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Mar 22. 2023

스케이트장의 고독과 고통



2월 중에 스케이트를 타러 간 적이 있다. 스케이트를 즐기는 후배 한 명이 서울시의 모 호텔에서 스케이트를 타봤더니 썩 좋았다며 갈 사람들을 모은 게 계기였는데, 나를 비롯해서 자주 보는 친구들 대부분이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활동을 할 일이 좀처럼 없는지라, 이번 기회에 그런 스포츠의 맛을 쬐끔만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심산으로 팀을 꾸린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재미가 있든 없든간에 수필 한 편 분량의 이야깃거리는 생기겠거니 싶기도 했고.


그리하여 우리 팀 네 명은 한강진에서 만났다. 날씨가 흐려서 대단히 걱정이었는데 불행중 다행으로 비는 내리지 않았다. 다만 약속 장소가 문제였다.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그 동네는 번화가라고 할 만한 곳이긴 했으나, 찾는 사람들의 숫자에 비해 카페의 수가 너무 적어서 어딜 가도 자리가 없었다. 그럴듯한 대형 카페든 소형 카페든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 자리를 찾느라 헤매다 보니 내 방보다 넓은 대형 카페의 화장실에 자리잡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한참을 헤매다 결과적으로는 대로 뒤쪽 골목에 자리한 유명 카페의 야외석에 앉아 모두가 모이길 기다리며 커피도 마시고 잡담도 하게 되었다. 초미세먼지 수치가 130쯤 되어 야외석에 앉기는 정말로 싫었지만, 선택지가 없으니 가려 앉을 수가 없었다. 사실 초미세먼지만 머릿속에서 걷어내고 나면 나쁘지 않은 자리였다.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잡담을 나누고, 예정된 시간에 모두가 모여 호텔로 갔다. 내가 방문할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그 호텔은 으리으리하다기보단 넓으면서도 전반적으로 차분했다. 흐린 날씨의 탓도 있었겠지만, 원래 로비를 별로 밝지 않게 유지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은 듯했다. 호그와트 같은 고성의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길목 같은  분위기였다. 공기에선 옅은 향기도 감돌았는데, 제법 마음에 들었다.


지하에 내려가니 수영장과 스케이트장으로 이어지는 길목 앞에 접수처가 있었다. 원래 스케이트를 타는 친구 외에는 스케이트 대여비가 포함된 이용권을 사야 했기에 거금이 들었다. 그 정도를 거금이라고 표현하는 나 같은 사람은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작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뭐가 비싸다는 불평을 품격있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법은 좀처럼 찾기 힘든 법이다.


대여권을 사서 안으로 들어갔다. 길목에서 곧바로 실내 수영장과 실외 스케이트장이 보였다. 헬스장도 보였다. 사람들은 제각각 쾌적한 공간에서 몸을 쓰는 행위를 즐기고 있었는데, 가치 판단을 하기 이전에 아주 신기해 보였다. 이 사람들은 다 어떤 연유로 서울 한복판의 호텔에서 스포츠를 즐기고 있는 것일까? 나 같은 사람도 있기야 하겠지만, 호캉스를 제외하면 대체로 상상이 가지 않았다.


스케이트 대여는 스케이트장 옆의, 건물 끄트머리에서 할 수 있었다. 신발 사이즈를 말하니 직원들이 적당한 스케이트를 가져다주고, 내가 신던 신발은 빼앗아갔다. 스케이트를 타다가 목이 말라서 마실 것을 사려 해도, 화장실을 가려 해도, 하키 마스크를 쓴 살인마가 쫓아와도 스케이트를 신고 다녀야 한다는 뜻이었다. 물론, 맨발로 다니면 엉덩이를 걷어차서 쫓아낸다는 경고를 들은 것은 아니지만, 칼날이 달린 신발을 신고 비틀거리는 사람이 여기저기 있는 시설에서 맨발로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튼 스케이트를 신는 것은 대충 17년만이었다. 나는 그 사이에 소재공학의 발전에 힘입어 스케이트도 좀 더 편해졌기를 기대했으나, 전혀 그렇지 못했다. 눈곱만큼도 발전한 부분이 없었다. 폴리우레탄이나 라텍스 따위가 부드럽게 발을 감싸주는 게 아닐까 미약한 기대를 품었던 나는 갑옷 같은 스케이트화의 끈을 당겨 조이다 약간 우울해졌다. 워커만 신어도 발이 피곤해지는 내가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어찌저찌 스케이트를 착용한 우리는 짐을 유료 사물함에 몰아 넣었다. 두 친구의 옷주머니가 잠글 수 없는 모양이라서 스마트폰을 사물함에 넣을까 말까 고민하기에, 나와 다른 친구 한 명이 맡아주기로 했다. 스마트폰을 사물함에 넣어버렸다간 스마트폰으로 연락을 취할 일이 생기는 순간 보관료가 나가는 구조니까 어쩔 수 없었다. 그럭저럭 주머니가 많은 옷을 입고 오길 잘했다 싶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스케이트장에 들어갔다. 당연히 휘청대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벽 가까이서 넘어지지 않는 것만을 목표로 하니 넘어지진 않을 수 있었다. 다리는 어깨보다 약간 넓게 벌리고, 자세는 최대한 낮추는 식으로.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스케이트를 그런 식으로 타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다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한점 없는 사람들처럼 멋지게 허리를 펴고 은반 위를 미끄러졌다. 요즘은 다들 스케이트 정도는 기본 교양으로 배우고 사는 것인지, 아니면 그 정도로 안정적인 수준이 되기 전에는 호텔 스케이트장에 방문하지 않는 게 일반적인 판단인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예외도 있긴 했다. 일단 아동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스케이트장 바깥에 놓여 있는 보행기 같은 도구를 짚고 밀면서 안전하게 스케이트를 탔다. 그것을 본 후배 한 명도 한동안 그 도구를 짚고 다녔는데, 덥다고 외투를 벗자마자 안전 요원이 와서 성인은 쓰면 안 된다고 빼앗아갔다. 그냥 우연히 그때 눈에 띈 것인지, 아니면 곰인형을 모티브로 디자인된 외투가 나이를 어려보이게 만들었던 탓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아이들 쓸 물건을 어른이 쓰지 못하게 제한하는 이유는 이해하겠으나, 실력이 부족한 어른이 길게 넘어져 충돌 사고를 유발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싶어 감정이 좀 상했다.


그래도 다행히 보조 도구를 짚고 다니는 동안 요령이 붙은 후배는 그 이후로 두 발로 잘 타고 다녔다. 그때쯤에는 나도 허리를 좀 더 펼 수 있었다. 넘어질 위기가 몇 번 찾아오긴 했지만, 스케이트장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은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기보다는 벗어날 수 없었다는 쪽이 더 정확하겠다. 나는 넘어지는 게 무서웠다. 익숙하지 않으면 실수도 하고 넘어질 수도 있다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된다고들 쉽게 말하지만, 넘어지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부끄럽고 무서워지는 법이다. 스케이트든 뭐든 마찬가지다. 넘어지면 아프고, 아프면 일상을 영위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어깨 통증에 시달리고 있는 나로서는 오래 갈 수 있는 고통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은반 위의 자유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좀 미끄러지다 벽에 기대어 쉬길 반복하자니 정빙 시간이 와서 모두가 밖으로 나갔다. 나는 화장실에 한 번 다녀왔는데, 도통 어디로 가면 좋을지 알 수 없어서 스케이트를 신은 채로 비척거리며 두리번거려야 했고, 화장실을 찾은 뒤에는 벽을 짚어가며 걸어가서 일을 봐야 했다. 이게 호텔에서 상정한 범위 안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화장실이 묘하게 좁았는데, 일부러 벽을 짚고 다니라고 그렇게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정빙이 끝나길 기다리며 저녁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고, 사진을 찍었다. 즐겁긴 했지만, 슬슬 지친다는 생각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정서적으로는 그럭저럭 만족했지만 발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나는 다리가 O자로 크게 휘어 있어서 그런지 발목이 심하게 짓눌리는 것 같았다. 무슨 보호대든 더 가져올 것을, 괜히 민망하다는 생각에 챙기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그런 물건은 개인이 지참하는 게 맞긴 하겠으나, 호텔측에서 유상으로 대여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정빙이 끝난 빙판은 정빙 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어디를 어떻게 미끄러져도 드르륵댔던 전에 비하면 은쟁반 위를 미끄러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전까지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백인 소년들이 얼음 가루를 뭉쳐서 던지고 노는 꼴이 자주 보였는데, 그 마귀놈들도 얌전해진 듯싶었다. 발목의 피로만 빼놓고 보면 약간 더 즐길 만했다. 스케이트장 둘레의 나무에 설치한 조명도 어둠 속에서 아름답게 빛났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코스에서 좀 떨어진 구석에선 실력자들이 회전이나 점프를 하며 놀았다. 그들중에는 초등학교 저학년생으로 보이는 소녀도 있었는데, 너무나 능숙하고 자유로워서 마치 날 때부터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스케이트란 원할 때 아무데서나 연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능숙해진 뒤에도 보기 좋게 시연하거나 일상속에서 이용할 수 없는 능력인데 어떤 연유로 저렇게 어릴 때부터 잘 배운 것인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스포츠니까 건강과 즐거움 이외의 목적을 찾는 게 바보 같은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릴 때 악기와 공부 말고 뭘 배운 적이 없는 나로서는 아렌델의 공주를 보는 듯한 심정이었다.


그건 그렇고 스케이트를 잘 타는 친구들과 스케이트를 타게 된 만큼, 나는 도착하자마자 스케이트 타는 요령을 배우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별로 그렇게 되진 않았다. 딱 넘어지지만 않는 정도로 타는 수준이라서 넘어지지 않는 요령도, 더 훌륭한 재주를 부리는 요령도 배울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코스의 중간 정도에 형성된 흐름을 탄 친구들, 그리고 여타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고 궤도 언저리에 발만 들였다 나오기를 혜성처럼 반복하며 사진만 찍을 때가 많았는데, 그러고 있자니 이게 바로 문자 그대로의 아웃사이더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즐기며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긴 했지만, 이 모든 생각과 행동이 주류에 섞이지 못하는 비일반적인, 혹은 비정상적인 궤적을 애써 수식하고 합리화하는 인생의 축소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는 나의 속도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가능한 만큼 남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며 살면 그만이라는 긍정적 자세를 유지하고 싶어도, 마음을 지킨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삶에서는 정서가 아프기 때문이고, 빙판에서는 발목이 아프기 때문이었으리라. 이래서 나는 절대 넘어져서 더 아프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정빙 이후로 30분쯤을 더 타고 스케이트장을 떠났다. 피곤하기도 했고, 배도 고팠다. 게다가 정빙해서 말끔했던 빙판은 두어 바퀴 도는 사이에 바로 엉망이 되었다. 날이 너무 따뜻했던 모양이다. 더 춥고 공기가 맑은 날을 택했으면 좋았겠지만, 이제 날도 추운데 스케이트나 타러 가자는 식으로 약속을 잡을 수 있는 시절은 아니니 어쩔 수 없었다.


저녁 식사는 이태원에 있다는 맛집에서 해결했다. 말라죽어서 기괴한 오브제처럼 변해버린 몬스테라가 있는 스테이크 전문점이었는데, 맛은 썩 괜찮았다. 내친 김에 맥주도 한 잔 마셨다. 마스크를 미세먼지 방지용으로만 쓰던 때에 등산하고 내려와 전통주 마시던 기억이 났다. 피로한 몸에 알코올이 더 잘 스며드는 것은 과연 어떻게 형성된 아이러니일까 싶었다.


식사 뒤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폐점때까지 잡담을 하고 해산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즐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럭저럭 즐거운 기분으로 귀가하며 가계부를 정리해 보니, 커피 두 잔, 스케이트 두 시간, 식사 한 번 즐긴 값이 도합 10만 원이었다. 이상할 건 없지만 무서운 일이었다. 발목은 일주일간 아팠고, 지갑은 지금껏 낫지 않았다. 추억은 영원하니 후회하진 않겠으나, 행복한 시간의 한켠에 드리워진 불안과 통증의 기억도 줄곧 잊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든다.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 – Daum 검색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리며, 책 속의 세 부분을 남깁니다.






버림받은 물건이나 버려질 때가 된 물건을 쓴다는 행위는 대개 이런 식이다. 같은 시간에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새것을 사서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편이 합리적일 때가 많다. 그런데도 이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첫째가 돈이 불충분하기 때문이고, 둘째가 사람이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남이 발견하지 못한 가치를 알아보았을 때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타인과 식사를 할 때면 아무래도 부끄러워진다. 혼자서만 메뉴판에서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저렴한 음식을 찾는 것 같아 쓸쓸하기도 하고, 성인으로서 온당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 같아 괴롭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충분히 노력했으니 자신이 가끔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호캉스를 긍정하려는 이유는 그게 합당하고, 자격을 따져선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요즘 신경 쓰는 말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