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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an 18. 2023

작품에 과몰입하기



무슨 작품을 보고 크게 감동하는 것도 아주 실망하는 것도 어느 수준 이상의 에너지가 요구되는 일이라 요즈음 들어서는 그런 적이 그다지 없는 것 같다. ‘헤어질 결심’은 워낙 명작인 데다 심지어 취향에도 잘 맞는 작품이라 처음 봤을 때도 그 이후로도 세세한 표현 하나하나에 은근한 감동을 느끼게 되지만 그만한 작품을 만나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고, 요즘은 대체로 재미있어도 머리로만 재미있네, 하고 넘어가는 편이다. 이렇게 만사에 무뎌져서야 누굴 감동시킬 수 있을까 싶어 걱정이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무엇을 보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감각이 없어져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을 2주 전쯤에 실감했다. 왓챠에서 본 단편 드라마 ‘딱밤 한 대가 이별에 미치는 영향’ 덕분이다. 한국 드라마를 좀처럼 보지 않는 내가 어쩌다 이 드라마를 보게 되었는가? 연초를 맞이하여 왓챠 구독을 중지할까말까 고민하며 구독을 지속할 이유를 찾아다니던 내게 추천 영상으로 이 작품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아주 사소한 계기로 관계가 파탄난다는 얘기에 호감을 갖는 이상한 사람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틀어보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시작부터 제목에 잡혀있는 콘셉트 그대로 흘러간다. 교사인 여주인공은 회사 사장인 남주인공과 오래 사귀어 반쯤 같이 사는 듯한 모양으로 지내고 있는데, 시작되자마자 꼭 내키지만은 않는 성관계를 하더니, 이후엔 항상 그래왔듯 축구 경기를 보며 딱밤 내기를 한다. 이기는 쪽이 지는 쪽 이마를 딱밤으로 때리는 단순한 내기다. 어떻게 봐도 일이 즐겁게 잘 풀릴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아니나다를까 남주인공이 내기에 이겨서 여주인공의 이마를 아주 강렬하게, 온힘을 다해서 때린다. 보기만 해도 화가 치밀 것 같은 딱밤이다. 당연히 여주인공은 아픔과 짜증과 울분 따위를 느끼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러나 남주인공은 별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여기까진 얄밉지만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다. 흔한 일상의 풍경이니까 여주인공도 다른 일이 없었다면 금방 기분을 풀고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다른 일이 생기고 마는 것이다.


이 ‘다른 일’ 두 가지를 간략하게만 소개한다. 첫 번째는 학생이 연애 상담을 하며 던진 질문, ‘남자 친구가 잘해주냐’는 말에 대답을 망설이게 되는 것. 빈말로 적당히 넘어가도 될 상황에도 발끝이 걸리는 느낌은 차츰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서브 남자 주인공인 ‘참한’ 동료 교사와 은근히 얽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주인공은 자신의 연애가 딱히 행복하지 않음을 실감한 나머지 결별을 결심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사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를 아주 특출날 것은 없는 모양으로 풀어낸 작품이었는데, 내가 이 작품을 보고 감동한 이유는 대체로 남자 주인공 때문이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자상하고 멋진 남자로 나온 ‘강태오’ 배우가 여기선 그림으로 그린듯한 나쁜 놈으로 열연을 하는데, 그 모습을 보자면 정말이지 화가 치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저따위 자식이랑 사귈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나의 주관적인 생각과 경험에 따르면 아무리 나쁜 남자 주인공이라도 오로지 나쁘기만 한 쓰레기는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이야기 속에 좋은 점을 한 개쯤 넣어주기 마련인데, 이 남자 주인공은 시종일관 이기적이고 성질 더러운 캐릭터로 나와서 관계의 성립 자체가 불가사의할 지경이었다. 이런 남자 주인공을 상대로 자신의 관계가 건강한 것이었나 고민하고 가급적 냉정한 싸움을 벌이려는 여주인공(신예은 배우)을 보자면 정말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보통 이런 경우에는 서브 남주가 자상하면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자일 때가 많아(역시 주관적 개념이다) 시청자가 ‘뭘 고민해? 빨리 저 남자를 잡아야지!’라고 응원을 하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여기선 마음놓고 그런 응원을 할 수도 없었던 것이, 동료 교사인 서브 남주가 자상하긴 한데 그렇게 미덥지 않았던 탓이다. 누가 봐도 자상해서 잘해줄 것 같긴 한데, 자상함이 그리 멋지지 않은 형상인데다 애초에 성격이 좀 어수룩해서 도통 눈에 차질 않았다. 연애 사연 소개 및 상담을 주로 다루는 예능 방송인 ‘마녀 사냥’에서 사연을 소개할 때 코미디언 유세윤이 연기하는 ‘너무 착하고 순하고 어수룩한 약혼남’을 보고 작가 허지웅이 “나무꾼이야?”하고 실소한 적이 있는데, 이 드라마에서 나오는 서브 남주도 그런 경지에 가까웠다. 정말 좋은 사람이지만 회의감으로 차갑게 식어가는 연애 감정에 뜨거운 불을 지필 만한 사람으로는 도저히 느껴지지 않는달까…….


그런저런 이유로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특히 갈등이 한층 더 심해지는 중반부부터 나는 흔히 하는 표현대로 ‘고구마를 먹은 듯한’ 기분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하필 나는 그 드라마를 틀어놓고 채식 만두를 한그릇 가득 먹고 있었는데, 싼 값에 산 그 만두는 가격에 알맞게도 그다지 맛이 있지 않아서 억지로 입안에 쑤셔넣어야만 했다. 고구마를 먹는 전개와 억지로 먹는 음식의 조화……. 결국 나는 그날 심하게 체하고 말았다. 재미있는 표현으로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소화가 되질 않아서 약을 먹고 손가락을 따고 마사지를 하며 다음날까지 고생했다. 결코 작품만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체할 정도로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이긴 했던 셈이다. 아무튼 신체적으로 영향을 받을 정도의 감성이 아직도 내게 남아있음을 알아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떤 작품에 정신없이 빨려드는 경험은 삶을 풍부하게 만든다. 소화불량은 피하고 싶지만.


엇비슷하다면 엇비슷한 경험으로 미야베 미유키의 ‘행복한 탐정 시리즈’를 봤을 때도 적잖이 고생을 한 적이 있다. 이 미스터리 소설 시리즈는 흔한 탐정물과 달리 주인공이 재벌집 딸과 결혼하여 귀여운 딸을 낳고 행복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하는 한편으로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회성 짙은 사건을 해결하는 전개로 이루어져, 그 안정적인 행복감으로 귀환하는 맛이 각별했다. 탐정물 하면 신통치 않은 생활을 하며 음울한 독백을 뇌까리는 남자가 나오기 일쑤인데 그 정반대 구도로도 얼마든지 재미있는 얘기가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줘 배울 점도 많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3권쯤에 가자 이야기가 한없이 무거워지는가 싶더니 주인공의 행복한 가정환경이 깡그리 박살나고 말았다.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과 믿고 싶지 않은 방식으로 발밑이 무너져내려 빈손으로 주저앉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눈을 의심케 하는 전개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부분을 읽을 때 나는 헌혈을 하는 중이었기에, 그야말로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이것도 재미있는 표현을 하려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간호사를 불러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을 할 지경이었다. 다행히도 뭐가 잘못되기 전에 마음도 추스르고 헌혈도 끝나긴 했지만, 다시 겪고 싶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길로 귀가해서 소장하고 있던 그 시리즈를 전부 처분하고 뒷권은 나오든 말든 읽지 않기로 결심하고 말았으니……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실감나게 쓰는 게 반드시 좋지만은 않은 일 같기도 하다.


그나저나 이 정도로 작중의 부정적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할 능력이 남아있다면 반대로 긍정적 감정에도 쉽게 영향을 받아서 주인공을 따라 덩달아 행복감에 젖기도 하면 좋겠는데, 좀처럼 그렇게 되진 않는다. 사람이 이득에 비해 손해에 3배나 민감하다는데 그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부정적 사고가 굳어지고 행복 회로가 마비된 탓인지 모르겠다. 사랑받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것처럼 허구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느끼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데, 그 연습이 덜 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 요즘은 가급적 행복한 이야기를 찾으려 하고 직접 쓰는 이야기도 행복한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아직까진 잘 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불행이 체질이 아니길 바라며 연습하는 수밖에.

(2023.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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