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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Oct 05. 2016

육체적 내리막길과 식성의 변화

루이 C.K.가 (통칭 루이스 C.K.)가 40대란 참 슬픈 나이라고, 젊어서 힘이 넘치는 나이도 아니고 늙어서 누가 돌봐주는 나이도 아니라는 취지의 불평을 한 적이 있는데, 발을 들인지 좀 지나고 보니 30대도 그리 좋은 나이는 아니다. 심지어 나조차 옛날에는 30대 하면 '사회인으로서 독립하여 완전히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멋지고 힘이 넘치는 나이…' 라는 이미지가 있었으나, 부동산 문제를 비롯하여 온갖 사회적 문제가 겹치면서 실상 ‘권리는 20대와 딱히 다를 것도 없는데 책임은 갈수록 막중해지는’ 나이대가 되고 말았다. 빛 좋은 개살구라고나 할까. 아니, 빛이라도 좋긴 한지……?


아무튼, 그런 비극 속에서 요즘 절실히 느끼고 있는 것은, 몸상태가 도무지 예전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가진 것 없이 늙는 것도 서러운 판에 앞으로는 건강마저 잃는 길만 남았다 이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작품에서 이미 여러 번 30대를 성숙의 정점에 이른, 상대가 무엇을 원하면 그것을 줄 수 있는 나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건 탄탄한 경제적 기반을 갖고 체계적인 운동을 통해 건강을 관리했을 때의 얘기라, 그야말로 너무나 허구적으로 느껴진다.


몸상태가 예전같지 않다는 사실 자체만큼이나 괴로운 점은, 이런 육체의 변화를 정신이 아직 익숙하게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급격한 속도로 어른이 되어가는 2차 성징을 거꾸로 돌리는 것과 같다. 성장하면서 ‘어라? 이제 늦게까지 안 자도 괜찮은데?’ ‘술이라는 거 맛있잖아?’ 를 느꼈다면, 이제는 ‘어라? 어제 좀 무리했나?’ ‘이상하다, 내가 술에 이렇게 약했나?’ 따위를 느끼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그 괴리를 빠르게 눈치채고 익숙해질 수록 건강하게 늙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대단히 모자라긴 해도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2차 성징이란 이런 거예요. 여러분이 어른이 된다는 뜻이죠.’ 하고 가르치듯이 30대를 앞둔 젊은이들에게도 ‘30대란 이런 거예요. 여러분이 늙어간다는 뜻이죠’하고 대대적인 교육을 했으면 좋겠다. 정당한 고용계약, 올바른 주택계약, 건강한 성생활, 부모님의 노화, 내 몸의 노화, 이렇게 세트로 의무교육을 하면 좋지 않을지?


각설하고, 육체의 변화 중에서 특히 놀랍고 아주 가끔 절실하게 느껴 깜짝깜짝 놀라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식성의 변화다. 일단 예전 같으면 실컷 배불리 먹으면 부른 배를 두드리며 만족할 텐데, 요즘은 ‘아, 이렇게 굶주린 짐승처럼 처먹는 게 아니었는데…….’ 하고 후회하기 마련인데다, 심하면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칼로리도 칼로리대로 겁나고, 소화가 안 되거나 배탈이 날까 무서운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여차하면 과식한 뒤에 화장실을 몇 번이고 들락거릴 때도 있고, 소화가 안 되거나 설사에 시달려 약을 찾게 될 때도 있다. 


양념이 너무나 강한 음식도 영 꺼리게 되었다. 예전의 나는 매운 음식이라면 일단 도전하고 보는 무모한 인간이었고, 철판볶음밥이든 타코든 무조건 맵게 먹었다. 고등학교 때는 내기를 해서 피자 한 조각에 핫소스 세 팩을 뿌려 먹고도 까딱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남들 멀쩡히 먹는 철판 볶음밥을 같이 먹고도 혼자 배앓이를 할 지경이 되었고, 그래서 그런지 이제 매운 음식을 먹는게 그리 즐겁지도 않다. 좀 든든하게 먹고 싶을 때는 순대국밥을 배불리 먹곤 했는데 최근에는 그것조차 부담스럽다.


그리고 무엇보다, 식생활에 있어서 한국인의 가장 저렴한 쾌락이라고 할 수 있는 치맥조차 100퍼센트 행복하지 않다. 이런 얘기를 한 3년 전의 나에게 한대도 전혀 믿으려 들지 않겠지? 하지만 사실인 걸 어쩔 수 없다. 바삭바삭하게 막 튀겨낸 치킨과 시원한 맥주를 먹는 것은 여전히 끝내주는 일이고 언제든 먹을 용의가 있지만, 서너 조각 먹고 있자면 점점 그 강렬한 맛과 기름기가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입은 더 먹고 싶어해서 딱 한 조각만 더 먹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니… 이것도 참 고역이다. 물론 이럴 때는 그만 먹는게 정확한 판단이고, 더 먹지 않아도 이미 배는 부르다. 다신 못 먹을 음식을 먹듯이 치킨 한 마리를 앉은 자리에서 먹어치우던 때가 아니다. 


치킨을 먹는다고 무조건적으로 기뻐 날뛸 시기는 슬슬 지나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욕망과 건강의 기로에서 욕망을 포기하는 길을 택하는 버릇을 들이고 있다.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후라이드 치킨보다 찹쌀밥을 채운 전기구이 통닭, 아니면 피자를 택하고, 무제한 뷔페보다는 적당한 요리 몇 가지를 시켜 먹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물론 어지간해서는 뷔페가 싼 경우가 많지만). '맥주가 무제한!' 이라는 문구를 보면 예전처럼 흥분하기야 하지만 금방 진정한다. 슬슬 육체적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대강 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매일같이 맥주를 마시고 싶어하는 나라도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하며 1.5리터 넘는 맥주를 마시는 건 무모한 짓이다. 정말 맥주를 즐길 거라면 식사할 때 말고 위장에 여유가 있을 때, 과자와 함께 즐기는 게 안정적이다. 


이런 식으로 위장의 노화를 따라가고 있긴 한데, 이 추격의 안타까운 점은 역시 추격이 잘 된다고 해서 딱히 쉴 틈이 생기진 않는다는 것이다. 더 나아질 게 없다. 한동안 산속에서 수련만 거듭한 전사가 칼을 뽑고 나서듯이 ‘슬슬 뱃속 컨디션도 괜찮으니 오늘은 치킨이나 한 마리 통으로 뜯어볼까?’ 하고 나설 수 없다는 뜻이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 과식 앞에 적당선을 그려놓고 그 앞에서 돌아서는 생활을 반복해야 할 것이며, 그 선은 점점 육체를 조여올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점점 불행하게 될 뿐이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벌써부터 우울해지지만, 날이 갈수록 젊어지는 벤자민 버튼도 아니니 받아들이고 사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우울함을 피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치킨 대신 피자를 선택했듯이 행복의 포커스를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위장(혹은 간)을 쓰지 않고 더 높은 고양감과 만족감을 추구하는 데 행복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렇게 말해봐야 나도 그게 무엇일지, 니코틴 말고 다른 답을 여전히 찾고 있는 중이지만.



-후기


이 글을 쓴 뒤로 여행(이라기보다는 엠티에 가까웠지만)을 다녀왔습니다. 그럭저럭 엇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오랜만에 모여 긴 시간을 보내자니, 노는 형식은 대학 시절과 똑같아도 그 내용은 어째 많이 달라졌더군요. 일단 포식을 포기하고 좋은 숙소를 선택했고(막상 가보니 엉망이었지만), 카레, 스튜, 미역국처럼 제법 건강한 요리를 만들어 먹으며 술은 피로해지지 않을 정도로만 즐겼고, 치킨을 시켜먹자는 얘기에도 누구 하나 흥분하지 않았으며, 밤샘에는 실패했고, 다같이 둘러앉아 몸이 예전같지 않다는 넋두리를 늘어놓거나 조촐한 고통의 야매 안마 모임을 열었습니다. 이러다 내후년쯤에는 다같이 모여서 황금알을 보고 사슴피라도 마시러 다니는 게 아닐지… 하는 걱정이 드는 여행이었습니다만, 나 혼자 이런 게 아니라는 사실은 다행이었습니다. 다같이 늙는다는 건 적적하지 않아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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