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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에는 불암산의 바위 위로(개정)

가장 쉽고 맛있는 추천 등산로를 가다

by 이건해



원래 크리스마스에 모여서 밥 먹고 놀거나 아예 하루이틀 놀러 가서 자고 오는 ‘엠티’ 모임이 있지만 2023년에는 불참했다. 바빴기 때문이다. 한참 일정이 늘어져버린 중편 소설도 해가 넘어가기 전에 수습하고 싶었는데 연말에 마감인 공모전에 투고할 원고도 써야 했다. 게다가 같은 모임이 말일을 끼고 여행을 갈 예정까지 잡은 터라 엠티까지 갈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덤으로 옛날과 달리 이제는 숙소를 잡고 논다 해도 밥을 먹고 마음 가는 대로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그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임이 되었으므로 시간만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끼기 힘들어진 상태였다. 뭘 하고 있지 않으면 영혼이 조여드는 듯한 기분은 빠른 시일 내에 좋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 전에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어찌저찌 트래킹 모임이 잡혀 개화산을 갔다오기도 했다. 산이 별로 높지 않은데도 제법 그럴듯한 숲길을 걸을 수 있었고, 서쪽 사면에 있는 전망대에서는 시원하게 트인 벌판과 김포공항이 보였다. 주로 도시의 풍경만 보다가 근래에 산을 즐겨 보게 된 나로서는 그토록 넓은 벌판은 좀처럼 볼 기회가 없는 것이었다. 이런 산을 매일 돌 수 있다면 정말이지 멋지겠다고 생각했다.


숲속의 사면을 올라 멋진 풍경을 바라본다는 행위를 한 덕에 2주일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나는 쓴 보람이 있을 확률이 대단히 낮은 원고를 투고하고 중편소설은 대충 접어두었다. 머리를 억지로 쥐어짠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막힌 소설을 처리하기 전에 일단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에 가기로 작정했다. 굳이 크리스마스 이브를 골라서 산에 오르는 사람도 적을 것 같았고, 친구들이 안온한 실내에 모여 선물을 주고받으며 그림같은 여유를 누리는 동안 나를 차가운 산속에 내다버린다는, 그런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행위를 하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게 자신에 대한 형벌인지 아니면 단순히 무용담처럼 떠들기 좋은 기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적지는 불암산으로 정했다. 강북 5산인 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을 불암산부터 세니까 불암산을 빨리 클리어해야한다는 의무감도 있었고, 심각하게 체력을 지불하지 않는 선에서 금방 갔다 와 저녁에 작업을 하기 좋은 산이다 싶기도 했다.


그리하여 나는 공릉백세문 코스를 알아보고 화랑대역을 거쳐 들머리로 갔다. 공릉백세문이니까 공릉역이 더 가까웠지만, 나는 환승을 한 번 덜 하는 화랑대역이 편했다. 걷는 거리는 거의 차이 나지 않기도 했고. 그나저나 역에서 내려 아파트 단지 사이를 걷자니 제법 추웠다. 영하 5도쯤 되었다. 산 위를 생각하면 만만치 않은 기온이었다. 나는 이날 처음으로 헐값에 중고로 구한 마운틴 하드웨어의 고어텍스 하드쉘을 착용하고 나섰는데, 다행히 안에 입은 히트테크와 플리스 반집업이 충분히 따뜻해서 추위에 시달리진 않았다.


(참고로 고어텍스, 심파텍스, 하이벤트, 이벤트 같은 투습방수층이 들어가서 눈, 비, 바람을 막아주는 한편으로 안쪽에서 발생한 땀이 마르며 생긴 수증기는 조금씩 내보내주는 의류를 하드쉘이라고 부른다. 투습방수층이 없는 바람막이는 윈드쉘이라고 부른다.)


단청 무늬를 화려하게 넣어 아름다운 한편으로 약간 전주시의 호남제일문이 떠오르기도 하는 공릉백세문을 지나자 등산이 시작되었다. 역에서 한참 걸어야 간신히 시작되는 산들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반가운 일이었는데...... 드디어 불암산이구나 감격하기에는 산길이라고 하기는 뭣한 포장인도가 아파트 바로 옆으로 계속되었다. 눈이 좀 쌓인 곳도 있어서 등산스틱을 꺼내긴 했지만, 아파트 바로 옆에서 쓰기가 좀 머쓱하기도 했다.


그나저나 명산의 입구 바로 옆에서 살면 어디서 운동할까 장소 걱정은 않고 살지 않을까? 걷는 동안 좀 부럽다는 생각이 몰려왔으나, 물론 그건 놀러온 사람 생각이고, 실제로는 산따위는 모기 서식지에 불과하다고 싫어하는 주민이 더 많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도 뒷산다닐 생각을 처음 해본 게 이사 오고 대략 13년은 지난 뒤였다. 원래 가까운 것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으니 소중하게 여기기는 더 어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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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안락하게 정비된 아파트 뒤 접근로)


아파트 바로 뒤를 지나서 제법 걸은 뒤로도 말끔히 정비된 길은 한참 이어졌다. 좌우가 펜스로 막혀 군사시설 옆을 걷는 듯한 분위기도 있었는데, 멋진 침엽수들이 많이 자라 있어 크게 삭막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르막은 아주 완만하지만 무시할 정도도 아니라 나는 슬슬 하드쉘을 벗어서 배낭의 조임끈에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반집업의 지퍼도 완전히 열었다. 땀나기 전에 미리 벗는 것이 안전한 산행 방법이라는 지침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참고로 히트테크 같은 흡습발열 내의는 레이온이 들어가 잘 마르지 않으므로 등산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얘기를 자주 본다. 레이온이 수증기를 붙잡아서 발열 효과를 얻는 것이라 속건 소재와 개념적으로 반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써보면 의외로 잘 마르고 괜찮다는 실험과 후기들도 많아서 나도 시험삼아 입어봤다. 결론적으로 땀때문에 불쾌한 적은 없었다. 가성비 좋으니 사서 쓰라곤 못하겠으나, 내의로 입을 게 면티와 히트테크 뿐이라면 활용해도 좋을 듯했다. 물론,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설마 누가 폴리에스터 속건 티셔츠 한 장 없겠냐 싶겠냐는 생각을 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관악산처럼 접근성 좋은 산에 가보면 오버핏 면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수두룩한 만큼, 좋은 대체품에 대한 정보도 중요할 것이다.


한편으로 마운틴 하드웨어의 하드쉘은, 모양도 빛깔도 만듦새도 좋지만 600그램이나 되는 터라 이후에는 손이 잘 가지 않게 되고 말았다. 모양이 비슷하면 대동소이하겠거니, 마운틴 하드웨어 장비는 평이 좋으니 믿을 만하겠거니 생각하고 샀는데 여간 아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옷은 겉감 안쪽에 고어텍스 멤브레인을 붙이고그 안에 메쉬를 덧댄 구조로, 하드쉘 중 이런 구조를 보통 2레이어라 부르는데, 2레이어가 무겁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이보다 약간 뒤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훨씬 가볍다는 3레이어 하드쉘을 구하려고 혈안이 되었고 실제로 구하는 데에도 성공했으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악착같이 가벼운 고어텍스 제품을 찾아다닐 일은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장비 얘기를 할 때로 미뤄두기로 하자.


슬슬 진짜 산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은 놀랍게도 출발하고 거의 한 시간이 다 지난 뒤였다. 그제서야 철책이 사라지고 데크길을 넘어 흙으로 된 오솔길 능선을 타게 된 것이다. 암릉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영 시시하고 지루하게 느낄 만한 길이 길게 이어진 셈인데, 이상하게도 이곳은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눈도 좀 쌓여 있었고, 길가의 나무들도 제법 멋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이래서 겨울에는 침엽수가 많은 곳을 애정하게 된다. 애국가에서 남산 위에 단풍나무가 아니라 소나무가 나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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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도 좋고 걷기도 좋은 멋진 산길)


불암산의 오솔길 능선도 난이도만 보자면 아파트 근처와 크게 다를 것은 없는 수준이 길게 이어졌다. 완만한 오르막이 지속되었고, 키가 큰 침엽수들 사이로 따뜻한 금빛의 햇살이 쏟아졌다. 숲이 조망을 크게 가리지 않아서 걷는 내내 청량감이 느껴졌다. 한쪽으로는 산이, 반대쪽으로는 도시가 잘 보였다. 심지어 유적지인 불암산성까지 지났다. 이렇게까지 동네 뒷산처럼 평온하게 걸으면서 이만한 경치를 누려도 되는 것인가 하는 죄책감까지 들 지경이었다. 나 원 참, 대체 누가 이런 길을 놔두고 초보에게 관악산따위 흉악한 오르막을 권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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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너머로 펼쳐진 풍경은 정상을 기대하게 한다)


그러나 경치 좋고 완만한 능선길의 평온함에 슬슬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건방떨지 말라는 듯 불암산의 페이즈2가 시작되었다. 흙이 다 가리지 못하고 흘러내린 것처럼 광대한 암릉이 물결치듯 드러난 것이다.


평탄하고 아름다운 불암산의 능선은 ‘거북바위’라고 해서 제법 거북처럼 보이는 큰 바위가 나오기 좀 전부터 슬슬 완전한 바윗길로 변해버렸다. 서울의 산들이야 대체로 고도가 조금만 높아져도 바위에 흙을 솔솔 토핑한 수준으로 바뀌곤 하니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불암산 공릉 방면은 오래도록 내내 평온하기 이를데 없는 육산(흙산)이었기에 그 변화가 훨씬 극적으로 느껴졌다. 다 쉬셨으면 살짝 매콤한 맛 좀 보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물론 암릉을 애호하는 나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변화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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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바위와 거북산장 바로 밑의 바윗길. 보기보다는 험하지 않다)


그런데 거기서 정말 놀라웠던 것은 등산로의 변모가 아니라, 거북바위 근처에 포장마차처럼 보이는 점포, ‘거북산장’이 있었다는 점이다. 검색해보면 유서깊은 산장이라고 하는데, 확실히 거칠어진 산을 올려다보며 잠시 쉬어 가고 싶은 명당이긴 했다. 가만히 있어도 지치는 여름이라면 시원한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의 유혹을, 귀가 떨어질 것 같은 겨울이라면 따끈한 오뎅의 유혹을 떨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상당히 추운 날씨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린다는 이상한 상태였기에, 어느 쪽도 끌리지 않아 걸음을 재촉했다.


어째서인지 그곳 즈음해서 혼자 산에 온 중년 남성들이 몇 명 보였다. 경력이 오래된 분들인 듯 복장이 완벽했는데, 그러면서도 아쉬운 부분들이 있는지, 서로 등산 스틱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있었다. 오다가 하나가 부러졌다는 얘기 같기도 했다. 영하권에서는 카본 소재 등산 스틱이 충격에 더 약해진다는 얘기도 있던데, 그 탓인지도 모른다. 내가 사용하는 건 알루미늄이니 그럴 걱정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가급적 조심하고 체중을 너무 싣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기껏 시작부터 내 몸에 딱 맞는 물건을 장비하게 되었는데 고장나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말이다.


거북바위를 지나 올라가는 길은 이제 정말 만만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암릉이었다. 특히 가파른 사면을 비스듬이 옆으로 올라가는 길이 까다로웠다. 발목을 앞이나 뒤로 기울이고 걷는 건 익숙해도 옆으로 비틀고 걷는 건 거의 불가능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물이 흐르는 길목인 듯 얼음이 언 부분도 있었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길에 난간이 잘 설치되어 있어 그것도 즐길 만한 요소이긴 했으나, 진짜 완벽한 초보를 데려왔다면 걱정스러울 수도 있을 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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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이름이 정확하게 느껴지는 바위도 적다)


그래도 그런 암릉길이 또 길지만은 않아서, 오래지 않아 정비된 데크 길로 올라설 수 있었다. 지쳐빠질 때까지 암릉을 타는 게 나에게 한 끼 식사라고 친다면, 이곳은 컵라면 작은 사발 정도 되는 듯 싶었다. 충분히 맛있는데 감질나게 끝나는 정도였다는 말이다. 애초에 다른 길로 오는 게 좋았을까? 물론 그건 다른 길을 가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데크 계단은 제법 가파르고 길게 이어졌다. 중간중간 방향이 바뀌며 층계참이 나와서 쉴 시간이 있었는데도 힘들어 더 쉬어야 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럼에도 늘어지지 않았던 것은, 계단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면 산 너머로 펼쳐진 도시의 모습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불암산은 모양이 단순하고 수락산으로 가는 북쪽을 제외하면 가까이에 산이 없어서 전망이 시원하게 트인 게 퍽 매력적이었다. 정상이 아닌데도 능선을 오르며 데크길에서 감탄하게 되는 것도 그리 많치 않은 일이다.


그렇게 데크길 사이의 바위도 밟고 난간도 잡으며 꾸준히 길을 오르자 금방 정상이 나왔다. 기억으로는 꽤 힘든 길을 제법 오래 걸은 것 같은데, 기록을 보니 거북 바위에서 15분도 걸리지 않았다. 기억이 불분명해서라기보다는 육체적으로 힘든 시간은 길게 느껴지는 탓이리라. 정신은 제법 재미있었는데 몸은 고역이었던 모양이다.


바위산이라도 정상은 저마다 다른 모습이라 불암산의 정상도 어디서 본 적이 없는 형상이었다. 일단 상당한 규모의 바위 봉우리를 3미터쯤 기어오르면 정상석까지는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라 봉우리 끝에 국기봉이 있어서, 순서를 기다려 밧줄을 잡고 기어오른 끝에야 뾰족한 바위 위, 불암산의 첨단부까지 갈 수 있었다. 밧줄을 잡고 오르는 길 중에 이곳보다 가파른 곳을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본 적이 없다(수락산 기차바위를 여전히 가지 못해서 그렇다). 그래서 나는 노약자는 국기봉까진 도저히 못 가겠군, 하고 혀를 찼으나...... 올라가서 사진을 찍자니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소녀 둘이 깔깔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올라와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어떤 길을 갈 수 있나 없나는 남이 함부로 판단할 일이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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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부 역시 바위산다운 위용을 자랑한다)


아무튼 불암산 정상에서 둘러보는 풍경은 확실히 각별한 것이었다. 아주 멀리까지 보이는 날씨는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 낀 구름 사이로 새어나오는 햇살이 빛의 커튼처럼 드리워졌고, 그 아래 평탄한 모든 곳에 치밀하게 세워진 아파트와 빌딩과 온갖 건물들은 넘실대는 문명의 연못처럼 보였다. 서울 근교에 시티뷰가 멋진 곳이야 얼마든지 많다곤 하지만, 이렇게 거의 모든 방향을 둘러볼 수 있는 곳은 얼마 없을 것이다. 특히 오르기 쉬운가까지 따지면 정말 이만한 곳이 없다. 게다가 정상 자체의 모양도 주변에서 쉽사리 접하기 힘든, 산다운 산의 느낌을 주는 만큼, 초보에게 등산의 매력을 전하기에 이보다 나은 곳은 적어도 근교에는 없으리라 본다.


발 디딜 곳도 넓지 않은 국기봉 옆에 한참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사진을 찍고 금방 내려왔다. 밧줄이 올라올 때와 다른 방향에 하나 더 있어서 그쪽을 택했는데, 내려다보니 여긴 정말 산양도 다닐 수 없을 만큼 가팔랐다. 덕분에 암벽 등반을 맛보는 기분으로 내려왔다. 질리도록 쓰는 얘기지만, 이런 길은 합당한 등산화 없이는 다니려 하지 않는 게 좋다. 심지어 곳곳에 눈까지 쌓인 이런 날은 더더욱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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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모든 방면이 트인 산도 드물다)


이날 나는 중고로 헐값에 구한 캠프라인의 등산화 ‘랜더’를 신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캠프라인의 등산화가 과연 어떤가 싶어 구해본 것인데, 널리 사랑받는 회사 제품인 만큼 어떤 바위도 아무 두려움 없이 걸어다닐 수 있었다. 이만큼 접지력이 빼어난 신발을 신고 있으면 걸음걸이 자체의 능률도 오르고, 경사로를 극복해내는 짜릿함도 배가된다. 괜히 등산인의 기본템이 아닌 셈이다.


다만 문제가 전혀 없진 않았던 게, 이번에도 나의 운동화 사이즈인 265mm 모델을 신었더니 15000걸음쯤 걷고 나자 새끼발가락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덤으로 족저근막염이 나은지 얼마 안 되는 발바닥도 은근히 피곤했다. 결국 270이었다면 깔창을 조절해서 잘 신을 만한 물건을 이후에 다시 처분하는 수밖에 없었다. 역시 자기의 발과 용도에 잘 맞는 등산화를 장만하는 것이야말로 등산의 시작이라고, 또다시 강조할 수밖에 없다.


하산은 원점 회귀를 좋아하지 않는 터라 청암능선길을 택해서 내려갔다. 길을 미리 잘 조사해서 택한 게 아니라 그냥 빨리 내려가는 길을 대충 고른 것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하산으로 추천하는 길이 아니라 적당히 암릉을 즐기며 오르는 길이었다. 어쩐지 거대한 바위 사면을 내려가는 길이 많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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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사면에서 빛의 사면을 본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길을 헤매고 말았다. 불암산은 그리 높지도 않고 산세도 험하지 않아 보이는 대로 가면 될 줄 알았는데, 여러 능선의 길이 가까이서 만나는 통에 오락가락 하게 되었다. 작정하고 정상에서부터 고수의 뒤를 쫓아 내려왔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치 21세기 닌자처럼 시커먼 옷을 날렵하게 차려입고 DSLR로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건대 이런 산 따위 수백 번은 오른 분 같았던 그 분은 내가 눈으로 쫓는 것보다 빠르게 사라져버린 것이다. 결국은 지도를 열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도를 보자니 잠시 후, 지나던 커플이 와서 내게 길을 물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보라색 재킷을 입고 혼자 다니는 모습이 고수로 보였던 게 아닐까? 미안하게도 나도 검색하는 중이라고 멋쩍게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갈림길 한쪽에서 그 닌자 고수가 씩씩대며 다시 길을 되짚어 올라온 것이다. 누가 봐도 길을 헤매고 돌아온 꼴이었다. 일상 생활에서도 그렇지만 산에서도 사람의 경험치를 겉모습으로 판단할 일이 아닌 모양이다.


간신히 제대로 찾아서 내려간 청암 능선은 제법 만만치 않은 사면이 많은 바윗길이었으나 정비가 잘 되어 있어서 난간을 잡거나 발판을 디디며 그럭저럭 수월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덕분에 지루할 틈도 없었다. 하산하니 4시 반.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발이 느린 나조차 등산과 하산에 네 시간 반쯤 걸렸으니 발이 빠른 사람은 세 시간만에도 주파할 수 있을 듯했다. 이만하면 시간적으로도 추천하기에 부담이 없다. 서울에서 흔히 가벼운 마음으로 갈 산으로 관악산과 청계산이 선택되는데, 역시 어느모로 보나 불암산이 낫다. 오솔길 능선도 걷고 경치 구경도 하고 유적도 보고 산장도 갈 수 있으며 바윗길을 올라 산꼭대기에도 설 수 있으니 이만한 등산 샘플러 코스가 없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나는 상계역 근처에서 순대국밥으로 성탄절 전야의 저녁을 해결했다.


사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도록 남들과 불암산에 가진 못했다. 그러나 여차할 때 갈 수 있는 등산로를 확보해두는 건 맛집을 하나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든든한 일이기도 하다. 삶의 변화를 꾀할 가능성을 확보해두는 것만으로 숨이 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멋진 길은 널리 알리자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다음에 갈때는 불암산이 북적이길 기원해 본다.




교훈


- 뒷동산처럼 낮은 산 중에도 비경을 품은 곳이 있다.

- 여럿이 모이면 누군가는 반드시 방한 대책이 부실하니 간단한 예비 장비를 갖추자.

- 일상복이나 다른 운동복에도 등산에 적합한 물건이 있으니 안전한 곳에서 시험해보자. 물론 곧바로 실전에 투입하는 건 금물이다.

- 산속에서 아무나 따라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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