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걷다보니 이게 보통 착각이 아니었다. 여기부터는 마냥 즐기면서 다닐 만한 길이 아니었다. 봉우리에서 다른 봉우리로 가는 길이야 대체로 험한 편이지만, 여기는 보통 험한 게 아니었다. 내리막은 바위를 대충 두들겨 깨서 마구잡이로 깔아놓은 것처럼 거칠었고, 이어지는 오르막은 밧줄을 잡고 호치키스를 밟아야 하는 수준이었다(ㄷ자로 박아놓은 발판을 흔히 호치키스라고 부른다). 이 순간만큼은 등산이라기보다는 등반에 가까웠다. 재미는 있었지만 여름날 배낭을 매고 감행하기에는 상당히 지치는 활동이기도 했다.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참고로 이날 나는 플리스를 처음 만들어낸 폴라텍 사의 여름용 원단인 폴라텍 델타로 만든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미세한 요철 가공이 된 덕에 다른 옷보다 덜 치덕거린다는 게 확실한 장점이었다. 땀이 끝없이 흐르는 날씨가 되면 어떤 속건 티셔츠든 비슷한 지경이 된다고 생각해왔으나 이만하면 확실히 다르다고 할 만했다. 덕분에 여름에 어떤 상의를 입을까 하는 고민에서는 졸업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첫 테스트에 돌입한 송림 등산화는 상상 이상으로 대단히 안정적이었다. 사이즈 때문에 발가락 움직일 공간이 거의 없고 새끼발가락에 자극이 누적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불편한 부분도 없거니와 반복적으로 암릉을 딛는 충격도 완전히 방어했고, 미끄럽지도 않았다. 나는 부드러운 중창 부분이 얇고 밑창이 두꺼운 클래식 등산화가 무거워도 신뢰성이 대단히 높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제법 뿌듯했다. 딱히 내가 손본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낡은 물건, 고전적인 물건이 요즘 물건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어쩌면 ‘노화’라는 단어를 슬슬 남의 일로 여길 수 없게 된 자의 감정 이입일지도 모른다.
3시 45분에 상투봉에 도착했다. 상투봉은 봉우리라기보다는 바위 능선의 일부 같은 곳으로, 높이는 431미터인데 체감으론 600미터쯤 되었다. 그만큼 매콤한 맛을 보며 올라왔다는 말이다. 풍경을 몇 겹으로 덧칠한 산과 산 그림자 사이로 다시 전원 풍경이 보였는데, 이번에는 하늘의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전란의 끝을 알리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바위 능선 위에서 보기에 이만큼 훌륭한 광경도 얼마 없을 것이다. 등산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풍경을 서울 근교에서 볼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을 테니, 혼자서도 산을 찾을 정도로 등산에 매료된 건 역시 행운이다. 뻗어버리지 않고 몸을 잘 다독여 여기까지 온 것도 뿌듯한 일이고.
상투봉에서 이어지는 넓고 긴 암릉을 지나 임꺽정봉으로 출발했다. 명목상의 정상이 상봉이고 실질적인 정상은 임꺽정봉이라고 할 만하다고 알고 있었기에 제법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가는 길이 상상을 초월했다. 여기저기서 ‘암릉 맛집’이라고 하더니, 그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고 주장하듯 험한 바윗길이 이어졌다. 그냥 일자로 험하거나 가파른 게 아니라, 복잡하게 내려갔다가 치솟은 바위 옆의 길 같지 않은 경로를 따라 올라가는가 하면 여기저기 자잘하게 솟은 바위에서 바위로 옮겨다니기도 해야 했다. 앞서서 가는 등산객 한 명이 없었다면 여기가 길이라는 걸 확신할 수 없을 만한 곳도 있었다.
그렇게 어지럽게 걷다 4시 18분쯤 임꺽정봉이 잘 보이는 암릉에서 숨을 돌렸다. 임꺽정봉은 높이 솟은 봉우리이긴 했으나 대부분 나무로 감싸여 길이 눈에 띄진 않았는데, 보다 보니 숲 위로 튀어나온 거친 절벽에서 뭔가 꾸물거렸다. 장산범은 아닐테고 대체 뭔가 싶어 실눈을 뜨고 집중해 보니....... 그건 난간을 잡고 산을 기어오르는 사람이었다. 즉, 길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은 절벽이 바로 내가 가야 할 길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수필에서 ‘뛰기 전에 보기’와 ‘보기 전에 뛰기’ 중 어느 것이 옳은 자세인가 다룬 적이 있다. 나는 갈 방향 정도만 잘 봐두고 멀리 있는 길이 어떤지는 닥쳐보기 전까지 모른 채 움직이는 게 낫다는 입장이다. 그래야 헤매지도 않으면서 머지않아 다가올 일에 겁부터 먹는 일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미래를 구체적으로 알수록 철저히 대비할 수 있을 테니 뭐든 정보가 많을 수록 좋겠지만, 대비를 할 수 있을 만큼 다 한 뒤라면 미래를 알아봐야 불안만 가중되고 미지의 영역을 나아가는 즐거움은 줄어든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임꺽정봉으로 가는 암릉을 미리 봐버린 건 상당히 부정적인 일이었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길을 어떻게 가나 맥이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즈음 700ml가량 챙겼을 물도 거의 다 떨어져 불안감이 가중되었다. 이렇게 낮은 산에서 탈수의 위기를 직면하게 될줄은 상상도 못했다 여름의 기온과 식수 소모를 적절히 가늠할 줄 모르면 많이 챙기기라도 했어야 하는데, 실수도 이런 실수가 없다. 온도에 따른 식수 소모량은 내가 꼭 미리 알아야만 하는 정보였다. 1.5리터는 챙겼어야 했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물이 완전히 다 떨어진 것은 아니고 이 봉우리만 오르면 하산 시작이니 운동 강도를 조절하며 이 난관을 헤쳐나가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써놓으면 마치 ‘덤벼라, 임꺽정, 한 판 붙자!’하고 자신만만하게 나선 것 같겠지? 그러나 실제로는 ‘임꺽정 선생님,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에 가까운 자세였다. 그만큼 이 봉우리의 암릉은 가파르고 거칠었다. 그냥 가파르기만 한 게 아니라 길고 구불거려 끝이 잘 보이지 않는 탓에 영원히 이어지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잘 정비된 난간뿐만 아니라 밧줄까지 있었으나 오히려 그게 더 험악함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북한산 칼바위 능선이나 도봉산 Y계곡도 대단한 암릉이긴 하지만, 칼바위 능선은 이렇게까지 광대하지 않고 도봉산 Y계곡은 발을 디딜 곳들이 명확하다. 나는 빈번히 쉬어가며 몸을 끌어올렸다. 불곡산이 ‘암릉 맛집’이라고? 맛집이 아니라 핵불닭 볶음면이 나오는 집이라고 해야 마땅했다.
그리하여 4시 55분에 간신히 임꺽정봉(449.5m)에 올랐다. 무시무시하게 거친 길을 올라야했던 것 치고는 상당히 공간이 넓게 트인 곳이었고, 정상석도 제법 큼지막했다. 정상석 뒤에는 약간 위로 솟은 조망점이 있어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봉우리 방향이 다른 만큼 상봉보다 전원이 더 많이 보였는데, 슬슬 기울어가려는 햇살을 받은 멀칭 비닐은 호수처럼 빛났고, 겹쳐진 산들은 멀어질수록 물결처럼 흐려졌다.
그러나 그 평화로운 광경을 오래 즐길 수는 없었다. 시간을 즐기고 있기엔 너무 더웠다. 나는 보기에 흉하든말든 내 알 바 아니라는 심정으로 바지를 걷어붙였다. 30도가 넘는 날씨에 긴 바지를 입고 등산처럼 과격한 활동을 하는 건 상당히 불편하고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한 일이라는 걸, 여름이 지나갈 무렵에 등산을 시작한 나는 이때까지 몰랐던 것이다. 나는 남아있는 물을 모두 마시고, 곧장 하산을 시작했다. 시간을 끌수록 위험해지는 죽음의 타이머가 본격적으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정상부의 멋진 바위지대를 지나가자 고무가 깔린 데크 계단이 나왔다. 앞이 완전히 트여 가까이는 산을, 멀리는 마을과 논밭을 조망하며 날아가는 듯한 곳이었다. 불암산 정상부가 이와 비슷하긴 하지만, 이 정도로 광활하게 트여 있진 않다. 나는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걸었다. 멀리, 넓은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 이렇게 감동하진 않는다. 이보다 더 높은 산이나 전망대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도 불곡산의 계단에서 본 풍경이 단연코 압도적이었던 것은, 시야의 반을 채운 나무의 초록 위를 그보다 약간 위에서 내려다볼 기회가 좀처럼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근경에서 중경까지를 숲과 산이 메우고, 그 너머에 서울보다 한적한 마을과 논밭의 풍경이 엿보이는 이 길은, 거친 암릉과 함께 불곡산을 확고한 명산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감탄의 시간도 그렇게 길진 않아서, 데크길에서 내려온 뒤로는 완만하지만 편치 않은 길이 이어졌다. 바위를 대충 깨부숴서 쏟아놓고 흙과 낙엽을 뿌려놓은 듯한 길이 길어서 걷기가 도통 힘들지 않았다. 전투화 못지 않게 바닥 충격을 잘 막아주는 클래식 등산화가 아니었다면 제법 고통스러웠으리라. 등산화 유행은 점점 예쁘고 가볍고 캐주얼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족저근막염에 시달려본데다 이런 너덜길을 질색하는 나로서는 역시 이렇게 육중한 쪽이 좋다. 4륜구동 차량으로 험악한 비포장길을 거침없이 달리며 ‘이 맛이지!’하는 효능감을 맛본 사람이라면 아마 이 요상한 감성을 이해할 것이다.
그렇게 물 한방울 없는 상태에서 하산하기까지는 한 시간 좀 넘게 걸렸는데, 아예 대로변까지 빠져나오니 6시 32분이었다. 기록으로는 총 6시간 41분이 잡혔다. 이 날씨에 이렇게 험한 산을 물도 부족한 상태로 6시간 넘게 다녔다는 건 무모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근처에 화장실이 있기에 소변을 보니 아주 진한 황색이었다. 갈증을 느끼는 정도를 지나 가벼운 탈수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나는 보통 산은 겨울에 위험하다고 여기지만, 여름이 훨씬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닐 일이다.
그나저나 그렇게 늦은 시각은 아니었는데도 대로변의 음식점은 영업이 끝났다고 했다. 근처 가게도 다 닫혀 있었으므로, 나는 편의점에서 이온음료를 사서 마시며 버스 정류장까지 한참을 걸었다. 이 시각에 이런 문전박대를 당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도심에서 멀어질수록 가게가 문을 일찍 닫는다는 걸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양주역 근처는 좀 괜찮겠지 싶었는데, 애초에 음식점이 그리 많지 않은 데다가, 그나마 등산객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가게는 내가 들어서자마자 주문이 끝났다고 했다. 이쯤 되니 억울하고 화가 날 지경이었다. 세상이 무슨 의도를 갖고 나를 박해하는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장사에 큰 도움이 될 정도로 여럿이 온 것도 아니고 나는 누추한 등산객 한 명에 불과하니 장사를 하는 시간에 문전박대 당한다 할지라도 이상한 일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나는 탐색을 포기하고 역사에 있는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게 되었다. 깔끔하게 잘 만든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가게로, 딱히 특출나게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정도였다. 알코올로 지친 영혼을 어루만져주지 못한 건 아쉽지만, 이 정도면 준수하다고 생각해야지 달리 어쩔 도리가 없다. 이 시간에 열린 가게가 없다고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도시 출신의 오만한 고정관념의 결과일 테니, 방향도 없이 원망을 쏟아내는 것보다는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편이 정신에 이롭다. 게다가 한 시간 전만 해도 탈수증을 걱정하고 있지 않았는가 말이다.
아무튼 이 날은 등산 1년차가 아직 안 된 초보 등산객으로서, 자신이 여전히 초보라는 걸 지독하게 절실히 느낀 날이었다. 그동안 새로운 등산 코스를 찾아다니고 새로운 등산화, 등산복을 테스트하며 나도 제법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고 은근히 자부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산속의 여름 한 번 체험하지 못한 생초보였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잡다한 장비가 아니라 충분한 식수와 식량이었던 것이다. 자연 앞에선 겸손해져라, 겸허해져라, 이런 얘기들을 흔히 하는데, 이것도 괜히 나온 얘기가 아니었다. 산 곳곳에는 광대한 아름다움만 숨은 게 아니라 죽음도 그림자처럼 깔려 있었다. 비유하자면 폭포로 이어지는 강에서 노니는 것과 마찬가지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숨막히게 아름답지만, 적절히 노를 젓지 않으면 조만간 정말 숨이 막히게 된다. 생명이란 항시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중에 있고, 결말을 유예하며 나아가고 있을 따름이라는 말이다. 그 사실을 단적으로 가르쳐주는 여름 산의 공포와 경이를 동시에 맛본 나는, 집으로 가는 내내 크게 반성하면서 지독한 여름산의 더위를 이겨내기에 적합한 장비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교훈
굳은 통가죽은 가죽 크림이나 밍크 오일로 살릴 수 있다.
클래식 등산화는 멋과 견고한 방어력, 그리고 재생 가능성에 특장점이 있다.
표지판이 보이면 방향을 꼭 확인하자.
폭염에는 땡볕을 걷지 않는 게 이롭다. 걸어야 하면 밝은 색 모자와 옷으로 방어하자.
물은 과하게 많이 챙기자. 가늠이 안 되면 6시간에 2리터라고 생각하는 게 안전하다. 이후 코스, 온도, 물 소비량을 기록해서 적정량을 찾으면 된다.
28도쯤 되면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게 낫다.
번화가 밖에서 일요일 늦은 저녁에 식당을 찾기란 지독하게 어렵다.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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