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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r 09. 2023

요즘 신경 쓰는 말들

필요에 따라 적절한 단어를 골라서 쓰는 일로 돈을 버는 사람, 즉, 작가나 번역가 같은 사람은 언어 생활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해왔다. 나 자신도 그럴 뿐더러 주변에서 언어 관련 일을 하는 친구들도 대체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쓰는 연장의 모양과 기능이 자꾸 바뀌는 것을 반기는 기술자는 적을 테니 자연스러운 경향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그런 경향이 있다고 단정짓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어적인 기술면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존경을 받는 작가들도 남에게 험악한 비속어를 아무렇지 않게 쓰는 모습을 본 탓이다. 비속어를 작품에 쓰는 거야 자기 작품이니 자기 마음이지만, 내가 본 것은 커뮤니티에서 덧글로 남긴 말이라 충격이 컸다. 영어권에서 어쩔 수 없이 욕설을 언급해야 할 때 ‘F워드’라고 표현하는 것 비슷하게 쌍욕이 인터넷에서 ‘약간 변형된’ 단어를 쓰긴 했지만,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충격이었다. 별로 좋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해서 다른 말을 고를 거라면 그냥 비속어와 아무 관련이 없는 단어를 쓰면 될 게 아닌가.


언어와는 별 관련이 없는 과였던 후배 하나도 나와 무슨 얘기를 할 때 비속어를 아주 조심스럽게 억양을 억눌러가며 사용한 적이 있는데, 그때 떠올린 생각도 비슷했다. 그렇게 주의를 기울일 정신이 있으면 다른 단어를 쓰란 말이다.


양식 있는 두 사람이 그런 말을 굳이 쓰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봤는데, 세 가지 정도가 주요할 것 같다. 일단 그 자리가 유행하는 비속어를 써도 되는 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그 생각이 맞긴 하니 어쩔 수 없긴 하다. 하지만 어지간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비속어를 쓰는 게 무례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줬으면 한다.


두 번째 이유는, 자신이 어떤 표현을 강력하게 하고 싶은데, 강도가 적당히 세면서 밋밋하지 않은 말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구를 강력하게 욕하고 싶을 때 욕설을 고르고, 분노의 표현을 더 강화하고 싶다면 욕설의 앞뒤로 ‘미친’, ‘개’, ‘상’, ‘새끼’ 등등을 붙이는 게 일반적인데, 근래에 들어서는 신종 비속어를 가져오는 일이 흔해진 것 같다. 상품의 품질이 값에 미치지 못할 때 ‘바가지’라거나 ‘도둑놈들’이라고 하던 게 요즘은 도시락 이름으로 표현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유행 표현의 사용은 해당 표현을 사용하는 ‘재미있는’ 집단에 소속된 안정감과, 자신을 ‘재미없는’ 타집단과 차별화하는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서 평범한 표현을 찾기도 쉽지 않고, 강력하면서 창의적인 표현을 쓰기는 더 어렵다. 


거기서 세 번째 이유로 이어진다. 유행하는 말을 쓰기도 쉽고 거기서 얻는 이점도 확실하니 계속 쓰는 게 당연해지고, 자연히 입에 붙어 언어습관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입에 붙은 말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경우엔 자기 언어 습관 때문에 큰 손해를 봐야 겨우 해결이 될까말까인데, 내가 경험한 바로는 누가 지적해줘서 습관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이상한 습관을 이미 다 고쳐서 지적받을 일이 별로 없고, 반대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는다. 아무튼 사용하는 언어가 사람의 성격과 태도까지 바꿔버리는 법이라고 확신하진 않지만, 성인군자라도 쌍욕을 하는 동안은 천박하게 보이는 게 당연한 이치다. 재미있는 표현은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집단 안에서만 하자.


그런데 요즘 들어선 아무리 학식이 높고 똑똑한 사람이라도 그런 집단 구분을 잘 하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즐기는 문화를 모두가 즐기는 문화로 당연시한다. 이게 얼마나 심한가 하면, 심지어 방송 자막을 보다가도 어이가 없어질 때가 많다. ‘귀르가즘’이나 ‘집착광공’이라는 단어를 시청자 모두가 알 거라고 생각하고 넣는 것인지, 자식이 그게 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생각인지 담당 PD에게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가 사는 세계와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주변에서 알아듣지 못하거나 알아도 도저히 받아줄 수 없는 농담이 흘러나오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는데, 나와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만 모인 인터넷 커뮤니티의 교류가 다양한 사람들과의 실제 교류보다 많아진 부작용이 아닌가 싶다. 인터넷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을 연결하면 다양한 의견이 존중받고 교류되는 사회가 만들어질 거라고 예상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역시 만사 낙관적으로 흘러가진 않는 모양이다.


(어디서 주워들은 재미난 말이 누구에게나 통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나저나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과연 나는 단어의 뜻을 제대로 알고 상황에 맞게 적절히 쓰고 있나 싶은 걱정이 들어 국어 사전을 찾아볼때가 많아졌는데, 그 덕분에 주변에서 흔히 잘못 쓰는 표현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록 국립국어원에서나 다룰 만한 얘기들이지만 나도 몇 가지 정리해 본다.


내로남불: 일단 정치권에서 매일 보는 단어인 내로남불은 그럴듯한 사자성어처럼 써먹고 있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의 약어다. 이 단어를 접할 만한 사람 중에 뜻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언론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반복해서 쓸 말은 아닌 듯하다. ‘계란’은 집요하게 ‘달걀’로 바꿔놓으면서 내로남불은 즐겨쓰는 건 좀 이상한 처사다. 그런데 저 말이 나오기 전엔 대체 무슨 단어를 썼을까? 찾아보니 진짜 사자성어로는 ‘아시타비’라고 어떻게 봐도 일본어 같은 말이 있긴 한데, 실제로 자주 사용된 말은 ‘이중잣대’였다. 알기 쉬운 우리말이다.


겠어서: 요 몇 년 사이에 아무렇지 않게 쓰게 된 표현이다. ‘잘 모르겠어서 물어봤어요’라는 식으로 쓴다. 심하면 ‘잘 모르겠었어서’라는 식으로도 쓴다. 이 표현이 퍼지기 시작한 2014년쯤에는 출판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뭐? 누가 그런 이상한 말을 써?”라는 반응이 돌아왔는데, 요즘은 별로 신경 쓰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왜 이게 이상할까? 찾아보니 어서/아서는 았/겠 뒤에 올 수 없단다. 문법이 그렇다. 다만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이 다들 그런 규칙을 지키고 살아서 문법으로 정리한 것이지, 한국인들이 문법으로 정리된 것을 보고 말을 배우는 게 아니라서 나중에는 문법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나같은 국어적 보수주의자만 고통받겠지.


하릴없이: ‘할 일 없이’의 예스럽고 멋진 표현이 아니라 ‘달리 어쩔 도리가 없이’라는 뜻이 있다. 그런데 발음이 비슷한 탓에 틀리는 사람이 앞으로도 영원히 생길 것 같다.


긴하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라면서 으슥한 곳에서 따로 대화하는 장면을 쉽게 떠올릴 수 있어서 ‘긴하다’라는 말에 ‘은밀히’라는 뜻이 있을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그런 뜻은 전혀 없고, 실제 뜻은 ‘매우 간절히’였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단둘이 남을 필요는 없었다.


호젓하다: 예전에 산책하고 있다는 얘기를 SNS에 올렸다가 호젓하니 좋다는 반응이 돌아온 적이 있다. 탁 트여있으면서 조용해서 좋다는 뜻으로 이해했다가, 나도 그냥 어감만으로 아는 척하는 단어임을 깨닫고 사전을 찾아봤다. 원뜻은 ‘후미져서 무서움을 느낄 만큼 고요하다’로, 별로 긍정적이라고 할 순 없었다. 


소정: ‘소정의 상품’이라는 꼴로 자주 보는데, 이런 경우 대체로 10만원 이하의 상품을 대충 아무거나 준다. 추첨으로 포르쉐 스포츠카 따위를 주면서 소정의 상품이라고 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그래서 ‘약소한’ 상품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으나, 찾아보니 소정이란 그냥 ‘정해진 바’라는 뜻이었다. 미리 정한 대로 준다는 말이니 포르쉐든 콩 한쪽이든 소정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러려면 원래 어떻게 정했는지 고지해야 맞을 것이다.


건승: 글쓰기나 어려운 승부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서로 흔히 쓰는 표현이다. 굳건히 잘 해내고 성공하거나 승리하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도 뜻을 본 적이 없다 싶어 찾아보니, 그냥 건강하라는 뜻이었다. 나도 멋있게 따라 써볼 만한 인사였는데, 정작 뜻도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오싹해진다.


텐션: 일본어 전공자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데, 이건 일본어다. 10여년 전에는 일본어를 일상적으로 접하는 사람들만 일본어가 언어 습관에 섞이는 바람에 쓰는 단어였다. 나도 무심코 친구에게 사용했다가, ‘그게 뭔데?’라는 질문을 받아서 정확히 기억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방송가에 유입되더니 너도나도 텐션이 높다는둥 낮다는둥 하게 되어서, 볼 때마다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텐션이 높다, 낮다 대신에 기분이 ‘고조되다, 저조하다’라는 우리말을 쓰자고 하면 너무 국립국어원 같고, 텐션이라는 말을 쓰기 전에 쓰던 ‘업되다, 다운되다’를 쓰자고 하면 그건 뭐 우리말이라 써도 되는 거냐는 소리를 듣기 딱 좋아서 어디 항의하진 않는데, 아무튼 서브컬처 언어 습관이 어떻게 대중화되는지 보여주는 예시로 생각할 만하다.

그나저나 어쩌다 텐션이 기분이나 분위기를 뜻하는 말이 되었을까? 찾아보니 일본에서도 왜 영어의 원뜻과 무관하게 쓰냐고 의문을 갖는 사람이 제법 되는데, 꾸밈음이 많이 들어간 기타의 코드인 ‘텐션 코드’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기타리스트나 쓸 말이 어쩌다 그 정도로 대중적인 표현이 되었는지 구체적인 자초지종은 모르겠는데, 한국에서도 ‘걔랑 코드가 잘 맞아’ 같은 표현이 생겨났던 것을 떠올려보면 뜻밖에도 음악 용어가 대중화되는 경우들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이성: 표현이 시대에 뒤쳐지고 있는데 지적하는 사람을 못 봐서 내가 해본다. 흔히 ‘그 사람을 언제부터 이성으로 느끼게 되었나요?’라는 식으로, 성별이 다름을 인식한 것을 연애 감정의 발생과 동일하게 여기고 표현에 사용하는데, 나는 심리 상담에서 그런 표현을 들었다가, 게이나 레즈비언이 상담을 받으러 왔을 때는 사용할 수 없을 표현이겠구나 싶어 단어가 시대에 뒤쳐졌음을 깨달았다. 내가 게이라면 저런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변환해서 듣다가도 어느날 한 번씩은 짜증이 치밀 것 같다.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그런 표현 쓰지 말라고까진 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만 쓰기로 작정했다.



점점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글이 되어가는데, 무슨 표현을 할 때 처음 듣거나 쓰는 표현이면 의심을 해봤으면 좋겠다는 말로 마치려 한다. 이게 정확한 표현인지, 상황에 맞는지, 듣는 사람이 이해할지 의심하고 사용하면 이 세상의 갈등과 혼란도 조금 줄어들지 않을까…….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 – Daum 검색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리며, 책 속의 세 부분을 남깁니다.






버림받은 물건이나 버려질 때가 된 물건을 쓴다는 행위는 대개 이런 식이다. 같은 시간에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새것을 사서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편이 합리적일 때가 많다. 그런데도 이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첫째가 돈이 불충분하기 때문이고, 둘째가 사람이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남이 발견하지 못한 가치를 알아보았을 때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타인과 식사를 할 때면 아무래도 부끄러워진다. 혼자서만 메뉴판에서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저렴한 음식을 찾는 것 같아 쓸쓸하기도 하고, 성인으로서 온당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 같아 괴롭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충분히 노력했으니 자신이 가끔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호캉스를 긍정하려는 이유는 그게 합당하고, 자격을 따져선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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