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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Aug 10. 2016

디스토피아의 여름을 나는 법

서기 20XX년, 한국은 사상 최악의 더위에 시달린다! 물론 에어컨이라는 문명의 이기는 보급되어 있으나 안타깝게도 전력을 많이 사용하고, 친기업적 정부는 일반 가정에 잔혹한 수준의 누진세를 적용한다. 결국 서민들은 극복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릴 운명인데…… 이 비극, 누가 구원할 것인가?


이렇게 복고풍의 디스토피아 얘기로 꾸며놓으니 정말 허구처럼 느껴지지만, 20XX년은 바로 2016년이었다. 아이고, 세상에!


아무튼 ‘친기업적 정부의 정책’ 때문에 환경을 극복할 과학기술을 보유하고도 쓰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꾸며놓은 것처럼 디스토피아 이야기같다.  ‘이 약을 쓰면 나을 수 있어요!’ ‘아니야, 그런 짓을 하면 신께서 노하실 거다!’ 류의 원시적 실랑이 느낌도 나고. 사실 애초에 원시 사회 구조의 ‘신’에 ‘기업’이나 ‘자본주의’를 넣으면 딱히 더 손댈 것도 없이 당장 실감나는 디스토피아 설정이 되고 마는 법이다. 윤리도 자비도 없고 기술과 이윤만이 지배하는 세상. 


어쨌든, 지구온난화를 몸소 증명하려는 것처럼 흉악하고 무자비한 날씨다. 어지간한 날씨는 잘 버텨왔던 나조차 이건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밖에 있으면 ‘금붕어를 산책시키기 좋은 날씨’라는 농담이 정말 실감난다. 그야말로 물속을 걸어다니는 듯한, 허공이 나에게 엉겨오는 것인지 내가 허공에 엉겨들어가는 것인지 모를 이 공포스러운 더위는 여지껏 도쿄에서밖에 느껴본 적이 없는 수준이다. 도쿄는 겨울에 그리 춥지 않으니까 이건 보통 불공평한 게 아니다.


그리고 이 정도로 더우면 집안에 있어도 쉬는 게 쉬는 게 아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분명 선풍기를 틀고 앞에 앉아있으면 그럭저럭 HP가 회복되는 기분이 들었는데, 올 여름은 선풍기를 제아무리 세게 틀어놓고 앉아있어도, 심지어 자고 있어도 회복이 되는 것 같지 않다. 가장 편안해야 할 곳에서조차 휴식을 취할 수 없다면 그것은 정말 지옥이 아닌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런 곳에서 살아가는 걸까?


그래도 날씨가 덥다고 당장 이민을 갈 수도 없고 휴가를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고담시 주민들이 그 난리를 겪으면서도 굳이 고담시에서 사는 것처럼 돈없는 한국 사람은 어떻게든 한국에서 버티고 사는 수밖에 없다. 어쩌면 고담시 주민들도 빌런이 무슨 짓을 하나 저지를 때마다 ‘빌어먹을 헬고담…’이라고 중얼거리는지도 모르지. 


자다가 더워서 깨는 나의 모습


그래서, 아무리 더워도 살 수밖에 없는 내가 집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택한 방법들은 다음과 같다. 


1. 벗는다: 하지만 이것도 주의해야 할 것이, 무조건 다 벗는다고 시원한 게 아니다. 민소매 티라도 한 겹은 입고 있어야 시원하다. 땀이 흡수되지 않고 피부에 머무르면 더 덥다. 땀은 옷에 흡수되게 해야 한다. 물론 민소매 티를 입고 있으면 반드시 살을 빼라는 잔소리를 듣기 마련이지만 이건 선택의 문제다. 정신 건강이 다소 나빠지더라도 육체 건강에서 챙기는 게 많다면 감수해야 한다. 


2. 적신다: 옷을 적시는 게 더 좋겠지만 방안 환경을 생각하면 젖은 수건을 두르는 편이 낫다. 아무튼 생존강좌 따위에서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마른 옷을 입고 있을 때에 비해 250배나 더 빠르게 체온을 빼앗긴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지식은 이용해야 한다. 다만 목에 두른 수건이 한때 생명을 가졌던 물체처럼 온기를 띄기 시작하면 빨아줘야 한다는 게 영 귀찮긴 하다.

(쿨매트와 어깨찜질팩을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꺼내어 써보긴 했는데 오래가지 않았다)


3. 먹고 마신다: 당연히 시원한 걸 먹고 마시면 조금쯤은 시원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비용이 들기 마련이고, 배가 부르면 어째 시원하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는 게 문제다. 역시 수박이나 아이스크림보다는 아무리 마셔도 금방금방 나오는 맥주가 여름에 가장 적합한 게 아닐지? 


4. 시원한 배경음을 튼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배경음악이 아니라 배경음이라는 사실이다. 음악이 아니라 음향효과다. 유튜브에 가면 8시간쯤 쉬지 않고 나오는 파도 소리 따위가 얼마든지 있는데, 그런 걸 틀어놓고 선풍기 바람을 쐬자면 그럭저럭 시원한 휴양지에 온 듯한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정말로. 사람은 배경음에 심리가 쉽게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5. 담근다: 그 어떤 방법도 찬물에 들어가는 것만큼 체온을 빨리 식혀주진 못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액화질소가 더 확실한 방법이긴 하지만, 시원해지고 싶은 것이지 콜드슬립하고 싶은 게 아니니까....... 아무튼, 물에 들어가는 것처럼 효율이 좋은 방법이 없는데 이게 보편화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생활에 불편하기 때문이다. 당장 일상생활에 쓰이는 도구의 절대다수가 물에 젖으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야  남는 선택지는 물을 일상 공간인 방안으로 끌어오는 것 뿐이다. 대야나 빠께쓰에 물을 담고 수건으로 받쳐 방안에 가져오고, 의자에 앉아 발을 담그면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시원하다. 지금껏 옷을 벗고 수건을 적시고 오만가지 쇼를 했던 게 허무해질 지경이다. 지금 이 글도 중간부터는 찬물에 발을 담근 채 쓰고 있는데, 20XX년이 어떠고 했던 초반의 심경과는 달리 올해도 이 정도 더위면 괜찮지 않은가 싶을 정도다. 정말이지 찬물을 떠다 발을 담근다는 발견을 해낸 사람은 노벨상을 받지 않았을까? 


6.에어컨을 튼다: 에어컨을 틀 수 있었다면 애초에 이 난리를 치지도 않았겠고, 에어컨이란 일종의 핵무기처럼 ‘우리도 최후의 순간에는 저질러버릴 수 있다’라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토템에 가까운 물건이기 마련이지만, 실제로 사용하면 그 준비과정부터 효과까지 모두 참으로 드라마틱한 냉방기기가 아닐 수 없다. 일단 가내 최고 결정권자의 승인이 떨어지면 잠항을 시작하는 핵잠수함처럼 모든 창문이 폐쇄되고(제발 자동화되면 좋겠다), 이어서 저온의 공기가 쏘아져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산뜻하게 기온 자체를 바꿔버리는 이 마법같은 기기의 힘이란 정말 대단하지만, 한국 서민이 에어컨을 하룻밤 내내 틀어놓는다는 것은 적어도 선풍기를 앞에 틀어놓고 잠드는 것보다 죽음을 더 앞당기는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우리는 새벽쯤에 에어컨을 꺼야만 하고, 실내 공기가 소리없이 달아올라 바깥 공기가 차라리 나은 게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때까지 버티고 버티다 창문을 열고 어느쪽이 시원했든 후회를 맛보고 마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것저것 해본 끝에 디스토피아 정부가 지배하는 국가에서 가장 효율적인 냉방 방법은 역시 찬물에 몸을 담그는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예 여름에는 집안 전체에 물을 채우고 싶을 지경이다. 아니면 실험개체처럼 잠들 때만이라도 물이 가득 채워진 관 속에 들어가 잘 수 없을까? 물론 어느쪽도 쉽진 않을 것 같으니, 아마 누진세가 개선되지 않고 더워지기만 하는 근미래에는 침대 매트리스 대신 수면용 수조나, 거실에서 즐기는 풀장 따위가 한국 여름의 기본 풍경이 될지도 모르겠다. 과히 보고 싶은 풍경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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