 브로니 웨어의 ‘죽기 전의 후회 다섯 가지’와 돈 미겔 루이스의 ‘후회하지 않는 법’을 들어 설명한다. 브로니 웨어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만나보고 정리한 그들의 후회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나에게 충실한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

2.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

3. 일에 얽메여 산 것

4.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

5. 더 행복한 사람이 되지 못한것


한편 돈 미겔 루이스의 ‘후회하지 않는 법’은 이렇다.

1.  말을 조심할 것

2. 속단하지 말 것

3. 만사를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지 말 것

4. 최선을 다할 것


남을 돌보려면 자신부터 돌보라는 말과 같이 이 금언들도 정리해놓고 보면 너무 당연한 교훈으로 들리긴 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 죽음을 앞둔 이들과 함께해온 저자는 이같은 금언들을 의료계에서 목도해온 사례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막연히 좋은 말’의 영역에서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가령 ‘직업으로 자신을 규정하고 일을 하고 있을 때만 자신을 가치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직업적 성취는 이룰 수 있겠으나 삶은 피폐해진다’,라거나 ‘자신을 남을 돌보는 이로 규정하고 아무것도 받으려 하지 않으면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녹초가 되어 버린다’는 지적만 해도 가슴이 뜨끔해진다. 나 역시 훌륭한 성취와 이타적 행위야말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냥 행복해지는 길이 있는데도 사회에서 훌륭하다고 평하는 방법을 거쳐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아무 고난도 없이 대충 놀면서 지내도 된다는 말로 해석하면 안되겠지만, 가치 판단에 오류가 있었던 게 아닐까 돌아볼 필요는 있겠다. 가치관은 삶을 위한 나침반이 되는 만큼, 자신의 삶이 잘 조율되었는지 살펴보지 않고는 적절한 방향으로 살아갈 수 없는 법이다.


죽음을 전제로 어떻게 충실하게 살 것인가를 다룬 뒤, 이 책의 말미에는 ‘상실하는 법’에 대한 조언도 나오는데, 이 대목을 보고 나는 탄식했다. 저자가 지적하듯 무언가를 얻는 방법은 누구나 가르치려 하지만, ‘잃은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얼마 없고, 나 역시 배운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얻지 못한 일보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일이 사람에게는 더 큰 고통을 주기 마련이고, 그런 상처를 잘 아물게 하지 못하면 삶의 많은 부분에 오래도록 지장이 생긴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뿐만 아니라 실연, 목표한 과업의 실패에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그런 만큼 적절한 상실의 방법을 배워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한 탓에 이런저런 실패와 상실을 너무 오래도록 끌어왔다. 참으로 후회스럽지만, 이 책의 교훈에 따라 후회는 적당히 그만두고 저자가 말하는 올바른 상실의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보이는 부분을 소개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상실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체험을 통해, 사람을 통해 얻은 변화를 갖고 나아가라’고. 배우자와 보낸 시간을 모두 지워버리는 것으로 관계를 끝내면 자신의 삶의 일부를 파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삶에서 겪은 상실이나 실패를 받아들이고 배울 것을 배워 나아가지 않으면 적절한 애도나 새로운 삶을 맞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짧지 않은 글이 되었는데, “죽음이 물었다” 전체에 걸쳐 저자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곧 삶을 존중하고 충실히 살아가는 태도임을 말하고 있다. 죽음을 논하며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실에 매달리는 것보다 상실 전후로 다룰 수 있는 것들을 잘 다루는 게 최선일 수밖에 없는 만큼 합리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충실한 죽음은 충실한 삶 이외에는 맞이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어쩔 수 없이 무거운 감은 있으나, 나는 이 책을 읽고 다소나마 마음이 가벼워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헤맨 끝에 어찌저찌 단순하지만 확실한 조언을 들은 듯한 느낌이랄까. 죽음과 상실의 공포에 시달렸거나 지금도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 혹은 올해 한 해를 상실한 듯한 느낌에 사로잡혀 슬픔을 딛고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사람에게 “죽음이 물었다”는 분명 추천할 만한 책이다.


(“죽음이 물었다” 아나 클라우디아 지음, 민승남 옮김. 세계사 출판사의 제공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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