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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un 15. 2016

살인하는 트럭에 대한 안타까움


벚꽃 피는 봄날, 미소녀에게서 ‘트럭,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받는 것으로 시작하는 청춘과 열정의 트럭 드라이브 이야기가 하나쯤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얼떨결에 좋아한다고 대답했다가 트럭부에 입부해서 풋내기 드라이버로 시작하지만, 차츰 트럭의 묘미에 빠져 진정한 트럭맨이 된다는 전개죠. 전세계의 트럭 매니아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을 게 틀림없습니다. 어디서 들어본 얘기 같다고요? 그건 당신의 내면에서 이런 이야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설마 이 비슷한 얘기가 어디 있을라구요.


어쨌든, 정말로 트럭을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 따져본다면 저는 그 둘 중 어느 쪽이라기보다는 ‘안쓰럽다’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트럭이 나왔다고 기뻐 날뛸 이유도 없고, 꼴도 보기 싫다고 채널을 돌릴 이유도 없지만 안쓰러울 이유는 있어요. 왜냐하면 여러 매체에서도 트럭이 별로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섭니다. 물론 예외도 있긴 해요. 시뮬레이션 게임인 “유로트럭”은 플레이 영상만 봐도 어쩐지 트럭이 좋아질 정도로 멋진 게임이고, 자동차 전문 프로그램에서 고성능 트럭과 슈퍼카가 대결을 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예외는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이고, 그밖에는 트럭이 나왔다 하면 십중팔구는 사고 또는 살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생각해 보세요. 영화에서 트럭이 나왔다 하면 누군가 자동차째로 받혀서 형체도 남지 않을 정도로 박살이 납니다. 유조차는 꼭 폭발하구요.  


저는 언제부턴가 이 부분에 주목하면서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보니 정말이지 트럭의 취급은 너무나 가혹합니다. 술취한 운전사가 몬 트럭이 부부 중 남편을 죽이고 아내에게는 평생을 괴롭힐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 근미래 호주의 폭주족 두목을 받아서 죽이기도 하며(뭐 이건 잘됐습니다만), 기업화된 조직 폭력배의 회장을 암살하는 데 쓰이기도 하고, 어째선지 신선조 일원을 죽이는가 하면, 심지어 스티븐 킹의 소설과 TV 영화에서는 생명을 얻어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다닙니다. 마지막 건 본 건 아닌데, 검색창에 “트럭이 사람 죽이는 영화”라고 검색하니까 나오더군요. 맙소사. 


제가 기억하는 한, 영화에서 트럭이 사고에 휘말렸는데 우습게 넘어간 것은 “백 투 더 퓨처”에서 비프와 똘마니들이 비료 트럭을 들이받아 똥범벅이 되는 장면 뿐입니다. 마티가 신나게 도망치고 비프는 입에서 똥을 뱉으며 구시렁대죠. 이쯤되면 사람들이 트럭을 '노상의 살인기계’ 이상으로는 보지 않는다는 게 명백합니다. 너무하죠. 트럭이 얼마나 소중한데요. 트럭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보세요. 배송과 물가가 어떻게 될지. 제가 트럭이었으면 여간 억울하지 않았을 겁니다. 매일 죽도록 일하는데 정작 이미지는 공포의 살인기계라뇨.


트럭은 꽤 멋지지만, 영화에 등장할 때는 대체로 단역(살인기계1)입니다.


물론 절대 트럭으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넣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죽일 수도 있죠.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시각적으로도 꽤 박력있으니까요. 다만 허구헌날 이런 식인 건 너무하지 않을까요? 가령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서 노트북을 쓰는데 영화에서 노트북이 나올 때마다 누군가의 머리통을 깨부수는데만 쓰인다고 생각해 보죠.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 생각해 보니 이건 좀 재미있군요. 전 맥북 에어를 쓰는데, 이게 나올 때마다 누군가의 목을 썰어버린다면 자랑스러울 것도 같습니다. 비유가 잘못됐군요. 하지만 이게 수십 년간 당연한 걸로 다뤄지면 그것도 문제가 있을 겁니다. 제작자는 ‘도로에서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트럭 불러!’보다는 좀 더 독특한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트럭이 사람 죽이는 건 클리셰인데 뭘."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아마 그게 보편적인 상식일 겁니다. 하지만 어떤 소재가 클리셰로 이용되고 또 이용되서 스테레오 타입으로 고착화되면 그때부터 문제가 심각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스테레오 타입의 대표격인 ‘못된 계모’를 보죠. 이 유형은 정말 너무나 오래되고 유명해서 아무 이유도 없이 ‘계모’ 하면 표독하고 질투심 많고 딸을 학대하는 여자가 떠오릅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 부모가 재혼을 한 가정은 어쩐지 다른 가정보다 행복하지 않으리라는 이미지마저 있습니다. 편견일 뿐인데도 말이죠. 저는 외할머니가 어머니의 새어머니인데, 실제로 아무 문제도 없어요. 외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청소나 시키고 무도회도 못가게 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래서 못된 계모 캐릭터, 예를 들어 백설공주 엄마를 볼 때마다 이건 어째 좀 부당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혼하고 재혼하는 세상인데, 어릴 때부터 재혼으로 인해 자식이 가사노동에 시달리고 숲속에 버려지고 종이옷을 입고 겨울에 딸기를 따러 가는 얘기 따위를 듣는 것도 분명 문제가 있어요. “스탭맘”처럼 새어머니가 오히려 아이들로부터 적대시 당하면서도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해 행복해진다는 얘기도 각광 받아야 합니다. 


그러고보니 트럭 얘기를 하고 있었군요. 다시 얘기를 돌려서, 트럭도 이미지 개선을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트럭을 너무 좋아하게 된 나머지 달리는 트럭에 자꾸 다가가면 그것도 심각한 문제가 되겠죠. 그렇게 보면 트럭이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게 공익적으로 나은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폭주족에 대한 경각심을 강조한다는 가짜 의도를 가져야 했던 “매드맥스 1”처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딱히 트럭 살인이 공익을 위해 이용되는 것 같진 않고, 단순히 상상력의 고갈 때문에 대충 편리하게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장면에 불만을 가지는 건 오로지 저 뿐이니까, 트럭이 사람 죽이는 장면은 아마 앞으로도 쉴 새 없이 나올 겁니다. 아마 트럭보다 더 강력하고 시각적으로 강렬한 존재가 일상화되기 전까진 그러겠죠. 드론 기술이 발달해서 하늘을 거대 드론이 수놓고, 이것들이 가끔 떨어져서 사람 머리를 깨부수거나 프로펠러로 목을 따버리는 일이 기사로 다뤄지지도 않는 시대가 되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트럭이 사람 죽이는 장면이 질렸다는 겁니다. 이게 ‘이사를 갔더니 새 집에서 이상한 일이…’처럼 반복하며 곱씹어도 나름의 맛이 있는 클리셰나 서사 장치 같지도 않구요. “캐빈 인 더 우즈”에서 공포영화의 클리셰를 모조리 비틀어 명작을 만들어낸 것처럼 살인 트럭도 누군가 재미나게 비틀어주면 좋겠네요.


(2015.08.15.)



-후기


거참 이상한 글이군요. 아무튼, 사실 제가 많은 매체에서 트럭을 야박하게 다룬다는데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만화가 우미노 치카의 작품들을 보면서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허니와 클로버" 그리고 연재중인 "3월의 라이온"에서도 트럭이 일으킨 사고에 가족을 잃은 인물이 나오거든요. 두 작품 연달아 트럭을 쓸 건 없지 않나? 생각하면서 트럭의 활용에 주목하기 시작한 겁니다. 데스티네이션처럼 기막힌 죽음을 떠올리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창작자라면 비극의 바리에이션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사실 트럭보다 더 심각한 문제로, 상당히 많은 작품(영화고 만화고 소설이고 연극이고 할 것없이)에서 여성에게 닥치는 비극이 십중팔구 강간(혹은 성폭력)이고,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그 사건이 주인공인 그녀의 남편이나 애인의 정신적 변화(주로 각성이라고 불리는 성장)를 유발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도 창작자가 발상을 게을리 한 결과겠죠. 그래서 저도 최근에는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너무 뻔하게, 대충 넘어가려는 게 아닌가 점검하곤 합니다.



그리고 순전히 여담입니다만, 우여곡절 끝에 오랫동안 준비해온 소설이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심야마장 ~레드 다이아몬드 살인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은퇴한 도박사의 마작장에 옛 친구의 아내가 찾아와 붉은 다이아몬드를 보내고 살해당한 남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남기고, 도박사와 그의 조수가 이 의문을 쫓아 험악한 뒷세계를 헤맨다는 내용의 하드보일드 풍 미스터리입니다. 

내용이 내용이고 작업한지가 오래된지라 저 역시 비극의 클리셰에서 탈피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만, 필립 말로 시리즈나 씬시티 같은 미스터리, 하드보일드 분위기를 좋아하신다면 분명 만족스럽게 읽으실 수 있으니 확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고로 배경은 마이애미 남부의 가상도시고, 마작으로 시작하지만 메인은 도박이 아니라 미스터리입니다)

카카오 페이지에서 검색하시는 게 가장 빠르고, 카테고리로는 일반>문학>새로 나온 문학에서 찾으실 수 있습니다. 


다음주부터는 작년 글이 아니라 새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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