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Jul 13. 2016

구시대의 즐거움과 노래폭력

노래는 참 좋고, 인류가 만들어낸 문화의 정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긴 하지만, 제 아무리 좋은 것도 자기가 하고 싶을 때 해야 즐길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 억지로 하게 되면 그건 그냥 고문에 지나지 않는다. 원치 않는 성적 접촉이 성폭력인 것과 마찬가지로, 원치 않는 노래는 ‘노래폭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지론인데,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한국 사회에는 상황이야 어쨌든 즐거운 자리에서 노래를 한다는 것은 무조건 즐거운 일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이다! 자랑스런 한국인은 언제든 풍류와 멋을 즐기는 민족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7080세대가 대학에서 즐겨온, 잔디밭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며 통기타를 치고 노래를 즐기던 유행이 아직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무데서나 노래하기를 즐기지는 않는 나로서는 언제나 불만스러운 풍조다. 


중학교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도덕 시간이었는데, 교과서에 어떤 시 하나가 나오자 선생님은 반장이었던 나를 부르더니 이 시를 노래로 해보라고 요구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람? 나는 교과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그런다고 있지도 않은 노래나 악상이 튀어나올리는 없었고, 일 분쯤 지나자 선생님은 포기하고 앉으라고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는 조금 달랐다. 경위는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님은 역시 반장이었던 내가 노래를 하지 않으면 반 아이들이 맞는다고 했다. 젊고 재미있는 선생님이었으므로 나는 적당히 웃고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아니면 내가 대신 맞는 걸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버텼는데, 선생님은 정말 1분단 애들의 손바닥부터 빗자루로 때리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가련한 인질이 되어 내 이름을 부르짖었다. 나는 마지못해 ‘이등병의 편지’를 불렀다. 한 소절만 부르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노래를 멈추자 인질 처형이 재개되어 끝까지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그때는 짓궂은 선생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떠올려보면 그건 단순히 연장자의 권위를 앞세워 나를 괴롭힌 것에 지나지 않았다. 노래가 그렇게 좋으면 자기가 부르면 그만이고, 때리는 게 그렇게 좋으면 자신을 때리면 그만 아닌가?


그 뒤로 노래폭력, 노래폭행을 당한 것은 물론 대학교였다. 새터의 방과 방 사이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배틀’이 펼쳐졌고, 그 배틀의 내용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춤과 노래가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 마치 즐거운 대학생활을 첫발을 내딛은 양 서태지 6집의 ‘오렌지’를 불렀고, 즉석에서 야유를 당했다. 나는 조용히 ‘뭘 어쩌라는 거야’라고 중얼거렸다. 내 실패는 동기 여자애가 ‘애교’ 있게 장윤정의 ‘어머나’를 불러 수습했다(물론 그 뒤에 그녀는 자기 처지가 한심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나중에 이어진 '신나게 춤을 추’라는 요구에는 신입생 중 그 누구도 제대로 응하지 못했고, 과 선배는 ‘뭐야, 너희 클럽 안 가봤어?’라고 개탄했다. 이제 막 고3을 빠져나온 애들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는 것은 둘째치고, 스물도 넘은 인간이 ‘나는 이러니까 너희도 이럴 것이다’라고 단세포적인 생각을 한다는 사실이 그때도 어처구니 없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어처구니 없는 발상이 꼭 나이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절실히 깨닫게 되는데… 학원에서 제법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40대 선생님이 종강파티에서 술을 마시다 ‘흥이 나니까’ 돌아가며 노래를 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나름대로 깨인 사람일 거라고 믿은 학생들은 입을 모아 ‘그건 옛날 풍습이고, 요즘은 노래방이 아니면 노래하지 않는다’라고 설득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선생님은 그 말을 듣자 어쩜 그렇게 낭만도 없이 살 수가 있느냐는 표정으로, 그럼 노래가 싫으면 시를 낭독하자고 타협했다. 그리하여 나는 평소에 저장해두었던 시를 낭독했으나… 시 한 수를 외워두거나 저장하는 사람따위는 한 명도 없었고, 결국 다들 부르는데 안 부르는 것도 뭣하지 않느냐는 억지에 이기지 못하고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부르게 되었다. 그러니까 옛날의 풍류가 그립다는 단 한 명의 요구에 열 명 가량이 수치심에 이를 갈며 노래를 불러야 했다는 이야기다. 


까짓 노래 그게 뭐 대수냐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집단 폭력이 합리화된다


이쯤 되면 분명 이건 단순히 ‘노래’라는 아름다운 형태를 취했을 뿐 권위자의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엄석대가 똘마니들을 눈앞에서 자위시켰다는 설명이 짧게 나오는데, 그것과도 비슷하다. '나는 노래가 이렇게 즐거우니 너희도 즐거워야 할 것 아니야?' 라는 식의, 공감능력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발상이다. 공감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실제로 그런 사람은 극소수다), 일단 사회적 입지 덕에 자신의 권위가 위협당할 염려가 없고, 그리고 즐거운 자리의 분위기를 깨선 안 된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기 때문에 그냥 척수로 한 생각을 말해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가면 술을 따르라고 시키는 것이겠지. 어쩌면 이들이 멋대로 노래를 하라고 강요할수 있는 것은 그것이 아직 범죄로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권위적 횡포가 일어나는 것은 개인에 의한 것보다는 집단에 의한 경우가 더 많은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술게임에서 걸린 사람에게 노래를 시키는 것이라든가. 서로에게 수치스러운 꼴을 보여 관계를 돈독하게 만든다는 기상천외한 짓거리를 대체 몇 세기까지 계속 할 생각인가? 하지만 모두가 그것말고는 멀쩡한 방법을 배워본 적이 없어서 대체로 원하지 않는 습속을 집단적으로 유지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에 연극을 보다가도 황당한 꼴을 보고 말았다. 입장권 뒤에 이름을 쓰는 것이 어째 이상하다 싶더니, 극단은 추첨해서 상품권을 주는 대신 극중 한 장면을 도와달라고 했다. 20대 초반 정도로 나이 어린 여성이 당첨되었고, 그녀는 결국 연극의 후반부에서 전국 노래자랑 무대에 올라가 무반주로 노래를 하게 되었다. 다들 ‘애국가'도 부르고 '곰 세 마리도 부른다는 말에 그녀는 '곰 세 마리'를 부르고 내려왔다. 과히 즐거운 모습은 아니었다. 연극 자체는 썩 훌륭했지만 그 부분이 너무 추잡스러웠다. 이건 완전 거부권을 박탈하고 벼랑끝에 떠민 것이 아닌가? 거기서 누가 감히 '나는 공연을 관람하러 온 것이지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게 아니'라고 선언해서 한참 달아오른 분위기를 박살낼 수 있을 것인가? 이건 거의 공개 프로포즈를 거절하면 천하의 악녀로 만드는 구도나 다름없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미는데, 자원하지 않은 사람에게 노래를 강요해서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것도 성폭력의 일종으로 처리하는 게 맞지 않나 싶을 정도다. 제발 노래는 내가 원할 때 원하는 곳에서 하게 해달라고. 내가 노래하는 걸로 외계인과의 우주전쟁이 종식된다면 그럭저럭 타협할 수 있겠지만, 내 노래에는 그만한 가치가 없단 말이다. 단순히 누군가의 저열한 권위 확인을 위해, 혹은 아무것도 안 한다고 나빠질 것도 없는 분위기를 위해 내가 몇 분 내내 수치심을 감당해야만 하나?




-후기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고…’ 하는 노래로 피해자를 리듬의 덫에 몰아넣어 어떻게든 노래를 시키고 마는 꼬락서니처럼 보기좋게 치장된 추악함도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연극도 객석과 무대가 아주 가까워 아무나 손쉽게 불러낼 수 있는 소극장에는 별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솔직히 학교 음악 시간에 흔히 하는 가창 시험도 학생이 원할 경우에는 다른 학생들과 분리된 공간에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어째서 이 나라는 어릴 때부터 누구 한 명을 골라잡아 수치심의 소용돌이에 내던지고 즐거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대에 나설 수 있는 배짱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예의를 먼저 가르쳐야 하는 게 아닌지?

매거진의 이전글 부케팔로스와 완벽한 샌들을 찾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