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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어는 어디로 가고 어디서 오는가 출간과 후기

작업과정과 수상 뒷얘기

by 이건해



제12회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단편부문에서 ‘장어는 어디로 가고 어디서 오는가’로 수상했고, 해당 단편소설이 수록된 수상작품집이 출간되었습니다. 더할나위 없이 기쁜 일입니다. 2023년은 한 해 내내 모든 공모전에서 실패했기에 특히 각별했죠. 사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이제 대중의 평가를 받는다는 게 두렵기도 합니다만 그리 이상한 심리는 아니겠죠.


아무튼 책까지 나왔으니 작업과정과 수상 뒷얘기를 적어봅니다. 짤막한 단편 소설 하나 써놓고 후기를 따로 적는것도 좀 민망한 구석은 있습니다만, 소설보다 수필을 훨씬 많이 써왔고 독자들의 평도 그쪽이 더 좋았던 작가니까 이런 잡담을 하고 싶어하는 건 천성일지도 모릅니다.


‘장어는 어디로 가고 어디서 오는가’(이하 ‘장어는’)는 상당히 충동적으로 시작된 작품이었습니다. 이런저런 교양 과학 방송을 듣는 게 취미라 ‘장어의 생태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라는 소재가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는데, 단편을 써야할 타이밍이 되었을 때 이거 재미있겠군, 하고 골라낸 것이죠. 이야기 구조도 비교적 단순하게 정해졌습니다.

-장어가 아주 깊은 해구에서 알을 낳는 것 같다는데, 그렇다면 이걸 찾아가는 얘기면 되겠군.

-바다 깊은 곳으로 간다면 거기서 상상도 못한 뭔가를 보면 되겠지?

-그런 걸 보면 미치는 게 제맛이지!

대강 이 정도의 과정이었죠. 영화 ‘어비스’나 ‘이벤트 호라이즌’의 영향이 강했습니다. 거기에 크툴루 신화 계통의 정서도 대거 반영되었습니다만, 이야기를 쓰면서 미지의 존재에 대한 형언하기 힘든 공포는 이야기의 주된 정서에서 빠졌습니다. 의도적으로 빼기로 작정하고 시작한 것은 아닌데, 쓰다보니 그렇게 되더군요. 확정되지 않은 궤도에 올려놓은 이야기는 원래 자기 마음대로 흘러가는 법입니다.


주인공은 드론을 제작, 조종하는 드론 전문가로 설정되었습니다. 마리아나 해구 탐사는 잠수정으로 이미 성공한지 오래되었으니 그보다 더 좁고 험한 곳을 보게 해야 했고, 그러려면 드론이 필요했던 것이죠. 시기적으로도 드론이 대중에게 익숙한 기술이라 더 현실감이 있었고요. 물론 드론으로 탐사하면 생명의 위기라는 절실한 감정이 희박해진다는 문제가 발생하지만, 애초에 뭔가를 목도하는 게 중심 콘셉트였으니 그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드론이 아주 소중한 추억을 담고 있으며, 상실했다간 개인의 재정이 파탄날 지경인 물건이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순식간에 죽어버리는 것보다는 어떤 일에 오랜 공력과 엄청난 돈을 들였는데 한순간에 망해서 빚더미에 앉는 쪽이 현대인들에게 훨씬 공감 가는 공포일지도 모르겠군요.


주인공의 성별은 여자로 택했습니다. 이건 크게 고민하지 않았는데, 일단 제가 남자를 주인공으로 삼으면 수필 쓰던 버릇 탓인지 과도하게 개인 감정을 투사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나쁜 습관이라곤 할 순 없지만 이건 그렇게 생활밀착적인 사소설 느낌이 나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탐사의 동기를 정하자니 장어 얘기에 부나 명예를 끼워넣을 수가 없었고‘그 사람은 대체 왜 그랬을까’라는 한스러운 의문이 훨씬 적합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죽은 애인의 발자취를 따라간다는 그림을 그려야 했던 것입니다. 물론 저도 ‘그런 감상적인 이유로 탐사에 매달리는 것이 여자일 이유가 있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이 구도에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가 영향을 줬습니다. 이 영화는 약혼자가 등산중 사망한 시점에서 시작하죠. 아름답지만 서글프고 덧없으면서 아련한 감동을 자아내는 구도입니다. 음, 쓰면서 돌이켜보니 정말 작품이란 자기가 좋아하는 맛의 총합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군요.


그리하여 러브레터식의 감성이 기조가 되어 ‘장어는’이 시작되었습니다. 제법 즐거운 작업이었어요. 그러나 ‘해저에서 뭘 보고 미친다’라는 콘셉트만으로 제대로 된 이야기가 될 턱이 없는터라 주인공이 지독한 실패의 나락에 떨어지는 난관을 추가했고, 조력자와 반동인물도 설정을 구체화했습니다. 조력자는 간달프 같은 현자로, 반동인물은 바다사나이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정했죠. 그러나 그대로 놔두면 재미가 없으니까 조력자는 뿌리깊은 열등감과 지식 추구의 광기에 휘말리는 사람으로, 반동인물은 근육맨인 동시에 지독하게 종교적인 인물로 뒤틀었습니다. 이중에서 반동인물의 이미지는 영화 ‘익스펜더블’의 바니 로스가 영향을 줬군요. 참고로 바니 로스는 실베스타 스탤론이 연기한 중후한 마초맨인데, 그러면서도 미신에 집착하는 구석이 귀여운 아저씨입니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은 리 크리스마스(제이슨 스테이섬)지만 시종일관 멋있고 쿨하고 날렵하고 강인하며 도움따위 필요없다고 외치는 크리스마스보다는 한물 가서 흠씬 두들겨맞고 고문당하면서도 민머리 적에게 ‘네 미용사가 보냈다’라고 농담을 흘리고 항상 행운반지를 챙겨 다니는 아저씨가 더 잘 만들어진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산으로 갔군요. 아무튼 이렇게 조형된 세 사람, 그리고 엑스트라들을 태운 배가 탐사 지점에 가서 드론을 잠수시킨다는 얘기가 주요 골자가 되었습니다만, 실제로 전개를 해보니 탐사 이야기 자체가 주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실종자나 고대문명의 비밀을 추적하는 식의 미스터리가 아니니까 단서를 찾고 추리하고 탐사 방향을 설정하는 등의 전개가 될 수 없었던 것이죠. 특히 사람이 직접 가는 게 아닌 만큼, ‘이걸 봐, 고대 문자야!’ ‘그걸 누르면 어떡해!’ ‘그가 마지막에 남긴 메시지야. 리베라......메?’ 같은 얘기가 나오기가 부자연스러웠습니다. 대신에 탐사를 둘러싼 인물들의 생각과 각자의 사정 이야기가 묵직한 분위기를 만들게 되었죠. 이건 마치 영화 ‘죠스’에서 상어는 얼마 안 나오고 인물들이 딴소리만 길게 나누는 것과 비슷한데, 저는 이런 식으로 인물들이 큰 사건 이전에 묘하게 묵직한 듯한 잡담을 늘어놓는 걸 좋아해서 이 역시 취향에 맞게 진행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쓰려면 계속 쓸 수 있었겠죠. 단편인 만큼 한없이 쓸 수는 없었지만요.


그렇게 은근한 긴장감을 조성하다 전개를 한 번 엎고 더 강한 동기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이야기는 끝에 가서 터무니없는 광경을 보여주며 전면전을 맞이하게 되는데, 초고의 대단원은 지금보다 훨씬 장황하고 잔인하고 정신나간 것이었습니다. 인물들의 생각이 완전히 뒤집혀서 현학적인 논쟁을 거친 끝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였죠. 그러나 퇴고할 때 보니 아무래도 긴장감이 최고로 고조된 순간에 선문답을 방불케하는 말싸움을 길게 하는게 맥을 끊는 것 같아서 대폭 삭제했습니다. 분량 깎기란 참 괴로운 일인데, 그래도 잘 편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저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원고는 제법 마음에 드는 편이었습니다만, 어쩐지 빛을 보지 못하고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작품에 대한 저의 평가도 하루하루 떨어졌죠. 하기야 유명작가들의 작품처럼 감동적인 메시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과학적 이론으로 난관을 극복하는 얘기도 아니니 누가 좋아하겠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스토리공모전에 투고할 때도 다른 작품을 회심작으로 여겼죠. 그건 스케일도 크고 나름대로 사회비판적이며 재생의 메시지도 갖춘 작품이었으니까요.


투고 후에는 ‘장어는’이 인정을 받을까 기대하긴커녕 자신이 뭘 어디 투고 했었는지조차 까먹었습니다. 그게 말이 되나 싶겠지만, 이건 제 나름대로 상처를 피하는 방법으로 몸에 익힌 것입니다. 투고한 다음 결과를 오매불망 기다리지 않고 관련된 정보를 최대한 잊어버리는 것이죠. 마치 직구가 한 달씩 걸리던 시절에 뭘 샀는지 잊어버리는 식이랄까요. 이러면 기대도 사라지고 자연히 상처도 희미해지죠.


그런데 몇달 후, 전혀 뜻밖에도 최종후보에 올랐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떤 작품이 후보가 되었냐고 물어야 했죠. 답은 ‘장어는’이었습니다. 투고작 2900여편과의 경쟁에서, 실상 거의 포기했던 작품이 최종후보가 되었다니? 반면에 회심작은 아예 예심도 통과하지 못한 듯했습니다. 이런 일도 있구나 싶더군요. 그 뒤로 최종발표까지 ‘똥줄이 타는’ 심정으로 기다려야 했습니다. 정말이지 피말리는 기분이었어요. 유력한 후보라는 소리까지 듣는 바람에 기껏 지워놓고 있던 기대감이 최대치로 끌어올려질 줄이야. 여기서 떨어지면 기분이 얼마나 처참할까 무섭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런 소식을 미리 전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그냥 최종결과만 알려주시는 게 작가들의 건강에 좋을 것 같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이 관행이 어디선가는 누군가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다행히도 최종 수상이 결정되었고, 출간 일정은 비교적 여유로운 것치고 상당히 바쁘게 진행되었습니다. 일단 첫 번째 미팅을 하고 근사한 상장과 꽃다발과 소소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이런저런 상을 몇 번 받고 다양한 방식으로 축하를 받았지만, 꽃다발을 받는 건 처음이라 각별하더군요. 문학상 종류는 상을 받아도 형체로 남는 증거가 책 말고는 없는 터라 그동안 상을 받을 때마다 스스로 꽃을 사놓곤 했는데, 이번엔 그게 괜한 일이 되었다는게 즐거웠습니다. 물질세계에서 살아가는 이상 기쁨의 증거물이 적당한 크기로 생활 공간에 존재한다는 건 중요한 일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되더군요. 아무튼 환대받는다는 건 멋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제법 힘든 가시밭길이 이어졌습니다. 전문가의 진단을 거쳐 완성고라고 생각했던 작품을 몇 번 더 수정해야 했으니까요. 전문가 선생님은 제가 흐름상 이런 것도 넣을 만하겠다고 생각하고 추가했다가 반쯤 깎아낸 대결구도가 “장미의 이름”을 연상케하는 강점이라고 진단했고, 원고는 그 강점을 살리는 방향으로 상당부분 재편되었습니다. 즉, 곁다리로 투고한 작품의 부차적 요소가 손꼽히게 돋보이고 인정받았던 것이니, 작품의 운명이란 도통 알 수 없는 것이구나 싶죠. 여기서 잠시 덧붙이자면, 어느정도 기간을 두고 객관적인 눈으로 자평해봐도 썩 괜찮다 싶은 작품이 어떤 방식으로도 아직 빛을 보지 못했다면 그건 단순히 운이 없는 것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니 작품을 쉽게 포기하지 마세요.


초대형 수정을 거친 뒤에는 간신히 한숨 돌리고 간신히 평범한 교정작업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더군요. 원래부터 문장이 난잡한데다가 수정을 거치며 여기저기 나사가 빠진 곳이 제법 되어서 몇 번을 재수정해야 했습니다. 수상 이후로 원고를 고친 시간이 수상 이전까지 작품에 들인 시간보다 길었을 겁니다. 초고부터 세면 원고를 열 번은 족히 교정했을 거예요. 애초부터 작품을 완벽하게 써야겠다는 다짐을 가슴에 새기는 나날이었습니다. 작가의 부족한 실력 때문에 덩달아 고생한 분들께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무튼 그런저런 과정을 거쳐 ‘장어는 어디로 가고 어디서 오는가’가 완성되어 다른 네 분의 작품과 함께 실물로 인쇄되었고, 마침내 여러분도 읽어보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꾸준히 수필을 써온 사람으로서 이 작품과 출간에 얽힌 얘기를 한참 더 적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랬다간 단편인 작품보다 후기가 더 길어지는 사태가 벌어지겠죠? 여기 적지 못한 이야기는 또 좋은 기회에 작품에 담기로 하겠습니다. 그간 응원해주신 우리 가족과 독자분들, 초기부터 조언해주신 과학소설작가연대 동료분들, 과학 커뮤니케이터들과 과학과 사람들 커뮤니티 회원들, 출판관계자분들, 좋은 작품을 함께 책에 실어주신 작가분들께 감사드리고, 창작을 이어가는 수많은 작가분들께 존경을 표하며 이 로컬 영화제 수상자라도 된듯 수다스럽고 주제넘은 후기를 마칩니다.


2025.05.01.이건해



(2025 제12회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단편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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