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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Dec 04. 2024

눈 덮인 사패산과 비밀의 길 2



바위 틈으로 난 비밀의 길을 지나니 그곳은 설국이었다.......

어디를 지나 눈 내린 광경만 나타나면 늘어놓는 그 표현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커다란 바위로 이루어진 암릉과 오르막을 지난 뒤로는 대체로 평온한 길이라 평소라면 좀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 법도 했는데, 눈이 많이 쏟아지다 그치기를 반복하니 주변이 온통 흰 바탕에 검은 나무 줄기만 가득한 풍경이 되어 질릴 틈이 없었다. 산수화보다는 참 쉽죠, 하면서 밥 로스 씨가 나이프로 캔버스를 살살 긁어서 그린 유화처럼 보였다. 큰 난관 없이 이런 설경 속을 걸을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유유자적한 축복이었다.


사패산도 북한산의 자락답게 커다란 바위 봉우리가 종종 나왔다. 나는 그 옆을 지나 내리막길을 가기도 하고, 다시 적당한 크기의 바위를 쌓아서 닦은 계단길을 오르기도 했다.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고 걸었는데도 다행히 별로 미끄러운 길이 없었다. 한참 예전에 단종된 네파의 아이스그립 기술이 빛을 발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다져지지 않은 눈 위를 걸으니 접지력이 상실될 일이 없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참고로 배낭에는 집에 있던 아이젠을 하나 넣어둔 상태였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여성용이라 쓸데없는 짐을 들고 다닌 셈이었다. 써 본적도 없는 물건을 확인도 안 하고 가져오다니, 재수가 없었다면 큰일 났을 노릇이다.


이날 사패산에는 사람이 퍽 적었다. 그 와중에 지나친 중년 여성과 청소년 일행이 신기하게 보였다. 잡담을 듣자니 엄마와 아들이었던 것이다. 사패산이 아무리 쉬운 산으로 알려져 있지만 엄마가 아들을 데리고 설산 산행을 감행할 수 있었다는 게 여간 놀랍지 않았다. 신이 난 것은 엄마뿐이고 아들은 체육 시간에 따분한 국민 체조를 억지로 하는 듯한 표정이긴 했어도, 그래도 불평을 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만하면 집 근처에 효자라고 비석을 세워줘도 좋을 법했다. 나라면 못할 일이다.


난간을 잡고 가야 하는 좁은 암릉길에서는 판초우의를 쓴 한 무리의 등산객을 마주쳤다. 나는 그들을 먼저 보내고 움직였는데, 지나는 사람들 모두가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갔다. 그 뒤에는 홀로 산에 온 중년 남자가 스쳐 지나가며 좋아서 어쩔줄 모르겠다는 듯 “눈이 와서 너무 좋네요.”하고 인사했다. 일상 환경에선 좀처럼 겪을 일이 없는 일들인데, 단독한 인간으로서 풍경을 즐기는 일에 빠져 있는 와중에도 그런 친절들은 퍽 즐거웠다. 스몰 토크라고 부를 수도 없는 짤막한 인사가 오히려 긴 대화보다 편안하고 아름다운 색으로 삶의 한 부분을 채색한다는 사실을 나는 순백의 세상에서 새삼 느꼈다.

(쉬운길을 놔두고 굳이 걸어간 눈덮인 바윗길)

여담이지만, 한국인은 걸핏하면 잡담 몇 마디만에 나이부터 직업, 거주지, 혼인 상태 따위를 묻기 시작하는 이상한 습성이 있는 터라 나처럼 ‘현대 한국인의 보편적 모델’에서 벗어난 사람은 대답하기 피곤하기가 이를데 없는데, 산속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스몰 토크는 대체로 날씨나 등산로, 등산 장비 따위에 한정되는 법이라 부담이 덜하다. 공통의 관심사가 또렷한 상황이 교류를 편안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취미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하게 된다. 취미 모임에서도 말이 길어지면 결국은 호구조사를 시작하지만.......


아무튼 사패산이 별로 험하지 않다는 건 사실이라, 난간을 잡고 눈 덮인 암릉을 좀 오른 뒤로 데크 계단을 지나자 금방 정상이었다. 그렇게 헤맸는데도 들머리부터 두 시간 반이 안 걸린 셈이다. 당연히 정상 정복의 벅찬 감동보다는 나 개인에게 남겨진 버킷 리스트를 또 하나 해결해서 강북 5산 등산을 마쳤다는 달성감이 더 컸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원래 가까운 산의 모습을 전망하며 사진을 찍기 좋다는 사패산 정상은 한창 눈이 내리는 와중이라 멀리 있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다 만 광경처럼 정상석 말고는 모든 게 다 흰색이었다. 이쯤되자 설경에 감탄했던 나도 허탈한 감이 있었다. 이래서야 어디 가서 사패산의 경치가 어떻다는 말도 할 수 없지 않은가.......


마침 사람도 없는 터라, 나는 혼자 우산을 쓴 채 사진을 찍는 중년 남성 등산객 딱 한 명과 사패산 정상의 넓은 공간을 공유하며 사진을 찍고 나무 밑의 바위에 주저앉아 싸늘한 김밥을 먹었다. ‘전설의 고향’ 같은 영상의 배경음처럼 바람소리와 까마귀 우는 소리가 흰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쏟아지는 눈 때문에 정상석이 뿌옇게 보일 지경이라 슬슬 하산이 걱정이었다. 길이 무난한 만큼 위험할 일은 없겠지만 서두르기로 하고 일어났다.


(렌더링 화면 같은 정상석과 배경)


다행히 하산하기 시작한 뒤로 눈은 그쳐서, 나는 방금 쌓인 눈이 빚어낸 설경을 감상하며 별 무리 없이 행복하게 걸었다. 검은 고양이도 봤고, 암릉도 재미나게 내려왔다. 그런데 어느 봉우리 부근을 지날 때쯤 귀신에 홀린듯 같은 길을 돌게 되었다. 등산을 안 해본 것도 아니고 손에 멀쩡한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눈이 문제였다. 좀전까지 신나게 내린 눈이 길의 흔적을 지워버린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산길이라는 건 잘 닦이지 않은 곳도 많을 뿐더러 재수가 없으면 대낮에도 지나치게 되는 갈림길이 있다. 게다가 GPS도 칼같이 위치를 정확히 잡아주는 물건이 아닌 터라, 이렇게 인기가 없어 팻말이 정비되지 않은 데다가 눈까지 내려 사물의 윤곽도 발자국도 지워진 상태에선 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 감을 잡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봉우리 주변을 한 번 돌고 나선 ‘이런 경우도 있구만’ 하고 감탄하며 눈을 똑바로 뜨고 다시 길을 찾아나섰고, 같은 곳에 두 번 온 다음엔 초조해져서 내 신발이 찍어놓은 발자국을 단서로 삼아 길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봉우리 근처의 언덕을 올랐다가 막다른 길이라 돌아오기도 하고, 우회로가 있나 서성이기도 하며 한참 시간을 버렸다. 발자국을 되짚어간다는 발상 자체는 좋았는데, 시작부터 그렇게 하지 않아서 현장이 지독하게 훼손된 터라 도움은 되지 않았다. 초조해진 나머지 나는 조약돌을 떨어뜨리면서 다니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했는데, 천만다행으로 같은 곳을 네 번 돌기 전에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길은 뻔히 뚫려있는데도 길이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지나친 곳에 있었다. 다른 길보다 약간 좁았을뿐 특별히 이상한 구석도 없는 길이었는데 그토록 헤맨 게 놀라울 따름이다. 훨씬 춥고 눈보라가 심했다면 민망해서 어쩔줄 모르며 구조대를 부르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뒷산처럼 험하지 않은 산이 오히려 위험하다는 말이 실감나는 날이었다.

(눈이 오니 대체 어디가 길인지 보이질 않는다)

덤으로 그때쯤 나는 발끝이 젖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신고 있던 네파의 단종된 등산화 쉐도우 프로는 합성가죽 밑에 네파에서 자체 개발한 방수 투습 소재를 입힌 물건이었는데, 낡아서 방수력이 저하된 모양이었다. 게다가 고어텍스 XCR 재킷 아래의 팔 부분도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확인해보니 실제로 안이 젖은 것은 아닌데 발수코팅이 사라져서 겉감만 눈에 젖은 것 같았다. 양쪽 다 날씨가 훨씬 추웠다면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였다. 특히 걸으면서 지속적으로 눈에 닿는 등산화의 경우는 동상을 유발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너무 낡은 장비를 피하고 발수코팅을 잘 관리해야 하는 이유를 절실히 깨달았는데, 낮은 산에서 감당할 만한 위험으로 체감한 게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그렇게 봉우리 근처에서 길을 헤맨 뒤로도 피가 식는 순간이 한 번 더 왔다. 산을 오를 때 지나온 ‘비밀의 길’이 어딘지 도무지 알아낼 수 없었던 탓이다. 바위도 많고 엇비슷하게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틈도 더 있었던 데다, 내가 지난 바위의 앞뒤가 너무 다르게 생겨서 또 한참 길을 살펴야 했다. 올 때 돌아서서 사진이라도 제대로 찍어놨다면 훨씬 나았을 일이라 또 한번 반성했다.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는 흥분과 경탄에 압도되어 앞만 보고 서두를 일이 아닌 것이다.


비밀의 길을 지난 뒤로는 평탄한 둘레길이나 다름없어, 나는 겨우 숨을 돌리고 원점으로 회귀했다. 하산 시각은 5시 30분. 등산에 2시간 반, 하산에 3시간 걸렸으니 식사 시간 10분을 빼도 20분 이상 길을 헤맨 셈이다. 대단한 시간은 아니지만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경험이었다. 등산계에서는 이렇게 엉뚱한 길을 헤매는 것을 ‘알바’라고 부른다. 본업이 아니라 부업을 했다는 뜻에서 왔다는 게 정설인데, 이날 나의 알바는 길을 잘못 들어서 한참 뒤에 돌아간 게 아니라 아예 갈 길을 찾지 못했다는 점에서 더 악질적이었고, 방수가 되지 않는 장비로 설산을 돌아다녔다는 점에서도 위험했다. 그리하여 나는 오래 지나지 않아서 등산화와 하드쉘을 새로 들이게 되었으니, 역시 초보일수록 애초에 좋은 장비를 사야 중복 지출을 피할 수 있다는 지론이 한층 더 확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누가 ‘히말라야를 가는 것도 아닌데 돈낭비’라고 하든말든 내 목숨은 남이 챙겨주지 않고, 험지의 경탄스러운 광경을 즐기는 데에는 그만한 준비가 필요한 법이다.


아무튼 나는 심기일전한 나는 그 다음주에는 눈덮인 북한산에 오르게 되었는데, 여기선 설산을 맛보는 정도를 넘어서 왜 등산의 꽃이 설산인지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물론 아이젠을 끼고서.



교훈

낮은 산이라도 길을 알아보고 다니자. 갈림길을 정확히 찍어놓은 블로그나 등산코스 전체를 촬영한 영상을 즐겨찾기 해놓으면 도움이 된다.

아이젠을 갖고 나가기 전에는 문제가 없는지, 등산화에 잘 맞는지 확인하자. 

여분의 양말과 티셔츠를 챙겨 몸이 젖은 상태를 피할 수 있게 대비하자.

길을 놓치지 않게 주변을 주의깊게 살피고 다니자.

친절한 인사는 등산을 한층 더 즐겁게 한다.


*추신

저는 언제나 돈과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종이책, 전자책: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9577892619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kz1M5


*추신

모두의 안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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