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Jan 04. 2023

새해에 복을 받으라는 말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흔히 하는 시기인데, 나는 이 인사를 달가워하지 않는 편이다. 여유도 없고 성격도 꼬인 탓이 크긴 하겠지만, 평화롭게 잘 살며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의심할 이유가 없던 시절에도 이 인사를 좋아한 기억이 없다. 물론 남들이라고 정말 새해가 온 것이 너무 기뻐서 어쩔줄 몰라 쩔쩔 매다가 새해가 되면 비로소 여기저기 인사를 해대는 것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그냥 그런 인사를 하는 시기가 되었으니 할 뿐이다. ‘안녕하세요’가 정말 별일 없이 안녕하셨는지 진심으로 묻는 게 아닌 것처럼.


그러나 나도 익숙하게 평생을 써온 ‘안녕하세요’와 달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지금까지도 익숙하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지못해 쓰고는 있지만, 그럴 때마다 항상 남의 문화를 흉내내는 듯한 거부감이 따라다닌다.


이 기묘한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그나마 엇비슷한 예가 있었다. 바로 “Bless You”다. 이것은 서양권에서 재채기를 한 사람에게 건네는 인사로, 영화에선 보통 직접적인 뜻 대신 ‘감기 조심해’ 정도로 의역하는 듯하다. 한국에는 없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문화를 전혀 모르고 살다가 미국에서 오래 살다 온 후배를 알면서 체험하게 되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만 신기하고 재미있었고, 이후론 은근히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일단 재채기는 다소 비위생적인 생리 현상 중에서도 사람이 의지로 조절하기가 아주 어려운 행위인데 굳이 모르는 척 넘어가지 않고 인식했음을 알려주는 게 꺼림칙하다. 비록 그 내용이 건강을 염려하는 것일지라도 달갑지 않다. 뻔히 소리가 다 들리는 화장실에서 푸드덕거리고 설사를 하고 나온 친구에게 속이 안 좋으면 약을 좀 챙겨주겠다고 해주는 게 반드시 매너있는 행위는 아니지 않은가? 방귀나 트림은 사람이 참을 수 있는 행위고, 따라서 숨기는 게 매너인 만큼 옆에서 언급하고 타박하는 게 이상하지 않지만, 재채기는 굳이 아는척하진 말아줬으면 하는 게 나를 비롯한 동양권 사람들의 인식이 아닐까 추측한다.


그러나 찾아보면 블레스 유도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는 말은 아니고, 오랜 세월에 걸쳐 굳어진 풍습이자 인삿말에 가까운 모양이다. 일단 재채기로 영혼이 빠져나간다는 믿음이 예전부터 있었고, 거기에 흑사병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던 시절이 와서 재채기를 병의 전조로 여기고 걱정한 것과, 교황이 환자와 망자를 위해 축복의 기도를 올리자고 한 게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블레스 유’가 자리잡았다는 얘기도 있다. 누가 감기 증상을 보일 때 코로나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어떤 말이 유행어가 되어 자리잡으면 ‘블레스 유’와 비슷한 위상을 갖는 말이 될 법도 하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블레스 유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나은 문화 같은데 그래도 별로 친근하게 느껴지진 않고, 내가 따라하면 주변 한국인에게 굉장히 이상한 인상을 줄 것 같아 꺼려진다. 핼러윈이나 크리스마스처럼 어느 날을 잡아서 즐기는 행사 같은 게 아니라 한국에선 상상도 하지 않는 생활 예절이기 때문이다. 나의 사고 방식이나 행동 양식과 어긋나는 일에는 반감을 갖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침대에 신발을 신고 올라가라고 누가 돈을 주고 시킨대도 하기 싫은 것처럼. 이것이 내가 블레스 유를 좋아하지 않았던 두 번째 이유인데, 아무리 그래도 한국에선 한국 법을 따르라는 식으로 후배에게 그러지 말라 하는 건 너무 야박하고 편협한 짓인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 아마 본인도 특별히 재미있어서 하는 건 아니고, 안 하면 굉장히 어색한 느낌이 들어 반사적으로 하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윗사람과 악수할 때 왼손으로 오른쪽 팔목을 잡을 수밖에 없는 것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야기를 다시 돌려서,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블레스 유’를 듣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이유도 비슷하다. 적어도 내게 새해의 도래는 재난이다. 이제는 초중고 때처럼 반이 바뀌어 새로운 친구를 만나거나 성인이 되며 새로운 권리를 누리게 되는 것도 아니고 진급하거나 사업이 잘 된다든가 건강이 개선될 일도 기대하기 힘들다. 요컨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늙고 병들고 썩어감은 확정적이고 발전은 불확실한 희망사항에 불과하니 새해가 재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해가 바뀌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재채기처럼 생각하고 다들 적당히 모른척 넘어갔으면 하는 바람인데, 한 해가 끝나는 대사건을 모른척하지 못하는 게 일반적인 사람들 마음인 듯하다. 하기야 일 년에 딱 한 번 있는 일이니까 서로 좋은 말을 하는 게 낫기야 하겠지?


시간의 흐름은 멈춤이 없고 같은 새해는 두 번 맞이할 수 없다


‘블레스 유’와 마찬가지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정말로 진지하게 ‘복’을 바라서 하는 말이 아님을 나도 안다. 상대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겠으나, 상당부분은 그저 때에 맞는 인사일 따름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내가 이 인사를 꺼릴 수밖에 없는 것은, 새해의 도래를 당연하다는 듯 기쁜 일로 간주하는 맥락이 아무래도 이국의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처럼 나와는 잘 맞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나도 다소 분별이 있는 사람인지라 복 많이 받으라는 사람 면전에 대고 ‘새해가 뭐가 그렇게 기쁘죠? 복을 받으라고 하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복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따위로 무례하게 반문하지도 않고 시기에 맞춰 좋은 말을 해주는 배려를 감사하게 생각하긴 하지만, 기왕이면 문구라도 다른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오래 전 연말인가 연초에 광고에 나온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많은 사람이 부유해지길 바라면서도 그렇게 가볍게 표현하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광고에 나온 김정은 씨가 귀여워서인지는 모르겠는데, 덕분에 부자 되기는 상당히 오랜 기간 한국인의 소망이자 덕담으로 자리잡았던 듯하다. 어디서는 이런 현상을 천박한 자본주의의 발현이라고도 했고 나도 동의하는 편이긴 하나, 복을 많이 받으라는 얘기 보다는 부자가 되라는 얘기가 좀더 편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약간 더 농담처럼 가벼워 대충 흘려듣기 좋은 탓이 아닐까 싶다.


뭘 만들어서 팔아먹고 사는 창작자들은 ‘대박 나라’는 인사를 듣는 경우도 적진 않은데, 오디오 매거진 ‘조용한 생활’에서 김혜리 기자가 지적했듯이 ‘대박’이 모든 창작의 목표인양다뤄지는 것도 문제는 있어 보인다. 대박나기를 바라지 않는 창작자가 많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대박이라는 말의 의미 사이에 원하는 바를 표현하여 좋은 작품으로 인정받는다는 의미가 숨어있는 것 같진 않다. 말하는 사람이야 그런 뜻도 있었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이런 류의 유행어 한 단어로 건네는 인사는 분명 다양한 생각과 바람을 대충 뭉개버리고 만다. 새해에 받으라는 복도 그런 면이 있다고 느낀다.


요즘 나는 건강하라는 인사를 자주 하는 편이다. 문법적 문제만 제외하면 어떻게 봐도 또렷하고 오해의 소지가 없으며 무난한 인사다. 심지어 나는 진심으로 듣는 이의 건강을 기원한다. 상대가 친구이든 거래처이든 건강을 잃으면 나한테까지 어떻게든 악영향이 온다는 점도 고려하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건강했으면 좋겠다. 지금 내가 건강하지 않은 탓도 있으리라. 나는 지금 점심에 먹은 채식 만두가 체한 것인지 아주 갑갑하고 힘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이 글을 정리하고 있는데, 육신을 갖고 사는 이상 건강보다 빼어난 가치가 없다. 곽재식 작가는 변화하는 미래를 어떻게 대비해야 하냐는 질문에 미래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건강을 챙기는 게 근본적으로 가장 안전한 대비라는 취지의 답을 한 적이 있다. 생각해보면 과연 그렇다. 그러니 우리 모두 새해에는 건강하기를 바라며 우리 자신을 축복합시다. (2023.01.03.)

매거진의 이전글 2022년을 빛낸 소비의 기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