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대체 어디일까?
나는 어이가 없었고, 약간의 두려움마저 느끼기 시작했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지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던 순백의 광경이 이제는 세상의 모든 길을 감추는 망각의 안개처럼 느껴졌다. 초보에게 얼마든지 추천할 수 있다는 사패산에서, 나는 같은 길을 돌고 또 돌며 나아갈 길을 탐색하고 좌절하길 반복했다. 죽을 곳은 아니지만 이러다간 정말로 해가 질 때까지 여길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웃기는 조난자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자신만만하게 덤볐다가 똑같은 길만 돌고 있다는 점에서 내 인생의 축소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 사실 이건 나중에 덧붙인 생각이다. 당시에는 정말로 머릿속까지 하얘져서 길을 찾아내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으니까.
아무튼 이야기를 되돌리자.
2023년을 마무리하고 2024년을 시작하며 친구들과 바다로 여행을 다녀왔고, 나는 아무도 모르게 후회했다. 여행은 즐거운 부분도 적당히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음식은 제법 맛있었으나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정도로 특별하진 않았으며, 기대했던 밤바다의 풍경은 멀리서만 봐야했고, 작전을 수행하는 것처럼 이 관광지에서 저 음식점으로 쫓겨다니듯이 돌아다니는 일정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꼭 갈 필요는 없었던 고급 횟집에서 과식한 일행들이 장염을 일으켜 새벽에는 응급실에 다녀와야 했다. 즐거움은 한정적이고 지불한 대가는 컸다. 나는 원치 않는 산행에 끌려간 실내활동 선호자처럼, 그래도 일단 즐겁다고 생각하고 행동했으나, 지나고 돌이켜보니 마음 깊이 원한 흐름은 아니었다. 나는 사람마다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지점이 다르기에 타인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될 수는 없고, 반대로 나의 행복도 타인의 행복이 될 수도 없다는 걸 새삼 절실하게 느꼈다.
마음 한켠에 생채기를 남긴 여행에서 돌아온 뒤, 나는 곧장 2024년 첫 등산의 목적지를 정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사패산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서울 강북 5산 중에서 가지 않은 게 사패산뿐이었으니까.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등산 난이도를 생각하면 사패산부터 갔어야 하는 것을 반대로 마지막에 가게 된 터라 재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들었으나, 쉽게 빨리 다녀오는 산에는 그 나름대로 컵라면 같은 간결한 매력이 있는 법이다.
1월 초의 날씨는 풀렸다 다시 추워지기를 반복했고, 사패산으로 향한 날은 제법 따뜻해져 4도 가량이었다. 나는 평상복으로 입는 플리스 위에 택배비를 포함해서 단돈 만 원에 산 고어텍스 하드쉘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그 하드쉘은 고어텍스 XCR이라고 해서 고어텍스의 옛 종류 중에 성능이 빼어난 것이었는데, 어깨 위의 가방 미끄럼 방지 우레탄이 지저분하게 벗겨지고 있다는 이유에서 싸게 처분된 매물이었다. 남에게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려는 목적에서 등산복을 입는 게 아니니까 싸면 어쨌든 좋지 않겠냐고, 보자마자 냉큼 구입한 것까진 좋았다. 그러나 나는 물건을 받은 뒤에 심각한 문제가 하나 더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 그 문제란 재킷이 너무 무겁다는 점이었다. 패딩도 아닌 게 무려 700그램을 넘어갈 지경이었던 것이다! 등산 좋아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고급 하드쉘이 400그램 가량이라는 걸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무게였다. 서울 근교 산에 300그램쯤 더 지고 다닌다고 해서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것도 아니지만, 삐걱이는 무릎을 위해 경량화를 추구하는 나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대충 성능 시험이나 할겸, 누구나 갈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쉽다는 사패산에 입고 가기로 정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등산화는 10년 넘게 방치했다가 벌어진 밑창을 직접 붙인, 네파의 쉐도우프로를 택했다.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운동화 사이즈로 구한 캠프라인의 등산화는 작아서 불암산에 다녀온 뒤로 처분해버렸고, 잠발란 울트라라이트는 눈이 남아있을 산에 신고 가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롭기 때문이다. 쉐도우프로도 충분히 크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백운대 정도는 다녀올 수 있다는 게 검증되었고, 게다가 네파에서 개발한 밑창은 얼음에서도 접지력이 좋다고 선전한 적이 있으니 믿어보기로 했다. 적절한 등산화를 제때 마련하지 않은 대가를 은근히 치루게 될 줄은, 출발한지 한참 지난 뒤까지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아침을 늦게 시작하는 버릇이 들어 남들 하산하는 12시쯤 들머리에 도착하는 게 일상이 되었는데, 이날은 11시쯤 회룡역에서 내릴 수 있었다. 하늘은 흐렸지만 상쾌한 아침이었다. 역시 일찍 일어나는 등산객이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법임을 가슴에 새겼다. 그러나 빠른 출발이 허망하게도...... 시작부터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사패산의 가장 대중적인 코스는 범골 매표소에서 시작하는 호암사 코스 또는 회룡탐방지원센터에서 시작하는 회룡사 코스다. 그런데 나는 회룡탐방지원센터로 걷다말고, 더 쉽다는 호암사 코스를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북쪽으로 걸어서 길을 바꾸었다. 그것까진 괜찮은 일이었으나 새로 접어든 길이 또 여러 갈래로 나뉘어 어디로 가야 하나 헷갈린 게 문제였다. 산이 쉽다기에 방심하고 예습을 똑바로 안 한 탓인데, 지도를 꺼내 보니 어이쿠, 호암사 코스는 한참 더 북쪽에 있었다. 또 대로로 돌아나가서 북쪽으로 가야 하나? 고민하는 차에 네 명쯤 되는 등산객들이 둘레길 입구라고 적힌 계단으로 올라가는 게 보였다. 나는 잠시 고민한 뒤 그들 뒤를 따랐다. 장비를 보아하니 편안한 둘레길을 다닐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았기에 그들이 어찌되었든 사패산으로 올라갈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지도에도 일단 산을 탄 뒤에 호암사 방면으로 빠지는 길이 보이기도 했고.
그렇게 올라선 둘레길을 벗어나 산길로 들어서니, 고가 도로 옆을 지나 경사로로 들어서게 되어 있었다. 어찌되었든 오르막이니 아주 잘못된 길은 아니겠지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지도와 길을 번갈아가며 살펴봐도 호암사 방면으로 북상하는 길은 나타나지 않았다. 큰 길도 샛길도 없었다. 지도에 있던 길이 사라진 걸까? 그러나 폐쇄된 길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 원 참, 지도를 들고도 헤맨 게 한두 번은 아니지만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어쩌나 고민하는 사이에 심지어 가랑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비를 맞으며 산행하는 건 처음이라 약간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빗줄기는 가늘었고, 나는 고어텍스 재킷 중에서도 고급형을 입고 있었으므로 일단 길을 더 찾아보기로 했다.
고도가 그리 높지 않은 곳이었는데도 사패산의 땅은 대부분 흰 눈에 덮여 있었다. 나무 위에 쌓인 눈만 녹아서 땅은 얇은 융단처럼 깔린 눈이 가득했고 덕분에 모든 땅이 새로 만든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풍경이 비에 곧 녹겠구나 싶어 아쉬웠으나, 길을 찾아다니는 사이에 가랑비는 진눈깨비로 변했다. 알갱이가 톡톡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산행다운 산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감탄했다. 산과 눈과 나밖에 없는 세상은 먼 풍경이 뿌옇게 지워져 경탄할 비경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오래도록 즐길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비경祕境이란 숨길비 자를 쓰는데, 원래부터 숨겨진 광경이 아니라 흰 색채 뒤로 서서히 숨어드는 광경도 과연 비경이라 할 만했다.
그 즈음에서 나는 등산 지도 앱이 길을 잘못 설정했다고 결론내리고, 사패산 정상으로 가는 길을 다시 설정했다. 어쨌거나 정상으로 가는 길은 있어 보였고, 길을 못 찾거나 눈이 심해지면 도중에 하산해서 영화라도 보러 가면 되지 않겠나 싶었다. 산속에서 눈을 만나 이미 아쉽지 않을 만큼 만족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서 그 대안을 진지하게 검토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번에도 지도에는 나오는 길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거대한 바위 너머로 길이 이어지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그 바위를 넘어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등반하듯이 바위와 나무를 번갈아가며 잡고 딛고 몸을 끌어올려 바위 아래 푹 패인 곳에 들어가 눈 내리는 풍경을 감상하는 것까지는 베어 그릴스(영국 특수부대 출신의 생존 전문가)같은 야생의 즐거움이 느껴져 좋았는데, 그 뒤로 길이랄 것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이 매끈하고 거대한 바위를 기어올라 넘는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고, 바위 밑의 파인 부분을 가로질러 나가자니 바로 앞이 절벽에 가까웠다. 워낙 인적이 없는 등산로라 지도 정비가 덜 된 것일까?
나는 한참을 우왕좌왕하며 길을 둘러보다 결국은 포기하고 바위에서 내려왔다. 정말 아쉽지만 하산하는 게 가장 나은 수습 방법임을 인정해야 했다. 위험한가 아닌가, 나의 육체로 가능한가 아닌가를 따지기 이전에, 길이 보이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려가다 운 좋게 다른 길을 발견한다면 또 몰라도, 일단은 하산을 택하는 게 옳을 것이었다. 그런데, 내려가다 보니 저 앞에서 대여섯 명쯤 되는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오는 게 아닌가? 판초우의로 배낭까지 덮고 등산스틱들을 쓰는 모습을 보건대 절대 초보는 아니고, 길을 잘 아는 사람이 같이 온 게 분명했다.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나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자니 그들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내가 어렵게 올랐던 바위 옆의 홈으로 기어올라 잠시 사진을 찍고 놀았다. 그 뒤가 대체 어찌될지 너무나 궁금했다. 설마 나처럼 다시 내려오진 않겠지? 나는 도적들이 동굴 문을 여는 광경을 지켜보는 알리바바처럼 바위 뒤에 숨어서 숨죽이고(과장이다) 그 등산객들을 응시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바위 옆에 붙은 또다른 바위 사이의 틈으로 한 명씩 천천히 기어내려가는 게 아닌가! 둥근 바위들로 막혔다고 생각한 비좁은 틈이 바로 등산로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보지 않으면 초보는 꿈에도 모를 길이었다. 숨은벽에서 빠져나가는 바위틈은 ‘이렇게 좁은 틈이 길이라니!’하고 놀랐지만, 여기는 길이라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 놀라웠다.
설마 극소수의 선택받은 자만 아는 비밀의 길이라 엿본 것을 들켰다간 호된 꼴을 당하는 건 아니겠지, 생각하며 앞선 등산객들을 따라 바위 틈으로 겨우 내려갔다. 숨은 길을 지나서 나타난 것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금은보화와 낡은 램프......는 당연히 아니었고, 큰 바윗덩이로 이루어져 다소 딛기가 복잡한 오르막이었다. 아무튼 포기하기 직전에 등산로로 귀환한 셈이다. 나는 낮은 산이라고 얕보고 발길 가는 대로 걷는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새삼 깨달았다. 책을 표지로 판단할 수 없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할 수 없듯, 산도 높이로 판단할 수 없으며,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산은 반드시 고통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