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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Oct 25. 2023

나의 등산화 고민담 3 잠발란 과잉 보호는 괜찮은 걸까

외출하기 좋은 날씨가 아주 짧게 유지되는 10월 중에 괜찮은 등산화를 찾아내고야 말겠다고 결심한 대로, 10월이 다 가기 전에 마음에 드는 등산화를  찾아내는 데에 성공하고 말았다. 여기서 잠시 지난 줄거리를 요약하자.


날씨도 좋고 등산이나 가자는 친구들 제안에 따라 관악산에 가기로 한 나는 집에 있던 등산화, 혹은 등산화에 준하는 신발들을 뒤적여 보고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싶어 새로 한 켤레를 사려다, 있는 신발이나 잘 써먹어보자는 생각에 나이키 에어 맥스를 개조하고 난리법석을 피웠다. 등산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 보기엔 자동차가 없다고 자전거를 개조하는 꼴 못지 않게 어처구니 없는 짓일 텐데, 다행히 나도 실전에 투입하기 전에 실험을 할 정신은 있었기에 신발 개조는 포기하게 되었다. 대신에 관악산 정복에 투입된 것은 비브람창을 채택한 목토 부츠였다. 초보도 무리 없이 갈 수 있다는 말에 진짜 등산화를 급히 결정할 필요는 없겠다고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 까닭이다.

그리고 무엇 하나 똑같지 않은 돌덩이로 이루어져 끊임없이 발 건강을 위협하는 ‘너덜길’을 체험한 끝에 간신히 연주대를 보고 내려온 나는 곧바로 등산화를 찾아서 중고 장터를 헤매기 시작했다. 이십여 년만에 다시 찾은 산이 좋긴 했는데 잘못하다간 족저근막염의 쁘띠 지옥을 다시 맛보게 될 것 같았으니까.


그리하여 오랜 시간 장터 잠복과 검색을 지속하던 나는 당근에 ‘잠발란 울트라라이트’가 올라온 것을 발견했다. 잠발란! 최초로 등산화에 부착할 고무창을 만들어낸 비브람과 한 세기 가까이 등산화를 만들어온 전통의 브랜드가 아닌가! 매물은 그중에서도 ‘울트라 라이트’라는 모델로, 튼튼한 중등산화이면서도 가벼운 무게와 아름다운 외관이 돋보이는 등산화였다. 나는 곧바로 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등산화에 사로잡혀 번민의 시간을 보냈다. 대단한 산을 길게 다닐 것도 아니면서 과한 물건을 산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고, 후기를 찾아보니 접지력이 좋지는 않다는 평이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중에서 특히 접지력 문제가 나를 괴롭혔다. 잠발란 울트라 라이트의 밑창인 비브람 스타라이트가 바위에서 미끄럽고 젖은 면은 아예 빙판처럼 느껴진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약간 밀리긴 하지만 마구 미끄럽다는 느낌을 받진 못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비브람 밑창은 메가 그립처럼 특별히 소문이 난 모델 외에는 화강암 지대에 맞지 않는 편이니 다소 미끄러운 게 사실일 듯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지경인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한국어, 영어, 일본어 3개 국어로 다 찾아봐도 후기 몇 편이 참고할 만한 자료의 전부였고 객관적 자료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예 비브람사에 들어가봐도 제품 설명은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원하는 게 과도한 듯 싶었다.


사실 믿을 만한 등산화야 국내에 널려있으니 굳이 미끄러울 확률이 상당히 높은 등산화를 고민해서 산다는 건 불합리한 일이 분명했다. 국민 등산화로 정평이 난 캠프라인은 물론이고 K2, 아이더의 엑스그립, 여기저기서 적잖이 채용되는 메가그립도 신뢰도가 높고, 이름이 없더라도 부틸고무 비율이 높은 밑창이라면 다른 것보다는 나으리라 기대할 수 있었다. 나는 매물을 찜해두고 이만하면 접지력이고 뭐고 어찌되었든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가격이 낮아지길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중고 거래의 세계는 냉혹해서, 인내는 쓰고 그 열매는 실종될 때가 빈번하다. 나 말고도 찜을 하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자 지금 사지 않으면 엄청난 손해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닌 것이, 흠집 약간을 제외하면 별 이상이 없는데다 사이즈도 맞는 잠발란 등산화가 매우 저렴한 가격에 나오는 일도 거의 없을 뿐더러 직거래 가능한 거리에서 나타나는 일은 더욱 희귀한 일이기 때문이다. 확률로 보면 가히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봐도 좋을 지경이니, 이 기회를 놓친다는 건 다시없는 바보짓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는 사흘을 버티지 못하고 판매자에게 연락했고, 인근에서 거래를 하게 되었다. 인근치고는 거리가 제법 멀어서 자전거를 타고 20분 이상 달려야 했는데, 그 근방의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반납할 일도 있어서 오히려 흐름이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아무 고지도 없이 무인 반납함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추가 이동 시간 20분 가량은 결과적으로 허사가 되었지만……. 아무튼 약속 장소에 가서 기다리자니 판매자는 어디냐고 묻더니 내가 도착했다고 하자 건물 뒤로 와야 한다고 말했다. 아니, 어느 건물로 오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건물 앞으로 가는 게 당연한데 왜 뒤로 오라는 말을 미리 하지 않느냔 말이다. 헛걸음으로 제법 짜증이 나 있던 나는 슬슬 다 때려치우고 분수에 맞게 낡아빠진 등산화나 신는 게 맞지 않나 생각하기 시작했다.


건물 뒤에서 차를 세우고 기다리던 판매자는 나를 알아보곤 이쪽이 밝아서 불렀다고 설명했다. 그 말대로 그곳은 아주 밝은 가로등이 설치되어 물건을 확인하기가 용이했다. 물건을 팔아치우는 입장이 되면 흠을 좀 감추고 싶은 게 보통인데, 퍽 투명한 거래를 추구하는 사람인 듯했다. 덕분에 마음이 많이 누그러졌고, 등산화를 신어본 뒤에는 마음이 완전히 돌아섰다. 잠발란 울트라라이트는 상상 이상으로 편안했다. 등산화에서 기대한 적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운동화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착화감이었다. 튼튼한 이불 속에 발을 집어넣은 것 같았다. 제법 많이 사용한 신발이라 앞코에 찍힌 자국이 좀 있긴 하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커버할 수 있었다. 


한두마디를 나누자니 판매자는 자신이 2차 구매자이며, 등산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말도 했다. 나도 그렇다고 했다. 나는 내친김에 이 등산화가 미끄럽다는데 어땠는지도 물었다. 그러자 판매자는 망설임 없이 미끄럽다며, 초보에게 흔히 추천하는 다른 등산화를 살 작정이라 했다. 아니, 이렇게까지 정직한 판매자라니. 금도끼나 은도끼, 혹은 양심 냉장고라도 줘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미끄러우면 뭐 어떠랴 나중에 다른 밑창으로 교체를 해버리지 뭐, 라는 심정이 되어 구입을 해버렸다. 내 발에 딱 맞는 등산화를 찾는 일도, 신뢰할 만한 판매자를 만나는 것도 퍽 어려운 일이니 놓칠 수 없는 우연이었다.


(세월이 좀 느껴지는 구입 직후)



그렇게 입수한 잠발란 울트라라이트를 소독하고 가죽 클리너와 가죽 크림, 슈크림으로 말끔히 다듬은 뒤에 신고 나간 곳은 관악산 인근의 둘레길이었다. 둘레길치고는 험한 편이라 돌덩이들을 딛고 다닐 때도 있었는데, 어쨌거나 마른 땅이었고 바위를 타고 오를 일은 없었던 덕분인지 특별히 미끄럽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기본 깔창이 그다지 편치 않아서 바꿔야 했고 끈을 너무 단단히 조이는 바람에 약간 아프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즐거운 트래킹이었다. 새 등산화에 애정을 가질 만했다.


그러나 애정을 갖자 그만큼 문제도 생겼다. 캐주얼한 느낌을 다소 포기하고 내구성을 강화한 등산화들은 랜드라고 해서 앞코와 테두리 아래쪽까지 고무캡을 둘러놓는데, 잠발란 울트라라이트는 제법 가벼운 신발로 포지셔닝을 한 탓인지 고무띠가 낮은 편이었다. 때문에 둘레길 좀 걸었다고 그새 앞코에 찍힌 자국들이 추가되고 말았다. 조금이라도 더 험한 길을 갔다간 엉망진창이 되어 관리하느라 여간 번거롭지 않을 게 분명했다. 등산화에 생긴 상처는 연륜과 훈장 같은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귀한 우연으로 구한 신발이 아무 대책 없이 상해가는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모양만 상하는 게 아니라 발을 보호하는 기능도 서서히 깎여나가는 셈이니까.


결국 나는 등산화 앞코를 보호할 방법을 찾아 여러가지 상품을 검색했다. 가장 보호 효과가 확실한 물건으로는 일반 신발을 임시로 안전화처럼 만들어주는 금속 토캡이 있었으나 길게 끈을 당겨 묶어놓은 모습이 보기에도 좋지 않고, 토캡 아래쪽은 접지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문제가 치명적이었다. 그밖에 바이크를 타는 사람들이 신발을 보호하기 위해 씌우는 커버도 있었으나 이 역시 인조가죽 따위 부드러운 재료로 만들어졌을 뿐 문제는 금속 토캡과 비슷했다.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야구화 등을 보호하기 위해 앞코에 액체 플라스틱을 바르고 단단히 굳혀 코팅하는 ‘터프 토’ 등의 신기한 제품도 있긴 했는데, 이건 가격도 3만원 가량으로 비쌀뿐더러 원상복구가 가능한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더 찾아봐도 이런 문제점을 무엇으로 어떻게 해결했다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터프 토를 바르거나 아예 편하게 신다가 사설 수선업체에서 밑창을 수선할 때 랜드까지 추가해달라고 하는 게 최선인 듯했다. 앞코는 쉽게 상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니까 스마트폰 케이스처럼 쉽게 교체할 수 있는 보호캡을 만들어도 좋을 것 같은데, 그런 고민을 진지하게 할 정도로 등산화 상처에 고통받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그런 상품 개발에 뛰어드는 사람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하기야 쓰면 상하는 게 정상인 물건을 보호하려 한다는 건 가죽 장갑 보호용 면장갑을 끼는 것이나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등산할 때는 눈썹도 뽑아놓고 가는 법이라는데 굳이 신발에 뭘 더한다는 건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고, 신발이 닳아야 신발 산업이 원활히 돌아갈 테니 업계에서 그런 보호캡을 만들지 않는 게 합리적일 수도 있겠다.


(절연테이프를 바른 꼬락서니)

그러나 근래에 죽은 신발 살리기를 취미로 삼고 있는 내가 신발이 까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가만히 앉아서 받아들일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등산화 앞코에 무엇을 어떻게 붙여야 모양이 이상하지 않으면서 가볍고 보호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첫 시도는 절연테이프였다. 그걸로 해결되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고, 작업의 용이함이나 보강 후의 모양새를 살펴보려 했다. 그 결과 원통형의 단순 곡면도 아니고 구에 가까운 앞코를 무엇으로 깔끔히 덮기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괜히 장인들이 있는 게 아니다. 포기하고 싶어졌다.


구형 곡면을 매끄럽게 덮으려면 덮을 보강재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곡면을 만들어내거나 어느정도 늘어나는 보강재, 또는 가소성이 있는 보강재를 써야 한다. 후보로는 고무와 아크릴 테이프, 글루건, 실리콘 접착제가 떠올랐다. 그러나 운동용 밴드나 고무장갑 말고 쉽게 구할 수 있을 고무가 떠오르지도 않았고, 잘 늘어나는 고무라면 돌에 찍히자마자 찢어질 것 같았다. 그렇다고 뚫어뽕을 쓸 수도 없고. 방수용 아크릴 테이프는 접착력이 가죽을 상하게 할 것 같아 걱정이었다. 글루건과 실리콘 접착제는 쉽게 구해서 붙일 수 있긴 하지만 터프토와 마찬가지로 원상복구가 될지 알 수 없을뿐더러 보기 좋게 모양을 다듬을 자신이 없었다. 석고나 지점토 따위로 틀을 뜨면 가능은 한데, 거기까지 생각해 보니 과연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싶기도 했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 간호사가 실수로 세탁소 딸 혜정의 에르메스 가방을 떨어뜨리는 장면이 나온다. 불같이 화를 내는 혜정에게 갑부인 연진은 가방을 모시고 살 거면 뭐하러 들고 다니냐고 핀잔을 주는데, 내 꼴도 비슷한 게 아닌가 싶었다. 새것도 아니고 원래 흠이 많이 생긴 물건을 싸게 사다가 보호캡을 만들려 하다니, 이런 노력을 하는 시점에 이미 이 물건을 가질 자격이 없는 게 아닐까?


심한 회의감을 느낀 나는 작업을 그만두고 우연히 버려진 등산화나 운동화를 발견하면 토캡을 뜯어다 쓰기로 작정했다. 곡면을 커버하기에 그보다 나은 방법은 없을 게 분명했는데…… 거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가죽을 덧대는 방법도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한 듯했다. 고무가 아니라 스웨이드, 누벅으로 앞코를 보강하는 건 아주 흔한 일이 아닌가. 게다가 마침 버려진 군화를 잘라서 갈무리한 재료가 남아있기도 했다.


그리하여 나는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결국 잠발란 울트라라이트의 앞코에 보강재를 덧대는 데에 성공했다. 가죽이라는 재료는 약간 신축성이 있어서 곡면을 만들 수 있었다. 필요하면 원상복구를 할 작정이므로 보강재는 가죽면 밑의 고무에만 붙였다. 접착은 시험삼아 양면테이프만 사용했다. 문방구나 잡화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고,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는 것중 얇으면서 특히 접착력이 강한 것을 사용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잘 붙어 당분간 추가 작업은 필요하지 않을 듯하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나는 결국 마음에 드는 등산화를 손에 넣었고, 이것을 보호할 방법까지 개발하는 데에 성공했다. 보호하지 않고 쓰는 게 당연한 물건을 보호한다고 난리법석을 떨며 시간도 죽이고 회의감도 느꼈지만 결과적으로는 만족스럽다. 아마 누군가는 이 꼴을 보고 소모품인 등산화를 아주 모시고 산다고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비웃을 테면 비웃으라지. 사람은 보상이 크게 느껴지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니 그는 의미있게 노쇠한 신발을 떠나보내고 새로 들이는 것에서 보상을 느끼며 살고 나는 건강한 신발을 잘 지키는 것에서 보상을 느끼며 살 따름이다.



*브런치스토리의 기술적 문제로 재발행합니다...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되었습니다. 성원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 – Daum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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