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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Feb 22. 2023

울트라 와이드 모니터를 위한 OTT는 없다


당근마켓이 널리 알려지기 전에는 좋은 제품을 싼 값에 사기가 지금보다 더 쉬웠다. 파는 사람에 비해 사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단순히 생각할 수 있을까? 아무튼 제법 오래도록 쓴 27인치 모니터도 그렇게 싸게 구한 물건이었는데, 최근에 또 당근마켓에서 괜찮아 보이는 매물이 있기에 29인치 울트라 와이드 모니터를 사고 말았다. 27인치에서 29인치로 근소하게 업그레이드하면 세로로는 5센티 정도가 줄어들고 가로로는 7센티 정도가 늘어나니까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교환이라고 생각한 탓이다. 게다가 요즘은 심신을 안정시키는 야밤의 취미 활동으로 영화 감상이 특히 보람있고 좋다는 생각을 한 터라 21대 9의 화면 비율은 꼭 써보고 싶은 환경이었다.


그리하여 산책중에 곱아드는 손으로 메시지를 보내서 약속을 잡고, 저녁을 먹고, 잠시 후에 롱패딩을 입고, 약속 장소로 20분쯤 걸어갔다. 판매자는 당연히 차를 타고 오냐고 물었는데 아버지 차를 빌려 쓸 실력도 되지 않는 데다가 거리도 애매했으므로 걷는게 최선이었다. 게다가 운동한다고 일부러 산을 걸어다니면서 정작 이동의 또렷한 목적이 있을 때는 걷지 않겠다는 건 이율배반이 아닌가.


세 블록쯤 건너가서 모 중학교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15분쯤 남았다. 걷는 시간을 너무 길게 잡고 움직인 탓이다. 나는 고민하다, 좀 더 걸으면 한강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아파트 단지 사이를 지나 강가로 갔다. 길이 공사로 막혀서 한강을 가까이서 볼 수는 없었다. 잠시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야경이 과히 나쁘진 않았다. 산책하는 아주머니들 옆에서 한강 사진을 찍고 약속 장소로 돌아갔다. 5분이 남았다. 나는 무인 과자점에서 꼬북칩을 사고 판매자에게 연락했다.


잠시 후 모니터를 들고 나온 것은 판매자의 남편인 듯싶었다. 모니터는 가운데만 뽁뽁이와 테이프로 감아서 손잡이를 만든 상태였다. 모니터 전면을 하다못해 신문지로 덮어줘야 하는게 아닐까 싶었지만, 중고 거래에선 어떤 배려를 바라는 쪽이 잘못이다. 내가 가져간 뽁뽁이로 감아서 커다란 다이소 쇼핑백에 넣은 다음 10만 원을 송금하고 집에 돌아왔다.


귀가길은 상당히 힘들었다. 5킬로쯤 되는 물건을 불안정하게 이 손으로 들었다 저 손으로 들었다하며 고군분투해야 했다. 더 큰 가방을 챙겼어야 하는데 실수였다. 결국은 품에 안듯 양손으로 들고 왔는데, 취급 주의 품목을 신경 써서 나르자니 땀이 줄줄 흘렀다.


어찌저찌 집에 돌아와서 모니터암에 설치된 기존 모니터를 뽑아내고 새 모니터를 설치해서 시험해보니 별 문제는 없었다. 넷플릭스에서 펄프픽션을 틀어보니 화면을 꽉 채우는 영상의 만족감이 상당했다. 오늘도 훌륭한 물건을 적당한 값에 잘 샀군, 하고 자화자찬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앞으로는 영화를 더 즐겁게 볼 수 있겠구나…… 라는 게 나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나의 착각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는 바로 다음날 알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영화를 틀어보니 16대 9 비율로 제작되어 좌우로 여백이 엄청나게 남았던 것이다. 과장하면 한 20년 전에 쓰던 모니터로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원인은 너무나 간단하고 당연했다. 16대 9 비율로 만들어진 영상을 21대 9 화면에 맞추니 좌우가 한참 남는 게 정상 아니겠는가. 세로가 5센티 줄어드는 것만 각오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16:9 비율에서 세로가 5센티 줄면 가로는 7센티쯤 줄어든다는 것도 계산했어야 한다.


왜 이렇게 단순한 것도 떠올리지 못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유가 없진 않았다. 요즘 나는 어지간해선 뭐든 아이패드로 보고 있는지라 화면의 비율이나 크기에 대해서 상당히 무감각한 상태였다. 딱히 뇌를 쓰지 않고 틀면 나오는 대로 보는 셈이었다. 게다가 모니터를 사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21:9 비율이었기에 ‘위아래도 꽉 차는 와이드 모니터면 참 좋겠구나’라는 욕망에 눈이 멀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앞으로는 영화를 많이 볼 작정이고 16대 9 비율 영화는 많지 않을 테니까 그럭저럭 써야지 뭐, 하고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이것저것 재생해보곤 16대 9 비율 영화가 상상 이상으로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영화라고 무조건 가로로 긴 게 아니었다. 그걸 이제 알다니, 어디 가서 영화 좋아한다고 말하면 안 될 모양이다.


게다가 애초에 TV 화면을 겨냥하고 만들어진 콘텐츠, 드라마나 애니메이션 등은 당연하게도 16대 9였다. 그게 절대적인 기본값이었다. 이건 그냥 미리 생각하지 못한 내가 바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새 모니터를 다시 팔아버리고 헌 모니터를 쓸까 고민하기도 했는데…… 추위를 뚫고 직접 가져온 고생이 허사가 되는 게 싫기도 했고, 조정 키가 영 먹지 않아 뭐 좀 하려면 온갖 고생을 해야 하는 헌 모니터를 다시 쓰기가 지겹기도 해서 모든 것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좀 익숙해지니 16대 9의 약간 작은 화면이 그리 큰 손해로 느껴지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그동안 보고 싶어서 벼르고 있던 탑 건: 매버릭을 네이버 시리즈온으로 틀어보자마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탑 건: 매버릭은 21대 9 비율로 만들어진 영화인데 상하좌우 모든 부분에 검은 여백이 추가되어 아주 작은 화면으로 나왔던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경우인가 싶어 알아보니,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16대 9 비율의 화면에 맞추어 영상 위아래에 여백을 추가해서 만든 콘텐츠가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송출이나 재생 환경에 따라 21대 9 영상을 틀었을 때 영상을 위아래로 늘려서 TV화면에 맞춰버리는 현상을 방지하려는 목적이 아닐까 싶은데, 이런 식으로 원본 영상에 손을 대서 다수에게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원천 봉쇄하는 게 맞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비율 문제가 일어났을 때 사용자가 TV 화면을 조정하여 보도록 하는 게 맞는 것인지 나로서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TV화면에서 그런 설정 조정이 가능하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많기도 하고, 그런 조정이 불가능한 제품도 많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영상에 손을 대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나처럼 울트라 와이드 모니터를 쓰는 사람을 생각하면 원본 영상을 이 모양으로 만드는 게 어불성설인 것 같기도 하다. 일단 우리집 TV에는 화면을 위아래로 줄이는 기능이 있지만, 울트라와이드 모니터에 조그만 화면을 확대하는 기능은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네이버에 멀쩡한 영화를 내놓으라고 따질 수는 없는 일이고, 공짜로 보는 것도 아닌 탑 건을 고생해서 산 모니터로 작게 본다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 해결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영화를 다운로드한 다음, 화면 확대가 가능한 플레이어로 재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쩌나, 나는 맥북을 쓰고 있어서 시리즈온에서 다운로드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가상머신을 써서 윈도우즈를 맥 OS 안에서 따로 구동한 다음, 거기서 다운로드하는 수밖에. 한국에선 윈도우즈 없이 살아간다는 게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 다른 맥 유저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가상머신 체제는 이미 구축해둔 터였다. 그래서 그것만으로 화가 나진 않았다. 그런데 기껏 다운받아보니, 재생이 되지 않았다. 가상머신 구동을 감지하는 듯했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복제하는 것을 우려한 조치이리라. 나는 심호흡을 하고 가상머신 감지를 피하는 방법을 한참 찾아봤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그제야 한국에서 매킨토시를 씀으로써 정상 범주에서 벗어난 자가 울트라와이드 모니터라는 마니악한 물건을 쓴다는 게 얼마나 더 심각하게 마이너한 길에 들어가는 짓거리인지를 깨달았다. 평범하지 않은 자로 살면서 불편을 느끼지 않으려면 비범하게 돈이 많아야 하는데, 내가 너무 주제 파악을 못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영화 본다고 산 모니터로 보고 싶던 영화도 못 보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나는 검색을 거듭한 끝에, 일본 블로그에서 해결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일본어를 전공한 보람이 있는 순간이었다. 방법은 몹시 간단했다. 그 유저가 만든 자바 스크립트를 즐겨찾기로 등록하고 실행하면 그만이었다. 그것만으로 영상이 모니터에 딱 맞게 확대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행복감에 젖은 채 탑 건: 매버릭을 감상할 수 있었다. 재미있어서 세 번을 보았다. 앞으로는 울트라 와이드 모니터를 쓰면서도 그리 고통스러울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물론, 그건 착각이었다.


(크고 평범한 모니터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환경 조성이다)


매버릭을 보고 며칠 후, 넷플릭스에서 ‘문 폴’을 재생한 나는 눈을 의심했다. 이것도 위아래에 여백이 들어간 상태였다. 이런 짓거리는 네이버 같은 곳에서나 하는 줄 알았는데 전세계적으로 드물지 않은 작태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줄 알았던 자바 스크립트도 먹히지 않았다. 만든 사람은 어디서나 잘 된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다른 방법을 새로이 찾아야 했다.


다시 검색해서 찾아낸 방법은 맥북의 기본 브라우저인 사파리에서 특정 스타일 시트를 적용하는 것이었다. 원하는 대로 폰트 등 웹페이지 모양을 바꾸는 방법인데, 서양권의 누가 유튜브로 소개한 것을 국내 커뮤니티인 클리앙 유저가 약간 변형한 게 있었다. 나와 사양이 똑같아서 그거면 해결되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이게 아무 반응도 없었고,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모든 문제가 그렇지만 이유를 모르면 적절한 대처도 불가능하다. 나는 이를 갈다 다음 방법으로 넘어갔다.


다음 방법은 앱스토어에서 사파리 익스텐션을 추가하는 것. 즉, 사파리에 영상을 확대하는 추가 기능을 넣어주는 방법이었는데, 이것도 실패였다. 반응이 없어 홈페이지에 가보니 최근 업데이트로 막혔다고 적혀 있었다. 대체 영상 확대가 무슨 문제를 일으킨다고 이렇게 된 것일까.


그 다음은 엣지 브라우저에서 익스텐션을 쓰는 것이었다. 나와 같은 문제를 겪는 윈도우즈 유저들이 대체로 선택하는 방법이었으므로 믿을 수 있었는데, 문제는 내가 맥북을 쓰고 있고, 맥에서 넷플릭스 화질을 고화질로 보려면 사파리를 써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가상머신으로 윈도우즈를 실행해서 엣지를 써야 했다. 윈도우즈에선 엣지나 넷플릭스 앱을 써야만 고화질이 지원되기 때문이다. 가상머신을 돌리면 당연히 성능 저하를 감수해야 하지만, 일단 풀스크린으로 돌아가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엣지에서 실험해도 고화질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시도는 할 필요도 없었다. 저화질을 풀스크린으로 봐서 뭐하겠는가. 그래서 이번에는 넷플릭스 앱을 깔고, 윈도우즈를 태블릿 모드로 전환한 뒤에야 나오는 풀스크린 강제 모드를 실험해봤는데, 역시 고화질이 아니었다. 이것도 아마 가상머신을 감지한 탓이 아닌가 싶다.


가상머신이 이렇게 큰 죄였다니. 물론 맥으로도 가상머신을 쓰지 않고 윈도우즈를 돌릴 방법은 있다. 저장 공간을 나눈 다음 윈도우즈를 설치해서 그쪽으로 부팅하면 맥북 한 대로 두 가지 운영체제를 사용할 수 있긴 하다. 그러나 지금도 모자란 저장 공간에서 60기가 이상을 확보하고, 포맷하고, 윈도우즈를 설치한 뒤, 각종 드라이버를 설정한다는 과정은…… 아무래도 가고 싶은 길이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되는 꼴을 확인이라도 하고 싶었던지라, 예전에 윈도우즈를 깔아놓은 맥북 에어를 꺼낸다는 방법을 택했다. 만약 성공한다면 넷플릭스에서 화면비가 엉망이 된 작품을 볼 때마다 맥북 에어를 꺼낸다는 선택지도 고려할 만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를 비웃듯, 넷플릭스는 고화질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쯤되면 넷플릭스가 나를 블랙리스트에 올려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시험한 게, 브라우저 엔진 다양성의 마지막 보루라 불리는, 파이어폭스와 익스텐션을 쓰는 것이었다. 파이어폭스는 유용한 익스텐션을 다양하게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여기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다만 여기선 두 가지 기적이 일어나야 했다. 기적 1. 파이어폭스에서 넷플릭스를 고화질로 내보내는 익스텐션이 정상 작동한다. 기적 2. 화면을 확대해서 21대 9 비율에 맞추는 익스텐션이 정상 작동한다. 문제는 작년에 이미 고화질 지원 익스텐션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낙담한 적이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애초에 파이어폭스부터 시도하지 않고 번거롭게 윈도우즈를 돌린 것도 그 때문이었는데, 상황이 바뀌어 있길 기도해야 했다.


그래서 결과는…… 성공이었다. 두 가지 기적이 실현되어, 문 폴은 고화질로 21:9의 화면을 꽉 채워 재생되었다. 영화 자체는 상상 이상으로 엉망진창이었지만, 모니터를 정상적으로 써먹을 수 있게 된 기쁨 때문인지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아무튼 악몽 같은 고군분투를 겪으며 내가 배운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구매를 충동적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위에 적었듯, 평범하지 않으면서 불편 없이 살려면 비범하게 돈이 많아야 한다는 것. 미루어 하는 짐작이지만, 파이어폭스에서 고화질 재생을 강제하는 방법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오래지 않아 막힐 확률이 높다. 그러면 나는 또 세상의 불합리함에 한탄하게 될 텐데, 그런 날이 오면 그냥 무슨 영화가 되었든간에 아이패드로 보면서 16대 9 모니터를 중고로 살 궁리를 하게 될 것이다. 맥북을 주 기기로 쓰는 것도 그만둘까 싶다. 영화 때문만이 아니다. 남들 많이 쓰는 것을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겪을 불편이 앞으로도 줄곧 끊임없이 밀려들 텐데, 그것을 간편히 해결할 돈도, 스트레스를 견딜 체력도 없고, 평범하지 않은 환경을 유지함으로써 내가 얻을 이익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비주류의 삶에 다가오고 말 고통의 시간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게 낫다는 슬픈 교훈을 전하는 동시에, 맥으로 울트라 와이드 모니터를 쓰는 유저들에게 힘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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