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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Dec 11. 2024

끝없이 걷고 싶은 북한산 의상 능선의 설경1



사패산의 설경을 헤매다 구사일생으로(과장이다) 돌아온 나는 공모전용 원고 수정에 다시 매달렸다. 그러나 별로 잘 되지 않았다. 잘 풀리는 소설은 술술 풀려 작품 완성도와 별개로 며칠만에 끝나는데, 이번 소설은 늘이고 고치고 다시 바꾸기를 반복하자 단편으로 출발한 게 누더기 중편이 되어 있었다.계획과 다르게 마구잡이로 만들어진 물건을 보기좋고 짜임새 있는 듯하게 고치기란 지난한 일이라, 나는 자신이 본격적인 암흑기에 빠져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게 아마 사실일 것이었다. 산에 다니며 내가 물리적으로 오르기 힘든 곳에 올라갈 수 있다는 건 알게 되었지만, 그리고 그게 무척 기분 좋은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삶의 다른 부분까지 개선되거나 새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 건 아니었다.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된 이후 인생이 바뀌었다며 강연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수도 없이 많아도 나는 거기 속하지 않았다. 어쩌면 등산은 시간을 잡아먹고 관절 건강을 저해하면서 높은 곳에 오를 뿐인, 불합리한 중노동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러거나말거나 눈 덮인 사패산에서 느낀 재미를 잊지 못하고 다음주에 곧장 북한산에 가기로 했다. 목표는 의상 능선. 봉우리를 여러번 오르내리는 능선이라 근래에 들어 정비가 되기 전에는 무시무시한 고급자 코스로 불렸다는 곳이다. 얼마나 힘든지 험한 능선으로 가장 유명하다는 설악산의 공룡 능선을 가기 전에 연습삼아 다니는 코스라고도 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곳을 오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같은 건 전혀 하지 않고 아무 망설임 없이 출발했다. 서울 산은 다 가봤으니 까짓 거 못 갈 이유도 없지 않나, 하는 자신감이나 만용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쉬엄쉬엄 가면 딱히 못 갈 이유도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로 겨울에는 물이 다 떨어져 위험해질 일도 없으니 고열량 음식과 배터리만 충분하다면, 그곳이 걸어다니는 길인 이상 얼마든지 다닐 수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또 혼자 갈 테니까 아무도 그만 내려가자고 하지 않고, 조금만 더 가자고도 하지 않는다. 내키는 대로 가다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는 내멋대로 내려가면 된다. 어느 시점부터 힘들어 죽을 지경이 되는가, 무릎이 맛이 갈 예정이 되는가는 이제 민감하게 포착할 수 있으니 딱히 건강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요컨대 목표도 책임도 없으니 실패할 것도 없는, 완전한 여가 생활의 영역이다. 아마도 이렇게까지 완전무결한 수준의 여가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의상 능선으로 가는 길은 지하철을 타고 가서 구파발에서 버스를 타야 했다. 서울 산만 다닌 만큼 어지간한 산은 다 지하철만 타고 다닌데다가 원래 버스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약간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래서 북한산성 탐방 지원 센터에서 가는 원래 코스 대신 지하철역 인근의 들머리를 통해 일단 북한산의 아무 길로나 올라서는 방법을 찾아봤으나, 원래 가려던 의상 능선과는 너무 다른 길을 길게 가야 하는 데다가 모르는 길을 헤맬 위험은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길을 잃지 않으면 새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격언도 있지만 그건 인생살이와 도전에 대한 얘기고, 일반 등산객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산속에서 눈을 맞으며 같은 길을 몇 번이나 돌고 어느 바위 틈을 빠져나가야 하나 몸을 여기저기 밀어넣어보면 길을 잃는 낭만도 적당한 수준이 좋다는 걸 알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으니, 바로 새 아이젠을 사는 것이었다. 집에 있던 아이젠이 맞질 않아 산에 가는 길에 사야만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 방면처럼 등산용품 상점가가 있는 방향을 택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고로 나는 마지못해 구파발에서 버스를 타고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 쪽으로 걸어올라가게 되었는데..... 버스를 타고 오래 이동하는 기분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그 시간에 북한산 옆을 지나는 버스를 타는 사람들이라곤 대개 등산객들인지라, 끼리끼리 지하철보다 더 좁은 곳에 모여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비슷한 목적을 갖고 이동하자니 알게 모르게 동지의식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든 안 하든 인생에 별반 차이가 없는 활동에 오늘 하루를 바치기로 한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그 느슨한 동지의식은 시위나 봉사활동, 혹은 여행에서 느끼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참견 당하지 않을 정도로 혼자인 동시에 무슨 일이 생기면 도움을 청할 수 있을 정도로 집단 속에 있다는 실감이랄까. 거기에 자신이 기행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안도감까지 느껴져 마음이 편했다. 넓은 공간과 긴 시간을 공유하는 취미인들이 한 자리에 모인 순간의 느슨한 매력이라 할 만하다.


버스에서 내려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 방면으로 걸어가는 길은 넓고 한적했다. 도봉산 앞은 좁고 복작복작한 마을 같은데 비해 이곳은 번화한지 오래 지난 읍내같다. 등산용품점과 아웃도어 용품 대리점이 제법 많이 보였으나도봉산 앞보다 수가 적은 듯했고, 무엇보다 길이 넓어서 구경 갈 생각이 잘 들지 않았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대며 걷다가 때마침 아이젠을 쌓아놓고 파는 점포가 있기에 들어가서 등산화에 맞나 차보고 15000원에 구입했다. 너그러운 인상의 주인장은 내가 가게를 나설 때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인사를 해줬다. 단순한 인사일지라도 그 말에선 온기가 느껴졌다.


(적적한 길 끝에 뾰족한 산이 보인다)


참고로 내가 산 아이젠은 체인형 13점으로, 스파이크들을 쇠사슬로 연결해놓은 방식이었다. 13점은 스파이크가 열세 개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열 세 개일까? 스무개쯤 있으면 더 고정도 잘 되고 발바닥도 더 평평해져 걷기 좋지 않을까? 아이젠을 사기 전에 찾아봤다. 스파이크가 많아지면 걷기 편한 대신에 스파이크 사이에 눈덩이가 뭉치기 쉬워진단다. 그러면 당연히 눈덩이를 붙이고 눈 위를 걷게 되어 아이젠을 쓰나마나가 된다. 결국 편안함과 실용성 사이에서 잘 타협한 지점이 13점 가량이라는 것이다. 어떤 물건에 숫자가 붙어 있으면 그 수가 클수록 좋을 거라고 넘겨짚는 경향이 있는데, 역시 뭐든 잘 알아보고 정할 일이다.


살 것도 샀겠다, 걸음을 재촉해서 의상 능선으로 향했다. 북한산성 방면 등산로는 가장 대중적인 길이라 그런지 대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큰 도로가 나 있어서 영 걷는 맛이 나지 않았는데, 의상 능선으로 통하는 길은 그 대로 중간에 있었다. 뒷산 산책로보다 더 작은 샛길이라 그 악명 높은 능선으로 간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 길이었다. ‘의상 능선 진입로, 어서오십시오’같은 대문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 악명에 걸맞은 표식 하나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


참고로 이날 나는 유니클로 히트테크 위에 라푸마의 플리스를 입고, 그 위에 K2의 바람막이를 걸쳤으며, 바지는 컬럼비아에 등산화는 네파, 배낭은 블랙야크, 등산 스틱은 헬리녹스, 양말은 다사마라는 꼴로, 그야말로 일부러 브랜드 중복을 피하려고 작정한 듯한 상태였다. 집에 있던 것을 발굴하거나 되는대로 싼 것을 그때그때 구한 탓이다. 등산계에서 교복이라 불리는 고가품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나, 나는 적당한 물건을 싸게 구해서 얼마나 쓸만한지 시험해보는 것도 등산의 커다란 즐거움으로 여기는 터라 불만은 없다.


이날의 주요 테스트 품목은 라푸마의 플리스였다. 따뜻하기로 유명해서 미군에서도 쓴다는 폴라텍의 써멀프로 원단을 채택한 옷이라 중고로 얼씨구나 사들인 물건이다. 실제로 착용감도 좋고 소매 조임도 유용하고 디자인도 등산복으로서는 괜찮았다. 그러나 앞판 안쪽에 바람을 막아주는 원단이 붙은 탓인지 600그램을 넘길 정도로 무겁다는 단점 때문에 도로 팔아버릴까 고민하다 입고 나온 것이었는데, 오르막을 오르면서도 지퍼를 열고 팔을 걷자 그럭저럭 덥지 않았고, 바람이 불 때도 별로 춥지 않았다. 통기성도 적당하면서 바람도 제법 막아줬다는 뜻이다. 플리스란 데워진 공기를 털로 잡아두면서도 땀이 마르는 걸 방해하지 않는 장점이 있는 반면 바람에 취약한 터라 플리스 차림으로 다닐 때면 바람막이를 주섬주섬 꺼내어 걸쳐야 할 때가 많은데, 그 번잡한 작업의 횟수를 줄여준다면 타 제품보다 200그램 정도 더 무거운 건 감당할 만하다. 옷 하나 걸쳐 입는 게 뭐가 그리 번잡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멈춰서서 등산스틱을 잘 놓고 가슴벨트와 허리벨트를 풀고 배낭을 내려 옷을 꺼내고 걸치고 다시 배낭을 매고 벨트들을 차고 다시 조정하길 반복하자면 귀찮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좋은 등산 장비는 배낭 착용시의 불편을 줄여주는 방향으로 발달한 것이다.


(난간의 유무보다 디딜곳의 상태가 난이도를 좌우한다)


의상 능선으로 들어가는 길에 나는 곧바로 바람막이를 벗고 플리스 차림이 되었다. 0도에 가까웠지만 그 판단은 금방 정답으로 밝혀졌다. 한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난간 없이 오를 수 없을 지독한 경사로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이렇게까지 빠르게 험해지는 길이 다 있나 싶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런 한편으로 상반신까지 혹사하며 산을 기어오르는 작업에 깊은 희열을 느꼈다. 눈이 있든 없든 역시 등산은 네 발로 기어다녀야 제맛이다. 그리고 ‘제맛’ 운운할 정도로 즐겁다면 다른 의미 같은 건 딱히 찾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닐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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