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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an 11. 2023

안녕, 나의 낡은 로봇청소기


중고로 구입한 로봇청소기를 어찌저찌 2020년 10월부터 사용하고 있으니 로봇청소기 관리 경력도 3년차에 접어든 셈이다. 예전에도 다뤘듯이 내가 산 로봇청소기는 가성비가 좋기로 유명한 국내 ㄹ사 제품인데, 기본기는 충실한 한편으로 약간 맹한 구석이 있다고 할까, 상정되지 않은 문제에 대처할 능력이 적은 편이다.


예를 들어 충전기 바로 옆의 방문을 연 상태에서 기록된 지도가 설정되어 있을 때 방문을 닫고 가동하면, 몇 걸음 떼자마자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대처하지 못한 나머지 자신이 방이 닫혔을 때의 주변 모습과 가장 흡사한 다른 곳에 있다고 착각해버리는 식이다. 집어들거나 발로 밀어 다른 곳에 놓아도 자기 위치를 한참 파악하려다 포기하고 새 지도를 그릴 때가 적지 않다. 그러면 아직 덮어씌워지지 않은 이전 지도를 불러내어 로봇청소기의 위치를 다시 알려줘야 하는데, 익숙해지지 않으면 상당히 성가신 일이다. ‘가성비’ 제품들이 대체로 이런 식일 때가 많은 것 같다. 정해진 노선을 조금만 벗어나면 문제가 터지고 만다.


그럼에도 나는 처음 산 로봇청소기를 어르고 달래며, 타협점을 찾아서 잘 지내왔다. 배터리 수명이 다했을 때 아버지가 한 번 고치고, 이후에 모터가 고장났을 때 센터에 보내서 또 한 번을 고치기도 했다. 우리 사이에 이제 별 문제는 없는 듯싶었다. 서로가 서로를 깊이 이해했고, 나는 자리를 비우면서도 청소를 믿고 맡길 수 있었다. 목가적인 청소의 나날이 이어졌다. 그런데 2022년 연말, 이 관계에 큰 타격이 있었다. 새로운 로봇청소기가 생긴 것이다.


물론 멀쩡한 로봇청소기를 놔두고 새것을 사진 않았다. 여러 경로를 통해서 수많은 로봇청소기가 새로 등장했다는 소식도 듣고 그 로봇청소기들이 빼어난 물걸레 실력과 자동 먼지 비움, 자동 빨래 건조 기능 따위를 탑재했다는 소식도 들었지만 완전히 남의 일로 생각했다. 비용 이전에 지금의 로봇 청소기에 큰 불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활용 쓰레기 배출일에 집에 들어오다 버려진 로봇청소기를 발견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형이 사용중인 것과 같은 ㅊ사 제품이라는 것을 알아본 이상 집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라이다 센서 덮개에 깊은 상처가 많이 나 있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고장이 났을 확률이 대단히 높지만, 최소한 소모품 몇 개는 확보할 수 있겠구나 싶었던 탓이다. 게다가 충전기까지 같이 버려두었으므로 고장 여부를 확인하기도 간단했다.


그리하여 집에 가져온 ㅊ사 로봇청소기를 적당히 충전하고 앱과 연동하여 가동해 보니…… 놀랍게도 멀쩡히 정상 작동했다. 걱정스러웠던 라이다 센서도 민감하게 주변을 인식하고 지도를 작성했으며, 필수적인 부품이 빠져있지도 않았다. 나는 기쁨 반, 의아함 반으로 로봇청소기를 구석구석 잘 닦기 시작했다. 멀쩡한 건 물론 좋은데, 전 주인은 대체 왜 작동에 이상이 없는 로봇청소기를 버렸을까?


청소기를 닦는 동안 의문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일단 로봇청소기는 구석구석 대단히 더러웠다. 구입한 후로 단 한 번도 관리를 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이드 브러시, 메인 브러시 모두에 긴 머리카락이 감겨 있었는 것은 물론이고, 버튼을 누르면 스프링의 힘으로 튀어나와야 하는 먼지통은 뭐가 낀 듯 나오지 않았다. 틈새에 손톱을 걸고 살살 잘 당겨서 뽑아 보니, 먼지통과 수납공간 사이 곳곳에 먼지가 검게 달라붙어 있었다. 같은 현상이 흡입구 근처에서도 관찰되었다. 배설물은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사물을 카메라로 인식하고 전선과 양말과 배설물을 피하는 기능은 상당히 고가의 제품에나 탑재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알코올로 열심히 잘 닦아 보니 다행히도 배설물은 아니었다. 아마 화장실 같은 곳에 들어가서 물을 빨아들인 탓에 먼지가 눌러붙은 것이리라.


그렇다면 센서 뚜껑에는 왜 그렇게 상처가 많이 났을까? 이것은 ㅊ사 로봇청소기의 구조에 기인하는 듯했다. 이 모델은 센서가 전방이 아니라 후방에 치우쳐 있는데, 이럴 경우에는 앞부분이 소파 같은 장애물 밑까지 들어간 다음에야 더는 못 들어가는 곳임을 알게 될 확률이 높을 것이다. 앞부분이라도 들어가서 청소를 하는 게 나은 점도 있지만, 장애물의 높이가 아주 절묘해서 센서의 높이보다는 높아 인지되지 않고, 덮개보다는 낮아서 살짝 걸릴 정도일 때는 탈출을 잘 하지 못할 수 있다. 특히 전선 따위로 인해 덜컹이며 높이가 변화하면 로봇청소기의 판단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내가 추측하기로, ㅊ사 로봇청소기의 전 주인은 이런 기기의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로봇청소기만 들이면 청소는 모두 해결되리라 생각하고 샀을 확률보다는 주변에서 선물했을 확률이 높을 듯하다. 집안일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려는 의도였으리라. 그러나 로봇청소기는 만능이 아니다. 설명서를 잘 읽고 앱을 설치하고, 계정을 만들고, 와이파이를 연동하고, 집안 구조를 인식시킨 뒤에 금지 구역을 하나하나 설정해야 비로소 돌려볼 만하고, 그런 뒤에도 양말이나 전선 따위는 치워버려야 한다. 주기적으로 먼지통을 비우고 브러시에 낀 먼지와 털도 제거해야 한다.


그것을 모르거나 익숙하게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본체의 작동 버튼을 누르는 것밖에 하지 않았을 테니, 로봇청소기는 완전히 사고뭉치가 되었으리라. 특히 이 녀석은 높이에 대한 민감도가 낮아서 화장실 단차 정도는 무시하고 내려갔다가 올라오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아마 전 주인은 걸핏하면 화장실에 내려가 젖은 바닥의 먼지를 잔뜩 주워먹고 꺼내달라고 소리치는 로봇청소기를 보고 넌더리가 났을 확률이 높다. 게다가 센서 덮개에 난 상처를 보건대 소파나 선반 밑에서 수십 번 이상을 헤매며 그 가구에도 적지 않은 흠집을 냈으리라. 그렇게 갖가지 사고를 치는데다 먼지통도 잘 빠지지 않게 되었으니, 전 주인이 내다버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팔지 않고 버린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로봇청소기를 한 번도 닦지 않을 정도로 여유가 없거나 기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이 이것을 잘 닦아 사진을 찍고 중고 거래 앱에 올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조금만 알아보면 잘 쓸 수 있는 멀쩡한 제품을 내다버렸다는 이유로 전 주인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욕구가 조금은 있긴 하나, 세상 누구나 스마트 기기를 잘 쓸 수 있도록 숙련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운전을 하면서도 엔진 오일이나 타이어 관리 개념을 모르는 사람이 많듯이, 청소기도 종종 손질하며 써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그러니 로봇청소기를 적절히 사용하는 방법을 익힐 수 없는 사람이 많은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비난받아야 할 것은 로봇청소기가 있으면 청소는 영원히 완벽히 해결된다는 듯이 광고하고 실제 사용 방법은 구체적으로 안내하지 않는 기업들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앱 설치, 가입, 기기 연동, 지도 작성과 금지구역 설정 따위 번잡한 과정의 실상을 널리 알리면 로봇청소기의 판매량이 지금 같진 않겠지만…….


아무튼 ㅊ사의 이 로봇청소기를 2주 이상 사용해보니 기존의 로봇청소기보다 훨씬 비싸면서도 이런저런 단점이 있었다. 일단 높이 민감도 설정도 불가능하고, 와이파이가 약하면 지도 수정 저장을 하지 못한다. 게다가 금지구역을 대각선으로 설정하지 못해 번거로운 경우도 있으며, 집안을 모두 스캔하고도 구획을 나누지 않고 있다는 문제도 있다. 강력한 대신 좀 더 무겁고 더 시끄럽기도 하다. 그러나 로봇청소기의 원활한 작동에 가장 핵심적인 기능인 ‘자기 위치 파악’ 능력이 빼어나서 대충 아무 곳으로 밀어놓더라도 길을 잃지 않는다는 게 아주 매력적이었다. 요컨대 설정만 제대로 해놓고 나면 사용자가 머리를 쥐어뜯을 일은 없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나는 ㅊ사의 새 로봇청소기에게 합격점을 주었는데, 기능이 아주 다른 것도 아닌 로봇청소기 두 대를 한 집에 같이 놓고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둘을 다 놓고 번갈아가며 가동하여 우열을 비교하거나 싸움을 붙이는 것도 재미는 있겠지만, 로마 귀족도 전문 리뷰어도 아닌 마당에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당연히 기존의 ㄹ사 제품을 처분해야만 하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청소에 시간을 좀 덜 빼앗기고 편하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 이리저리 검색을 거듭하고 전문 리뷰 채널의 스펙 검증을 읽어보며 겨우 결정한 뒤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넘게 이동해서 구입해온 게 바로 ㄹ사의 로봇청소기다. 그 뒤로 무엇을 어떻게 설정하고 가구를 어떻게 치워놓아야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지 고민하며 지도를 몇 번이고 재작성한 끝에 안정적인 결과를 얻었고, 배터리와 모터까지 한 번씩 교체하여 앞으로 몇 년은 더 걱정할 일 없이 쓰겠구나 생각했는데…… 그것을 큰맘 먹고 구입한 신형 로봇청소기도 아니고 어쩌다 주워온 녀석으로 바꾼다고 생각하니 영 개운치 않았다. ㄹ사 로봇청소기와의 균형은 이를 갈면서 이뤄낸 노력의 결실인데, 이것을 그냥 우연한 행운을 따라 버리는 게 온당한 일인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잠깐은 ㅊ사 제품을 팔아치우는 게 어떨까 고려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내가 로봇청소기 관리를 전담할 수는 없을 테니, 설정만 잘 해놓으면 부모님이 막 쓰기에도 안정적인 ㅊ사 청소기가 압도적으로 나았다.

로봇이 나를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나는 로봇을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이해한 것을 버리기는 어렵다.

결론적으로 ㄹ사 로봇청소기의 처분은 확정적이었다. 나는 이것을 팔아치우는 쪽으로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녀석을 인수한 새 주인이 다양한 요령을 익혀서 잘 써먹을까 생각하니 암담해졌다. 설정을 잘 하지 못하면 화장실에 들어가거나 양말 따위를 주워 먹다 체하는 사고를 막을 수 없고, 이해가 부족하면 작동중인 로봇청소기를 이리저리 밀어대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면 ㄹ사 로봇청소기는 위치도 지도도 잃어버려 진짜 말썽꾸러기가 될 수밖에 없는데, 이를 너그럽게 이해해줄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필시 욕이나 먹고 애물단지라고 홀대 당하겠지. 우리집에서 그토록 귀하게 관리한 로봇이 왜 그런 꼴을 당해야 한다는 말인가? 십 몇만 원도 귀한 돈임은 분명하지만, 그 대가로 수년을 동고동락한 로봇이 부당한 대우를 받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써놓고 보니 멍청한 농담 같은데, 잡다한 물건을 처분하다 보면 이런 일이 종종 생긴다. 물건에 깊이 정이 들어 떠나보내기가 아쉬워지는 것이다. 잘 입은 옷, 재미있게 한 보드게임, 온갖 용도로 써온 스마트폰……. 특히 마음에 깊이 발자국을 남긴 것은 타인과의 추억이 얽힌 물건, 혹은 오랜 기간에 걸쳐 내게 알맞도록 조정한 물건들인데, 이런 물건들을 다시는 내 손에 쥘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면 아름다운 기억을 잃는 것처럼 적적해진다.


최근에 나는 서브 폰으로 쓰던 ㅅ사의 가성비 고성능 스마트폰을 처분했다. 보기 드문 대화면 LCD 기기라 이런저런 일에 활용하기 좋았는데, 기변을 하면서 서브폰이 늘어나는 통에 처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처지가 되어 눈물을 머금고 팔아치운 것이다. 다만 구입한 사람이 안드로이드 다루는 데에 익숙한 사람이라 커스텀 OS를 깔아 잘 쓰고 있다는 후기를 남긴 게 제법 위로가 되었다. 그 정도라면 내가 활용하던 것 이상으로 잘 쓰고 있다는 뜻이니 제 주인을 찾아갔구나 싶었다.


그 경험을 생각하면 나의 낡은 로봇청소기도 좋은 주인을 찾아야 할 텐데, 무슨 자격 시험을 볼 수도 없는 일이고, 로봇청소기를 잘 다루는 분이 서브 기기로 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누가 로봇청소기를 둘이나 돌린단 말인가? 결국 나는 이것을 파는 대신 지인에게 빌려주기로 했다. 그러면 내가 요령을 알려주기도 좋고, 로봇청소기가 아무렇게나 버려질 일도 없을 게 아닌가. 그리하여 주말에 1인 가구인 후배에게 제안해서 로봇청소기를 빌려주기로 했고, 화요일인 어제 잡다한 부속품들을 모아 철저히 포장해서 택배로 발송했다. 아마 오늘 밤에는 로봇청소기가 새로운 주인, 새로운 거처를 찾아서 새로운 지도를 그리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저런 요령은 필요하겠지만 서로가 마음에 들길 바랄 뿐이다.

(2023.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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