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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Sep 21. 2016

에바, 걸판, 킹프리, 미래에도 영화관에 갈 이유

영화는 혼자 봐야 제맛, 영화관도 혼자 가야 편함! 이라고 여기저기 주장해온 것 같은데, 사실 이건 무조건적으로 맞다고도, 틀리다고도 할 수 없는 말이다. 애초에 혼자 보기 좋은 영화와 여럿이 보기 좋은 영화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가령 "보이후드"같은 드라마는 영화관에서든 집에서든 혼자 보는 편이 좋다. 장면마다 한두 마디씩 코멘트를 던진다고 더 재미있어지긴커녕 몰입도가 떨어질 뿐더러, 감동적인 장면에서 울자면 역시 혼자 있는 편이 낫다. 반면에 액션, 개그, 호러 같은 장르. 즉 대체로 극장가에서 인기 있는 장르 대부분은 여럿이 시시껄렁한 농담을 섞어가며 보는 편이 즐겁다. 물론 그런 영화라도 진지하게 방해받지 않고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농담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렇게 잡담하며 영화를 보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들 중 하나라고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여럿이 간대도 잡담할 수 없는 영화관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단 말인가?

글쎄, 나도 한 때는 그런 생각을 했다. 영화관의 스크린과 음향이 아무리 대단하다곤 해도 여럿이 가 봤자 딱히 대단히 재미있는 얘기를 할 수도 없는 마당에 집에서 혼자 보는 거나 매한가지가 아닌가 하고.   


그러나 그런 생각도 세 번의 놀라온 경험으로 고쳐먹게 되었다. 


첫 번째는 바로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Q를 보러 갔을 때였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는데, 아무튼 조용히 작품에 몰입하고 있던 관객들은 신지와 카오루가 함께 피아노를 치고 두 필의 흰 말이 하늘을 뛰놀면서부터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다들 신음(여러가지 의미에서의)을 참느라 고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던 끝에, 둘이 나란히 누워 베드 토크를 하는 장면에서, 신지가 돌아본 옆 자리에서 팔을 괴고 그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카오루의 얼굴이 거대한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난 널 만나기 위해 태어난 건지도 몰라"라는, 그 유명한 대사가 나오자 결국 모든 관객이 탄식과 신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모두의 심장이 정지한 순간


저 앞자리에서는 누군가가 "어머나, 어떡해...!" 하고, 결코 어떤 의도가 섞이지 않은, 순수하게 마음에서 우러나온 신음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 순간은 정말 그 자리에 있던 관객 모두가(엄밀히는 대부분이) 혼연일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썩 유쾌한 경험이었다. 작품을 영화관에서 보는 재미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올해에 본 "걸스 앤 판처”(이하 걸판) 다. 이 작품은 TV애니메이션으로 먼저 방영되고 그 뒷이야기가 극장판으로 만들어진 경우인데, 세계관이 아주 기묘하기 짝이 없어서 검도처럼 ‘전차도’라는 것이 존재하고, 심지어 아주 일반적인 교양으로 받아들여져, 여고생들이 전차를 타고 대회에서 맹렬한 전투를 벌인다. 그 콘셉트만 들으면 세상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설정이 있나 싶긴 하지만, 뭐, 국제 마작대회가 열리는 세계도 있고 건프라 배틀이 열리는 세계도 있고 카드 배틀로 세계를 구하는 세계도, 테니스로 사람을 죽이는 세계도 있으니 여고생 전차 스포츠 세계가 없을 이유는 없지 않을까?  


10년 전만 해도 이런 콘셉트의 작품이 국내에서 정식 개봉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아무튼 이 걸판은 약소 학교가 오합지졸 팀을 이끌고 대회에 출전하여 강호들을 하나씩 꺾어나간다는 대회물의 왕도를 잘 따라 대단히 재미난 작품인데, 이번에 한국에서 4DX 기술을 접목하여 박진감 넘치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개봉했다. 표값은 16000원인가 하는 거액이었지만, 기술의 첨단을 달리는 이 작품을 놓칠 수도 없는 일이라 큰마음먹고 감상했다. 


그래서, 어땠는가 하면… 굉장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4DX라는 게 이 정도로 대단한 기술일 줄은 몰랐다. 일단 전차가 달릴 때의 진동도 철저하게 구현했고(나야 모르지만 실제 탑승해본 사람이 그렇단다), 포가 발사될 때의 반동도 대단했으며, 기관총이 발사되고 맞을 때에도 머리 바로 옆에서 바람이 퓩퓩 쏘아져나와 전쟁터에 나온 듯한 현장감이 무지막지했다. 게다가 비가 내리면 얼굴에 가랑비 같은 물방울을 쏘아냈고, 연기나 먼지가 나면 저 앞쪽에서 증기를 뿜었으며, 목욕 씬에선 천장에서 비누방울을 아낌없이 뿌려댔다(물론 이건 현장감과는 좀 거리가 있었지만). 덕분에 영화가 끝나고 나자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 세계의 롤러코스터를 두 시간 넘게 타고 나온 것 같은 피로감마저 느껴졌다. 정말, 이건 늙으면 연달아 두 번은 못 볼 정도로 굉장한 작품이었다. 이쯤 되면 확실히 얘기를 하든 못하든 영화관에서 즐기는 보람이 있다. 롤러코스터의 재미가 농담에 있진 않으니까.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킹 오브 프리즘”(이하 킹프리)이었다. 솔직히 나로서는 감히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이라고 설명할 자신이 없는데… 굳이 얘기하자면, ‘프리즘’이라는, 온갖 마법같은 특수효과를 끊임없이 사용하는 아이돌 장르에 귀여운 소년 한 명이 입문하고, 그가 동경하는 전설적 선배들은 해산하며, 적들은 비열한 수를 써서 그들을 견제해온다는 내용의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내가 이 작품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작품의 내용 자체 때문이 아니라, ‘응원상영’이라는 방식으로 상영하는데 그 열기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간증 때문이었다. 실제 콘서트를 보듯이 야광봉을 두 개씩 사서 들고 갈 정도라는데 과연 어떨까? 그리하여 나는 상영관에 발을 들였고… 극장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요약은 잘 못하겠지만 대략 이런 작품입니다.


몇 분 정도 늦었는데, 일단 문을 열자마자 야광봉 불빛에 상영관 안이 훤히 밝아서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환호성에 다시 놀랐다. 자리로 찾아가는 동안에도 관객들은 한 마음이 되어 매 장면마다 온 힘을 다해 반응하고 있었다. 캐릭터가 멋진 대사를 하거나 서비스씬을 보여줄 때 열광하는 것은 기본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주요 대사마다 “맞아!” “아니야!” 또는 “귀여워!” 등으로 호응했으며, 삽입곡마다 친절하게도 매기는 소리와 받는 소리가 나뉘어 있어 받는 소리를 다함께 불렀다. 게다가 야광봉을 휘두르는 것도 기막히게 일사불란해서, 교회 십자가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두 야광봉으로 십자가를 만들었으며, 채찍질을 즐겨하는 적 세력의 수장(미키 신이치로가 광적으로 열연해서 무척 반가웠다)이 나왔을 때는 그를 따라서 한 손에 든 야광봉으로 착착 반대편 손을 두드렸다. 선배들 그룹이 해체되자 다들 웃는 얼굴로 엉엉 우는 소리를 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반응하면 되는지 매뉴얼 같은 걸 보고 오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지만, 물론 그런 게 아니라 다들 킹프리를 몇 번이고 다시 보면서 타이밍을 익힌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 호응 방법은 처음에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하는 문제가 남는데, 그것은 분위기에 따라 몇 명이 보인 어떤 반응이 저거 재밌는데? 하는 생각들로 이어지고 전파되어 문화처럼 형성된 것이 아닌가 싶다. (나중에 응원법을 정리한 사람들이 나타나긴 했지만, 아무래도 모두가 그걸로 예습하고 가진 않았을 것 같다)   


아무튼 옆자리의 학생은 생수까지 마셔가면서 응원하는 마당에 나는 야광봉 하나 없고 남자 목소리가 튈 것 같아서 얌전히 보느라 다른 별에 표류해 들어간 사람처럼 기이한 신비감과 소외감을 느꼈지만, 마음에 드는 캐릭터도 있었고, 내 취향은 아니지만 분명 재미도 있었다. 이런 작품은 정말 관람 경험이 작품만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관객이 한 자리에 모여있는 그 자체가 한 세트다. 아무리 블루레이를 사서 집에서 혼자 환호한들 영화관에서 다같이 열광하는 순간의 즐거움은 다시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아시겠지만, 전 이런 캐릭터에 환호하게끔 20년쯤 조교당했습니다.


그리하여, 영화관의 가치에 대해 슬슬 의심을 품기 시작하던 나는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VOD서비스가 한없이 발달하고 그 가격도 내려가고 있지만, 영화관은 영화관 나름으로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고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생판 모르는 사람들끼리 영화를 보고 순간순간 감정을 공유하는 재미는 꽤 각별한 것이다. 킹프리의 초반에는 연애 시뮬레이션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얼굴 없는 여자 캐릭터가 등장해 그녀가 할 대사를 관객이 따라하는 부분도 있었는데, 그런 식으로 반응형 콘텐츠를 만들어나가도 재미있을 것 같다. 아예 4DX 기술에, 화면을 보고 총을 쏘는 놀이공원 어트랙션 요소가 추가될 수도 있을 것 같고. 어쨌든 사람을 두 시간쯤 자리에 붙들어두고 내내 화면을 보여줄 수 있는 상황이란 꽤 특수해서 궁리하자면 별 짓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걸판과 킹프리의 수익이야 메이저 영화들에 비하면 고만고만하다지만, 새로운 시도가 이어지다 보면 메이저 영화에도 유입될 것이다. 그때쯤에는 감정적으로 심심한 나도 환호할 작품이 나오겠지. 





  


-후기

최근 몇 주내내 대단히 바빴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쯤은 넘겨야지 하던 것이 벌써 몇 주나 되었군요. 수필 비축분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다 몇 시간씩 들여 새로 써도 영 시원치 않은 것만 나오는 슬럼프가 지속되어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요즘은 소설을 쓰는 뇌와 수필을 쓰는 뇌가 다른 부분이 아닌가 싶더군요. 그러면서 에너지는 똑같이 쓰고 있으니... 앞으로도 연재가 순탄치는 않을 것 같습니다. 역시 힘도 시간도 남아돌 때 많이 써뒀어야 한다는 후회가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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