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과 인왕산에 다녀온 뒤로는 또 2주간 등산을 쉬었다. 그 사이에 영화 ‘파묘’의 팝업 스토어에 갔다오기도 했고, 공모전에서 입상이 좌절된 소설을 손보기도 했다. 한편으로 몇 번 신지도 않았는데 낡아서 밑창이 벌어진 컬럼비아 등산화의 밑창을 다시 붙였고, 유명한 등산화는 중고장터에서 눈에 띄는 족족 사다 신어보고 후기를 남겨야겠다는 리뷰어의 집착에 사로잡혀 ‘호카’의 트레일러닝화인 스피드고트 미드를 싸게 사서 신어봤다. 이것은 아웃도어 신발의 디자인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호카 제품답게 멋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가벼웠다. 한쪽이 210g에 불과했으니 공기로 만든 수준이었다. 이 녀석에 대한 이야기는 이걸 신고 산에 갔을 때를 위해 남겨두자.
이 시기에 새로 들인 등산화 중에는 한국 등산화 브랜드 중에 가장 오래 된 ‘송림’ 등산화도 있었다. 송림 수제화는 무려 1936년에 시작되어 지금껏 이어지는 기업으로, 산악인 허영호 씨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애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신발 관리나 등산화에 대해 찾다 보면 유튜브에서 알고리즘으로 제작 과정을 다룬 다큐를 추천해주기에 나도 잘 알고 있었는데, 중고 장터에서 송림의 오래된 가죽 등산화가 우연히 포착돼서 냅다 사버린 것이다. 유명 브랜드 등산화를 대부분 신어보기로 작정한 이상 한국에서 가장 유서깊은 등산화를 놓칠 수야 없는 일이었다.
다만 주문한 등산화를 받아보니 어찌나 오래된 물건인지 가죽은 굳어가는 중이었고, 밑창은 이미 플라스틱처럼 굳은 뒤였다. 나는 가죽 로션으로 유분을 공급하고 밑창도 온갖 방법으로 살려볼 궁리를 했는데, 굳은 밑창을 되살릴 방법은 창을 아예 바꾸는 것 말고 없는 듯했다.
결국 개화산에서 짧게 신어본 뒤로 송림 수제화에 문의하고 수표교의 매장으로 직접 찾아갔다. 그닥 넓지 않은 건물의 2층에 자리한 매장은 양쪽에 온갖 신발과 작업도구와 상장과 사진 등등이 빼곡하지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카운터 너머에는 유튜브에서 몇 번이나 본 4대 사장이 서있었다. 유명인을 만난 기분이었다. 내가 전화로 얘기한 등산화를 꺼내어 보여주자, 그는 자기들도 구할 수 없는 옛날 물건을 어떻게 구했냐며 놀라워했다. 그가 감탄하며 보여준 설포에는 송림수제화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는데, 이 번호의 국번이 269다. 80년대 부터 90년대까지 사용된 서울 국번이니 대략 30년 이상 된 물건인 셈이다(나중에 더 알아보니 80년대 모델이었다). 나는 좀 우쭐해졌지만, 딱히 물려받은 것도 아니니 자랑스레 여길 건 아니라 금방 정신을 차렸다.
이 등산화에서 손볼 부분은 두 가지, 밑창과 굳어가는 가죽이었는데, 밑창 교환은 여전히 가능하다 했다. 이제 호환되는 밑창이 없거나 낡아서 교체 불가능한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문제는 가죽이었다. 사장은 여기저기를 만져보곤 발목의 쿠션도 살아있고 가죽도 아직 살릴 만하다며 가죽 크림이나 밍크 오일을 지속적으로 발라주면 다시 부드러워질 거라 했다. 나는 등산화 270을 신어야 새끼발가락이 편하므로 265인 이 등산화의 발볼을 좀 넓힐 수 없을까 물었으나, 그는 가죽이 오래되어 굳은 상태면 갈라질 수 있다며, 발이 밀리지 않게 단단히 조이는 게 최선이라 답했다. 하기야 40년 된 신발이니 되살리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나는 7만 원에 수선과 택배 배송을 의뢰하고 돌아왔다. 주워듣던 것보다는 좀 비쌌지만, 두꺼운 밑창을 한땀한땀 찔러 꿰매는 과정의 고난을 영상으로 여러 번 본데다, 직접 밑창을 손본 경험도 많은 터라 불만스럽진 않았다. 전통있는 수제화점을 직접 보고 낡은 가죽 신발을 되살릴 방법을 알아낸 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그리하여 며칠 지난 뒤 받은 등산화는 말끔한 새 밑창을 달고 있었으며, 가죽도 제법 말끔해진데다 끈도 새것이 되어 있었다. 이것만해도 거짓말같은 변화였다. 잘 만든 가죽 등산화의 매력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엉망이 된 것 같아도 결국은 살아난다. 살아있는 물건이 아닌데도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후로 이 등산화에 종종 밍크 오일이나 가죽 로션을 바르고 적절한 색상의 슈 크림까지 사용해가며, 신발을 마치 골룸이 반지 아끼듯 정성껏 관리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기에 큰 불편이 없는 수준으로 되살릴 수 있었다. 발이 밀려서 새끼발가락이 찍히는 문제는 발등쪽에 부드러운 쿠션을 붙여서 해결했다. 표준에서 벗어난 발 모양으로 잡다한 신발을 신어보며 질환과 싸우는 동안 익힌 꼼수가 제법 도움이 된 셈이다.
그리하여 이 등산화를 신고 갈 목적지로는 ‘불곡산’을 택했다. 양주 불곡산. 도봉산 역에서 다섯 역 더 간다. 이쯤 되면 확실히 서울 산은 아니고 근교 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쨌거나 1호선만으로 갈 수 있는데다 높지도 않으면서 암릉이 빼어나다고 하니 가볼 만도 했다. 물론, 모르는 산을 신어본 적 없는 등산화로 간다는 건 다소 과감한 짓이다. 도중에 발이 아프면 대단히 곤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심각한 험산도 아니고 466미터로 소소한 정도이니 처음 신는 클래식 등산화를 믿어볼 만하다고 판단했다.
그나저나 양주역은 멀었다. 일기를 쓰고 한숨 자고 일어나도 될 지경이었다. 몸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11시 46분에야 역 밖으로 나설 수 있었는데, 대로 너머의 풍경이 나같은 서울 촌놈에게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평평한 들과 그 너머의 산들을 제외하면 건물이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나 볼 만한 광경이었다. 이 정도의 벌판을 본 적이야 있지만, 그 옆을 직접 내 발로 걸어보는 것은 대단히 오랜만이었다. 논산 훈련소 시절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들머리까지는 거리가 제법 되는 터라 40분 가량을 걸었다. 이제 기온은 31도에 달했고, 햇빛을 가려줄 사물은 아주 앙상한 가로수 뿐이라 우산을 써야만 했다. 얼굴과 목은 여름용 넥게이터로 가렸다. 그런 모습으로 보행자 없는 길을 하염없이 걷자니 황야의 방랑자가 된 기분이었다. 여름에 들머리가 먼 산에 간다는 건 상당히 괴로운 일이다.
불곡산 입구는 화강암으로 말끔히, 엄숙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잘 포장해둔 계단길이라 오르기가 어색했다. 산의 입구가 아니라 국립묘지에 들어가는 길 같았다. 젊은 등산객 두어 명이 가벼운 차림으로 오가는 게 보여 그나마 좀 마음을 놓고 걷기 시작했다. 길은 아주 완만한 숲길로, 산책 삼아 가볍게 걸을 뒷산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그런 수준이 이상할 정도로 계속 이어졌다. 아무리 낮은 산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오르막이 안 나올 수 있나? 지도를 열어본 나는 그제야 등산로가 아니라 둘레길로 들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15분쯤을 되돌아가니 잘 보이는 곳에 세워진 표지가 있었다. 내가 갔어야 할 길은 오른쪽이었다. 마음이 바쁘거나 길에 미혹되면 이렇게 귀신에 홀린 듯한 일이 대낮에도 일어나니, 롤플레잉 게임처럼 표지판이 보이면 일단 멈춰서 읽어보는 게 좋다.
30분을 허비하고 등산로를 오르기 시작하니 영 맥이 빠졌다. 기분만 맥이 빠지는 게 아니라 실제로도 이미 지쳐 있었다. 길은 적당히 바위가 섞인 흙길이었으나 옆의 나무들은 키가 작고 태양은 정수리에서 내리쬐어 그늘이 적었고, 덕분에 산인데도 황야를 걷는 기분이 길게 이어졌다. 나는 잠시 주저앉아서 숨을 돌려야 했다. 괜히 나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출발할 때부터 지쳐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가 한두번이 아니긴 했지만, 이날은 정말로 후회가 심했다.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많은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먹고살 돈을 벌거나 앞길을 닦거나 시원한 곳에서 휴식을 취할 때 왜 나는 고행을 자초해서 햇살 아래 달아오른 산을 오르고 있는가? 이미 몇 번이나 나름대로 해답을 내놓은 의문인데도 회의감이라는 감정은 제어할 수 없었다. 그만큼 벌써 죽을 맛이었다.
묘사할 것도 없는 평이한 오솔길이 계속 이어졌다. 오솔길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트여있어 숲의 쾌적함이 없는 길이라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경치가 트인 능선도 아니고 시원한 계곡도 아닌 길이라 도저히 즐길 수 없었다. 거대한 짐을 진 행상이 지나갔다. 벌이가 좋지 않아 빠르게 철수하는 모양이었다. 그만큼 뜨거운 날이었다.
이를 악물고 걷던 나는 결국 두 시 반쯤 그늘의 벤치 위에 늘어졌다. 두 시간만에 이렇게까지 지친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스크림을 사먹었어야 했다. 후회막급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첫사랑과 출판사에 투고한 원고와 떠나간 아이스크림은 돌아오지 않는다. 욕이 절로 나왔다. 나는 양갱과 물을 섭취하고 누워서 한참을 쉬었다. 그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차가운 계곡물이라도 한줄기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없는 것을 갈구해봐야 괴로울 따름이다. 나를 회복시켜줄 외부 요소라곤 벤치 하나뿐인 이곳에서 나는 내가 가진 것만으로 자신을 추슬러야 했다. 이게 바로 도시에서 벗어나 누리는 자유의 반대급부다. 자연의 어디든 지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겨울은 움직여서 스스로 열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여름은 땀을 내는 것 말고 몸을 식힐 방법이 없으니 단단히 준비해야 했다.
다행히도 일사병 단계까지 가지는 않은 듯, 그렇게 20분쯤 쉬자니 대충 기력이 돌아왔다. 지독했던 태양의 열기도 한풀 꺾였고, 어디선가 바람도 불곤 했다. 나는 다시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패턴으로 우는 매미 소리가 청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 컨디션과 가장 뜨거운 시각이 문제지, 산 자체에 문제가 있진 않을 것이다.
30분쯤 더 걸어 올라가자, 슬슬 암릉이 길의 대부분을 점유하기 시작했다. 길 옆이 크게 트여 경관도 훨씬 나아졌다. 심지어 바위 틈새에 뿌리내린 침엽수들도 멋들어지게 휘어져 있어 초입과는 다른 세상인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고난의 시간이 끝나고 보상만이 남은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건 터무니없는 착각이었지만, 그래도 이 순간만은 행복하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사진을 찍는 맛도 좋았다.
3시에 도착한 정상부는 제법 험하게 치솟은 바위 봉우리였다. 주변 경관에 감탄하며 다가가니 근처에 모여앉아 쉬는 중년 등산객들이 보였다. 이런 돌산에 흔히 있는 마당바위는 없지만 봉우리 밑에 땅이 넓게 펼쳐져 있어 평범한 뒷산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정상 인근이면 바위에 앉는 게 제맛이라 생각해왔는데, 이렇게 친근한 공간도 나쁘지 않았다.
상봉으로 올라가는 경사는 제법 심했으나 그만큼 데크로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심지어 고무 매트까지 촘촘히 깔아둬서 눈비에도 미끄럽지 않을 듯했다. 사랑받는 산이 분명했다. 나는 난간을 잡고 몸을 끌어올려 상봉(470m)의 정상석에서 사진을 찍고 주변을 둘러봤다. 풍경이 각별했다. 서울 산에서 아래를 조망하면 어김없이 빌딩과 아파트로 빼곡한 도시 풍경을 보게 되는데, 이곳은 시야의 상당 부분을 전원에 가까운 모습이 채우고 있었다. 나즈막한 건물들 옆에 초록의 호수같은 논밭이 자리했다. 같은 높이에서 보는 논밭은 스쳐지나는 배경으로 느껴왔는데, 산 위에서 내려다본 논밭은 목가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그냥 초록색으로 칠한 것처럼 보일뿐인데도 마음 한구석을 평화로운 온기로 채우는 힘이 있었다. 감사할 만한 풍경이었다.
상봉은 도무지 평평한 곳을 찾을 수 없는 봉우리라 대충 바위에 걸터앉아 삼각김밥을 빠르게 집어먹고 다시 움직였다. 불곡산의 주요 봉우리로는 상투봉과 임꺽정봉이 더 있다고 하니 서둘러야 했다. 불곡산 정상부가 이 정도로 무난하다면 나머지 봉우리도 금방 갈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면서.......(계속)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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