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에 흔히 그럴 수 있듯 길을 약간 잘못 잡은 사람들과 헤어진 뒤로 조금 더 걸어올라가자 이윽고 포대능선의 전망대가 나왔다. 전에 망월사 방면으로 왔을 때는 높고 뾰족한 능선의 첨단부를 감탄 속에 걸으며 도착한 곳인데, 이날은 너덜너덜하게 지쳐서 도착한 터라 풍경이고 뭐고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 앞의 도봉산 정상을 보는 심정은 약간 지긋지긋할 따름이었다. 등산을 하는 동안 이런 느낌을 받는 건 처음 같았다. 아직도 한참 가야 하나 싶어 막막하기도 했다. 슬슬 발바닥에서 고통이 찾아올락말락 하는 상태이기도 했고. 보통 어려운 과업을 해치워야 할 때는 목표까지의 과정을 분절해서 조금씩 하라고들 하는데, 산에서는 적용하기 어려운 얘기다. 눈으로 봐선 남은 거리가 감이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과 거리를 지혜롭게 계산하는 것보다는 정신없이 걷다보니 벌써 정상이네, 하는 식을 선호한다. 어리석은 방식이지만 그편이 의외성이 많아서 즐겁다. 물론 경험이 늘면 어림짐작이 저절로 정확해지겠지만.
잠깐 숨을 돌리고 다시 움직였다. 금방 Y계곡과 우회로 사이의 갈림길이 나왔다. 암벽을 타고 절벽을 기어내려갔다가 다시 기어올라 날카로운 능선 첨단부를 걷게 되는 Y계곡은 도봉산 암릉의 백미다. 아마 이렇게 오싹한 재미를 맛볼 곳은 좀처럼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길게 고민할 것도 없이 우회로를 택했다. 거친 암릉이라면 이미 지쳐빠질 정도로 타고 왔기 때문이다. 암릉이라면 질리지 않고 계속 걸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것도 한계가 있었다.
우회로는 돌이 조금씩 섞인 오솔길로, 특별히 걷기 어려울 건 없었다. 지금까지 온 길에 비하면 따분하기 짝이 없는 길이었고, 심지어 생각보다 길기까지 했다. 목적지가 같은데 완만한 길이면 멀리 돌아가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우회로를 택한 걸 금방 후회하고 말았다. 매운맛에 중독된 나머지 심심한 음식을 맛없게 느끼는 사람 같은 꼴이다.
어쨌거나 부담은 없는 길이라 멍하니 걸은 끝에 자운봉 앞의 마당바위에 도착했다. 등산객 너댓명이 여기저기 앉아 쉬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대충 주저앉아 숨을 돌렸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보통 마당바위는 먼 풍경을 조망하기 좋은 반면, 이곳은 자운봉과 신선대만 보게 되는 곳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그러면서도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편하다. 포근하고 고요한 정원에 온 듯한 느낌이랄까.
그런데 그 고요 속에서 어느 아저씨가 일어나더니 스마트폰이 안 켜진다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보자니 부팅중에 문제가 생겨 정지한 모양이었다. 나는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은 모두 볼륨 줄이기와 전원 버튼을 길게 눌러 강제로 재부팅할 수 있음을 알아서 그렇게 해봤는데, 어쩐지 먹히질 않았다. 옆에 있는 다른 아저씨가 해보겠다고 가져간 뒤에야 내가 누른 게 전원이 아니라 어시스턴트 버튼이었다는 걸 알았으나, 그때는 이미 그 아저씨가 재부팅에 성공한 뒤였다. 나는 조용히 다시 앉았다. 딱히 대단한 공을 세우고 싶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전화위복이었다. 스마트폰 주인이 크게 기뻐하면서 막걸리를 꺼내더니 재부팅에 성공한 아저씨에게 잔을 강권한 것이다. 아마 나였다면 거절하지 못해서 심히 난감했을 것이다. 나는 산에서 조심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구나 생각하며 신선대로 도망쳤다.
막걸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사실 나도 산 정상에서 파는 막걸리를 보면 마시고 싶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절대 마시지 않는다. 어머니가 길에서 넘어져 어이없이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는 데다가, 나도 산에서 넘어진 경험, 발목이 꺾일 뻔한 적이 제법 있기 때문이다. 넘어져서 다친 건 아니지만, 무릎이 상한 뒤로 오래도록 치료중이라 어떤 상처는 영혼에 새겨진 듯이 도통 낫지 않는다는 것도 매일 느끼고 있다. 그러니 다칠 위험이 높아지는 선택은 피하려는 것이다. 다쳐서 산에도 갈 수 없게 되는 시간을 견디고 싶지도 않고.
험악한 길을 거쳐 온 터라 이날의 신선대는 오르기가 수월했다. 나는 정확히 4시에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허공에서 떠도는 듯 평온한 광경을 누리다 하산을 시작했다. 아무리 힘들어서 쉬엄쉬엄 왔다지만 초입에서 정상까지 네 시간이나 걸렸으니 느려도 정도가 있지 싶다.
가급적 쉬운 길을 찾아 선인봉을 왼편에 끼고 내려가다, 갈림길에서 119 구조대 방면을 택해 꺾었다. 마당바위쪽은 전에 가봤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친 와중에도 길을 다 가보려는 집착은 정말이지 제정신이 아니구나 싶지만, 이번에는 그게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마당바위 쪽은 탁트인 경관이 멋진 대신에 경사가 약간 있는 반면, 119구조대쪽은 화장실도 있을뿐더러 길이 아주 평탄했던 것이다. 경관이야 좀 아쉽지만 이미 실컷 봤고, 이제 편한 길을 가고 싶었다.
그나저나 그 와중에 신비한 사람들을 또 봤다. 20대 가량의 젊은 여성과 10대의 남동생 같은 일행이 하산하는 중이었는데, 가지고 있는 짐이라곤 동생이 진 책가방 하나와 여성이 한쪽 어깨에 맨 에코백이 전부였다. 크로스백까진 그렇다쳐도 도봉산 정상에 에코백을 매고 오다니, 가방이 흘러내리지 않게 하는 묘수가 있는 걸까? 정말이지 산을 즐기는 방법은 제각각인 모양이다.
6시 40분쯤 산을 완전히 빠져나와 대충 순대국밥집에 들어갔다. 순대가 좀 적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뜨끈한 밥알과 순대와 고기와 막걸리는 빠르게 몸에 스며들었다. 역시 험준한 길을 기어오른 끝에 누리는 정상의 평화가 더 아름답듯이, 참고 견딘 끝에 섭취하는 밥과 술이야말로 쾌락을 배가하는 것이다......라고는 했지만, 이날은 어찌나 힘들었는지 귀가길도 끝없이 길게 느껴졌고, 집에 와서도 뭐 하나 한 것 없이 잠들고 말았다. 건강도 체력도 심각하게 부족한 모양이다. 나는 한층 더 더워질 다음 산행은 좀 쉬운 곳에서 여유를 즐기며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주 쉽고 유명한 곳...... 이를테면 청계산이라든가.
교훈
*햇살이 강해지면 선글라스는 안구보호에 매우 도움이 된다.
*산길의 난이도를 미리 알아보는 게 좋다. 국립공원공단에서 구간별 난이도가 색깔로 표기된 탐방안내도를 찾을 수 있다. 물론 미리 받아두지 않으면 산속에서 검색해서 받기 번거로운 일이고, 내 위치도 바로 알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지도앱의 등고선을 확인하는 게 제일이다. 등고선이 촘촘할수록 경사가 심하다. 경사도의 절대값이나 길의 험한 정도를 파악하긴 어렵지만 길을 택할 때는 도움이 된다. 참고로 등고선이 산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뾰족하면 능선, 반대로 산 중심으로 파고든 곡선이면 계곡이다. 일반적으로 능선은 험한 대신 경치가 좋고 계곡은 숲길인 대신 볼 게 없고 정비가 되지 않았다면 잔돌이 많다.
*산속에서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가 오랫동안 일상생활이 불편해질 수 있다.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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