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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Feb 09. 2023

실감나지 않는 아파트 화재와 대피



지난주 어느날 아침에 일어난 일이다. 늘 그렇듯 늦은 아침에도 피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나는 9시에 눈을 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눈 찜질을 하며 다시 잠을 청했는데…… 잠시 후에 어머니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 불이 났다고 했다. 지하에 불이 나서 대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잠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방송으로도 같은 내용이 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TTS일 조합 음성 방송이 느긋하게 떠드는 안내에도 별다른 정보는 없었다. 재활용품 수거일을 지켜달라는 방송과 전혀 다를 게 없는 어조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급박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모든 게 다 꿈 같기도 하고, 혹은 괜한 호들갑 같기도 했다. 물론 이런 류의 긴급 안내 방송을 사람이 한다 해도 침착함을 유지해야 혼란이 생기지 않는다곤 하지만, 그래도 ‘이것은 실제상황입니다’라는 부연 설명은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나는 궁시렁대며 패딩을 입고 양말을 신었으며, 가방에 지갑과 스마트폰, 아이패드, 무선 키보드까지 챙겼다. 어머니도 옷을 챙겨 입고, 스마트폰, 처방약 등을 챙긴 뒤에 화장실에 한 번 들렀다. 남들이 보면 뭔 짓인가 싶겠지만 그게 자연스러운 편이었다. 안내 방송도 계속되지 않았고 사이렌도 울리지 않았으므로 지하의 쓰레기통에 불이 붙은 정도인데 혹시 모르니 대피하라는 식이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문을 여니 웬걸, 눈앞에 연기가 자욱했다. 투명도 30% 정도로 복도의 시야가 가려져 있었다. 불은 지하에 났다는데 옥상에 가까운 우리집 앞 복도가 이 모양이라니 웃고 넘길 수준의 작은 불은 아닌 듯했다.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엘리베이터를 타자고 하는 말이 솔깃하게 들렸다. 이 상황에 계단으로 십수 층을 내려가는 게 맞나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난 상황에 엘리베이터를 쓰지 않는 건 상식인 만큼, 그대로 계단을 이용했다.


다행히도 계단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적어도 자욱한 연기가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평소와 달리 전등이 다 켜져 있었는데도 연기가 보이지 않았으니, 당황한 상태를 고려하더라도 연기가 많이 차진 않았던 듯하다. 이래서 비상 계단 문은 꼭 닫아두라고 하는구나, 비상 계단에 자전거 따위 잡다한 물건을 놓지 말라고 하는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다.


어머니나 나나 건강한 편이라 십수 층을 뛰어 내려가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5층 쯤 되자 소방대원들이 중무장을 하고 걸어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이상이 없나 끝까지 올라가지 않을까.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그들이 우리에게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빨리 오라고 재촉하고 모포 따위를 덮어줬다면 큰일이 나긴 났구나 싶었으리라.


밖으로 나가니 이미 주민 열댓명쯤이 나와서 근심스럽게 서성이고 있었다. 건물에서 불이나 연기가 보이진 않아서, 지진을 피해서 나온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옆으로 아파트 관리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남자가 지나갔는데, 지하에 오래 있었는지 마스크가 회색이었다. 그에게 어느 중년 여성이 물었다. 자신이 옆동 주민인데, 우리 동은 사이렌이 울리는데 방송은 왜 안 나오고, 불이 난 옆 동은 왜 사이렌이 안 울리고 방송만 나오냐는 것이었다. 관계자는 전기 계통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고 설명하고 어디론가 떠났다. 생각해보면 어떤 재난이 닥쳐도 마지막까지 가동되어야 하는 게 경보와 안내 방송이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누구도 제때 따지진 못했다.


아무튼 불이 나서 연기도 보고 대피도 했는데, 정작 불도 안 보이고 소방차도 다 지하에 있는 듯 눈에 띄지 않아 실감이 전혀 안 나는 것은 아닌데 생생한 것도 아닌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냥 들어가겠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언제 들어갈 수 있을지 전혀 모를 일이라, 일단 어머니와 나는 여느때처럼 평온한 아파트 단지를 좀 걷고, 걸은 김에 근처 놀이터까지 가서 토스를 켜고 특정 장소에서 20원 받기를 실행했다. 정말 재수가 없다면 집이 어찌될지 모르는 마당에 20원을 줍고 있자니 대단히 모순적인 짓을 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나서서 불을 끌 수도 없고 소방대를 응원할 수도 없으니, 남은 것은 주어진 시간을 유용히 보내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모든 불이 위험하다는 걸 잊어버리면 안 된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아주 멀리 가는 것도 경우가 아닌 것 같기도 해서, 우리는 근처의 카페에 들어가 모닝 커피를 마시며 대충 시간을 죽였다. 옆 테이블에 앉은 중년 부부도 얘기하는 것을 듣자니 우리 동에서 대피를 온 사람들이었다. 카페 직원은 평소와 달리 사람들이 뜬금없는 시간에 찾아오는 걸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무튼 집에 언제 돌아갈지 모른다는 이유로 블루투스 키보드와 태블릿을 챙긴 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생각해보니 아침에 먹어야 할 약을 먹지 못했다. 어머니는 어떤가 물으니 챙겨온 약통을 꺼내셨는데, 약을 옮겨담지 못한 빈 통이었다. 별일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잡다한 물건을 챙기긴 했지만 어머니나 나나 어쨌든 당황하긴 한 모양이었다. 이런 식의 대피 훈련도 받아본 일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카페에 40분 정도 있으면서 커피를 한 잔씩 마시는 동안 비명이나 고함, 혹은 소방서의 증원 병력이 도착하는 소리 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적당히 안심하고, 액뗌을 했으니 복권을 사면 좋겠다는 비과학적인 판단에 따라 복권방에 갔다. 그러나 아직 열지 않았기에 돌아서야 했다. 복권방 아저씨는 대목을 놓친 셈인데, 하기야 복권방을 용한 점쟁이가 하는 것도 아니니 모두의 팔자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 동 앞으로 돌아오니 대피를 나왔던 사람들 모두 사라지고, 아무일도 없었던 듯하게 모든 것이 고요했다. 직원이나 소방대원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거나 상황을 촬영하지도 않았고, 안내를 하는 사람도 안내문도 없었다. 모든 것이 꿈 같았다. 오로지 매캐한 냄새만이 남아서 화재가 현실속에 일어난 사고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쨌든 별일 없이 집에 돌아와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복도에서도 탄내가 계속 나는 걸 보아하니 집안도 정상은 아닐 게 분명해서 공기청정기를 켜봤는데, 거실이 200, 내 방이 300 정도로 엄청난 미세먼지 수치가 나왔다. 당장 최고 속도로 가동하고 환기하면서 집안의 어지간한 부분은 다 털거나 닦아내야 했다. 그 많은 작업을 하루에 다 하는 경우가 좀처럼 없는데, 먼지도 털고 걸레질도 하고 침대도 침구 청소기로 털고 식탁도 닦아내야 했다. 예상대로 매끈한 표면을 닦은 걸레와 휴지는 그을음 같은 것이 묻어났다. 게다가 가만 보니 내 마스크도 제법 거뭇한 편이었다. 맙소사. 마스크를 버리고 코를 풀어보니 점액이 거무스름했다. 대피할 때 일단 손에 닿는대로 항상 쓰던 덴탈 마스크를 쓰고 나갔는데, 다른 것 챙길 틈에 더 좋은 마스크를 써야 했다.


결국 코를 헹구고, 샤워하고 잡다한 정리를 좀 더 했다. 그러자니 TTS 방송으로, 감식 결과 지하 창고에서 합선으로 불이 난 것 같다며, 건강에 이상이 있는 주민은 연락을 해달라는 안내가 들렸다. 퍽이나 안심이 되는 소리군. 환기를 하고 청소를 꼼꼼히 해보라는 말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장담하건대, 이런 사태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매뉴얼이 있다 하더라도 사후처리 방법까지 꼼꼼이 적혀있진 않을 것이다. 사건사고 대처에 능숙한 사람은 훈련받은 사람뿐이니까.


그건 그렇고 있었던 일을 정리하며 알게 된 것인데, 우리가 대피 요령에서 지킨 점이라곤 계단을 이용한 것 하나밖에 없었다. 문밖 상황을 주의해서 현관문 문고리를 조심해서 잡아본 것도 아니고, 젖은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지도, 자세를 낮추지도 않았다. 심심한 방송을 듣고 나와서 연기만 좀 봤을 뿐이니 그럴 법도 했지만 떠올린 게 별로 없다는 게 아무래도 부끄럽다. 아버지가 전직 소방관이라 어린이 소방수첩 따위를 열심히 보고 자랐는데 이 모양이라니. 이럴 때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려주는 음성 비서나 앱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니, 불이 심각한 수준이었고, 내가 혼자 살았으며, 몸도 좋지 않았다면 죽었어도 이상할 게 없구나 싶기도 했다. 귀와 코가 안 좋았다면 불 난 것을 오래도록 몰랐을 테고, 다리가 안 좋았다면 대피하질 못했으리라. 사람 가는 데에 예고도 순서도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한편으로 받을 수 있는 예고는 받고 피하려고 법규와 지침과 수칙들이 있는 것인데 대체로 지켜지지도 않고 몸에 익지도 않으며 이에 책임지는 이도 없는 것 같다. 아무튼 이 글을 그간 읽어주신 분들께 새삼 감사드리고, 부디 별일도 후회도 없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2023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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