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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r 29. 2023

시지프스의 분리수거



알기 쉽게 지은 이 제목이 앞뒤로 다 틀렸다는 것부터 지적해야겠다. 한국에서 대체로 시지프스라 부르는 신화 속 인물은 시시포스 혹은 시지프라고 표기하는 게 맞고, 분리수거는 내가 분리해서 수거하는 게 아니라 분리해서 내놓는 것이므로 분리배출이 맞다.


아무튼 우리 아파트 재활용 쓰레기 배출일은 목요일이다. 그래서 수요일 밤부터 목요일 아침까지 내놓게 되어 있었는데, 수요일 낮부터 쓰레기를 버리는 행태가 끊이지 않아, 아예 수요일 1시부터 목요일 이른 아침까지 버리는 것으로 시간이 조정되었다. 빨리빨리의 정신 때문이랄까, 아무튼 집안에 쓰레기가 쌓여 있는 모습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긴 많은 모양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술 더 떠서, 사람들이 하나둘 수요일이든 아니든 아무때나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게 되었다. 쓰레기장에 자리는 있으니까 박스나 플라스틱 쓰레기를 툭툭 놓고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동안 관리사무소 측이 지정된 시간에만 쓰레기를 버려달라는 공고를 부지런히 붙여댔는데, 공고 따위를 보고 그대로 따르면 의지의 한국인이 아니다. 애초에 강제력도 없는 것을 누가 따르겠냔 말이다.


결국은 시간이 좀 지나자 아예 쓰레기장에 재활용 쓰레기 수거용 자루가 상시 비치되기 시작했다. 흡연자들이 금연구역 표시를 무시하고 담배를 피워대는 상습 흡연 자리에 재떨이로 쓸 옥수수 캔 따위가 배치되고 마는 꼴과 비슷하다. 단속할 방법이 없으니 청소라도 덜 힘들게 조치한 셈이다. 이런 경우에는 원래의 규칙대로 돌아간다는 게 절대 불가능하다시피하니, 관리측의 영구한 패배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물론, 주민 입장에선 쓰레기를 뭐든 아무 때나 버릴 수 있는 게 압도적으로 편하다. 그러나 나는 쓰레기를 수거일에만 버리라는 공고에 적힌 내용이 떠올라서 쓰레기장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공고문에서 쓰레기를 아무때나 버리지 말라는 이유로 든 것은,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재활용 쓰레기 정리에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긴다는 것이었다. 하기야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너도나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가는 쓰레기가 저절로 움직여서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 형태로 정리될 턱이 없으니 전부 아주머니들이 다른 일 할 시간을 쪼개서 정리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정상적인 재활용 쓰레기 배출일에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아무 물건이 뒤섞인 박스를 대충 버려놓고 가는 사람도 있고, 미처 분리를 다 하지 못하고 가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도 저절로 정리되지 않는다. 챗GPT 같은 첨단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이 척척 분리해주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노동자가 정신 없이 분리하게 된다. 특히 분리 배출이 끝나는 시간쯤에 나가보면 그 참상을 똑똑히 목격할 수 있는데, 잠깐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도통 편치 않게 된다. 나이가 적지 않은 분들이, 모여있는 재활용 쓰레기를 바닥에 쏟아놓고 일일이 다시 분류하고 정리하는 모습을 보자면 참으로 법도도 없고 미래도 없고 효율도 엉망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낀다. 한국의 분리수거 비율이 높다고 하는데, 전국민의 노력 덕분이 아니라 노동 착취가 빈번히 일어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다.


그런저런 모습을 보면서 나라도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하는데, 이게 개인이 분발해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느낌을 매주 받고 있다. 신경을 좀 써보려고 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것이다. 일단 혼합물이 너무 많아서 손대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흔히 나오는 상자만 해도 좀 예쁘기만 하면 십중팔구 종이에 코팅지를 바른 물건인 데다, 뚜껑을 고정한다고 금속판과 자석을 심어놓은 물건도 많다. 이런 것들은 원칙상 일일이 다 해체해서 마분지 부분만 재활용하고 나머지는 일반 쓰레기로 버려야 하는데,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턱이 만무하다. 우산도 천을 다 뜯어내고 플라스틱 손잡이와 금속 살을 분리해야하는데 어지간히 시간이 많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우유팩도 뜯어서 펼치고 씻고 말려서 모아 버려야 하고, 두유 따위의 멸균팩도 같은 방식으로 따로 버려야 재활용이 된다. 그런데 우리 아파트는 그런 시늉을 하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기에 찾아보니, 따로 모으는 곳이 없을 경우에는 종이와 같이 버리라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두유팩을 종이와 함께 버리곤 있는데, 이게 과연 올바르게 처리되는 것인지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확실히 처리되는 제로웨이스트 가게까지 가자니 시간과 노력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고.


겉으로 보기에는 모으기 쉬울 것 같은 플라스틱 쓰레기 배출도 엉망진창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생각해도 이게 정상적으로 재활용 될 것 같지 않다. 재활용을 하려면 같은 재질을 모아야 하는데, 일주일만 있어도 마구 쏟아지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재질별로 나눈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애초에 확인도 어려울뿐더러 껌통같은 것만 하더라도 뚜껑과 밑부분의 재질이 다르다. 오만가지 재료를 다 써서 아름답게 만든 화장품 케이스 따위는 어떻게 할 엄두 자체가 나지 않는다. 그나마 투명한 PET 병만이라도 따로 모아 쉽게 재활용해보자는 방향으로 가는 것으로 아는데, 우리 아파트는 그것조차 최종적으로는 주민이 아니라 노동자분들이 다시 분리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민들도 신경 쓰지 않을 뿐더러, 신경 써서 버린다 해도 누가 매번 검증해주는 게 아니니까 순도를 보장할 길이 없는 탓이다. 


게다가 요 몇 년 사이 수요가 크게 늘어난 배달 음식 용기도 씻어서 버리는 게 원칙이라곤 하는데, 이것도 환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나의 친구 한 명은 배달 음식 용기를 매번 성실하게 씻어서 버리는데, 그렇게 해봤자 그위에 누가 씻지 않은 용기를 대충 버리면 허사가 된다고 한탄한다. 백 명이 규칙을 지켜도 한 명이 어기면 허사가 되는 조별 과제를 하는 셈이다.


(개인의 부단한 노력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요컨대 분리배출, 분리수거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양심과 노력에 기대는 꼴인데, 모두가 빼어난 시민의식의 소유자도 아닐 뿐더러 지침도 명확하지 않고, 노력할 시간도 없으며, 두어 사람만 대충 버려도 노력의 효용이 쭉쭉 떨어지는 구조라 최종단에 있는 노동자들만 고생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도 마지막엔 컨베이어 벨트 위를 질주하는 쓰레기들을 눈으로 보고 빠르게 분리해야 하는지라 딱지 모양으로 접힌 비닐조차 처리할 수 없다고 하니, 이대로라면 쓰레기 재활용이라는 게 신기루를 쫓는 허망한 외침은 아닌가 싶어 씁쓸할 지경이다. 나 하나 해서 이게 뭔 소용인가 허망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 나 하나라도 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고, 재활용을 열심히 하는 게 결과적으로는 사회 변화를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고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씻어봤자 그 위에 누가 대충 버리면 수질오염만 되고 말짱 허사’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자원 재활용이 그냥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잘 되리라 기대하는 게 너무 순진한 일 같기도 하다. 예전에 어느 나라에서 공기 오염을 단결된 시민들의 폐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과 크게 다르지도 않은 일을 하는 건 아닐까 싶어 두려워지기도 한다. 간단히 따져봐도, 일반 쓰레기로 버리면 내 돈을 들여 처리하게 되지만 대충 재활용 쓰레기에 섞어서 버리면 남의 돈으로 처리하는 구조인데 잘 돌아갈 턱이 없지 않은가.


재활용 쓰레기 분리 배출이 분명 훌륭한 일이라는 것만은 확실하고, 꾸준히 노력해서 나아진 부분도 적지 않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이런 구조를 놔두고 시민 의식만으로 기후 위기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불가능은 아니겠으나 이 방식을 유지하고 싶었다면 최소한 50년 전쯤에 시작했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매주 재활용 쓰레기를 버릴 때마다, 혹은 어디서 무슨 이벤트 상품으로 광란의 에코백 잔치를 벌이는 꼬락서니를 볼 때마다 자기들이 생산한 제품의 쓰레기는 기업에서 책임지고 처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이를 가는데, 이것도 기업이 갑자기 사회적 책임을 져야 마땅하겠다고 나설 턱이 없으리라. 결국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조직적 활동에 가담하는게 가장 빠른 방법일 텐데, ‘정치’니, ‘조직 활동’이니 하는 단어만 보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서 잘 되지 않는 면도 큰 것 같다. 그리하여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노동 부담을 본의 아니게 남에게 떠넘기는 재활용 쓰레기 배출만을 반복하며 한탄하는 나날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인데, 그 와중에도 쓰레기를 한 수레 버려야 하는 날이 돌아왔으니 만사가 그저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 – Daum 검색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리며, 책 속의 세 부분을 남깁니다.






버림받은 물건이나 버려질 때가 된 물건을 쓴다는 행위는 대개 이런 식이다. 같은 시간에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새것을 사서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편이 합리적일 때가 많다. 그런데도 이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첫째가 돈이 불충분하기 때문이고, 둘째가 사람이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남이 발견하지 못한 가치를 알아보았을 때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타인과 식사를 할 때면 아무래도 부끄러워진다. 혼자서만 메뉴판에서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저렴한 음식을 찾는 것 같아 쓸쓸하기도 하고, 성인으로서 온당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 같아 괴롭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충분히 노력했으니 자신이 가끔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호캉스를 긍정하려는 이유는 그게 합당하고, 자격을 따져선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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