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원효봉부터 백운대까지 꽃길과 눈길1

-북한산 입문 코스를 이제야 가다

by 이건해



2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 두 달이나 등산을 가지 못했다. 극동계를 지나 겨울 산행을 하기 썩 좋은 시기인데 산에 가기에는 바빴고, 약속도 심심치 않게 잡혔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머니와 베트남 여행까지 다녀온 터라 산을 찾을 마음의 여유를 확보할 수 없었다. 서울 근교의 산은 이제 다 가봤다고 해도 좋은 수준이 되었으니 등산로 탐방과 소개를 즐기자는 동기도 고갈되었다. 나는 종합적으로 말라비틀어졌다.


4월이 되니 세상에 온기가 돌고 곳곳에 벚꽃이 만개했으므로 친구들과 짬을 내서 하천변으로 꽃놀이를 갔다. 볕이 좋은 곳은 이미 꽃이 반쯤 지기도 했는데, 나는 그걸 보고 꽃이 다 지기 전에 산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등산을 시작하고 봄을 두 번째 맞이했는데도 때가 맞지 않아 산속에서 꽃들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꽃피는 계절에도 침엽수만 자라는 암릉만 다닌 탓이 크지만...... 어쨌거나 산속에 핀 꽃들을 봐두는 것도 등산 취미를 가진 자로서 체험해야 할 의무가 아닌가 싶었다.


그리하여 대체 어딜 가면 좋을까 고민하던 차에...... 북한산의 입문자 코스로 유명한 ‘원효봉’을 여지껏 구경도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상식과 정반대로 관악산에 다녀온 뒤 곧장 북한산 숨은벽 코스라는 지독한 고급자 코스부터 가버린 탓이다. 간신히 극복할 수 있는 난관과 절경을 맛본 덕분에 등산의 재미에 사로잡힐 수는 있었지만 초보 코스는 다 지나쳐버렸다.


그리하여 4월 중순에 날을 잡고 북한산의 북서쪽인 북한산성 탐방센터 방면으로 출발했다. 익히 알려져있듯이 이 방면은 지하철로 가는 데에 한계가 있어 아예 버스만 타고 이동했는데, 내릴 곳을 한 번 놓쳐서 괜히 시간을 버렸다. 그러나 그렇게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불광천 길가에 핀 벚꽃들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듯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얕고 좁은 개천과 푸른 둔치, 그리고 연분홍빛으로 흐드러지게 핀 벚꽃. 인생의 행복은 바로 이런 곳에 있다고 증거로 쓸 만한 광경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오늘 여기로 놀러오면 좋았겠다 생각했으나 이미 지나간 기회니 다음을 상상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허망해도 다음이 있다는 상상이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즐거움을 주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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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봄이 만개한 하천변)


그런데 북한산 근처에 접어들자 예상치 못한 이변이 일어났다. 느닷없이 흰 알갱이들이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게 아닌가. 깃털처럼 포근한 눈이 아니라 굵은 소금같은 우박이었다. 방금 벚꽃길을 구경하고 오는 4월 중순인데 우박이라니. 다이나믹한 날씨를 맛보는 것도 아웃도어 활동의 재미지만, 엉망이 된 지구 전체의 기후도, 그리고 이날 하루의 등산도 걱정이었다.


천만다행으로 12시쯤 내려서 북한산성입구 안내소 방면으로 걷기 시작할 때는 우박이 그쳤다. 흔적도 남지 않아서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만약 날이 아주 추워서 쏟아진 우박이 그대로 다 얼어붙였다면 심각한 문제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아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로를 따라 쭉 걸어 올라가는 길은 평탄하고 무난한 수준을 넘어서 거대한 공원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만큼 말끔하게 포장되어 세발자전거를 타고도 갈 수 있을 듯했다. 길가에 자란 나무 중 일부는 아직 꽃이 지지 않은 벚나무라 눈이 즐거웠다. 그야말로 한가로운 공원 산책이었다. 시야에서 등산객이 사라지지 않고 늘 너댓명이 유지되었는데, 그중에는 금발의 백인 어머니와 아동도 있었다. 그만큼 유명한 길인 모양이다. 친구들과 더 일찍 와서 구경했다면 등산에 대한 거부감을 더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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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치고는 소박한 대서문)


대서문까지 아주 평온한 블록 포장 도로를 걸었다. 그리고 대서문에서 보리사로 이어지는 길도 마찬가지로 말끔한 포장도로였다. 산의 서쪽이라 아직 시원한 덕인지 도로 좌우로 벚꽃이 제법 많이 피어 있었다. 좌우로 조금씩 휘기도 하고 오르막 내리막도 은근히 나오는 길을 걷는 동안 저 앞에는 암석과 초록 나무, 그리고 흰 눈이 뒤섞인 산이 펼쳐졌다. 가까이에서는 꽃을, 멀리에서는 산을 보며 걷는 일은 길이 심심해도 제법 즐길만한 일이었다. 비유하자면 멋진 풍경 사이를 드라이브하는 것에 가까웠다. 드라이브라곤 해도 발로 하는 드라이브지만, 산 풍경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속도는 걷는 속도니까 드라이브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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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산을 같이 보는 호사)



1시 13분쯤 북한동 마을 터가 있던 자리를 지나 조그만 개천처럼 좁아진 북한천을 건너 보리사에 도착했다. 너무 고풍스럽거나 웅장하지 않고 적당히 오래된 근현대 사찰로 보였는데, 산기슭 뒤에 세워진 이곳이 바로 등산의 이정표가 되었다. 이곳을 지나치자마자 등산 통제 차단기가 나왔고, 그 뒤로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 것이다. 거친 바위를 쌓아만든 계단길은 우거진 침염수림 사이로 이어져 가혹한 맛을 갈구하던 내 호승심을 자극했다. 그때쯤 트레일러닝 복장을 한 젊은 남녀가 형광색 재킷을 빛내며 나를 앞질러 갔는데, 나는 주눅들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걷는 동안 이따금 온 산이 신음할 정도로 세찬 바람이 불곤 했다. 슬슬 평온이 끝나고 기쁨이 찾아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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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봉으로 향하는 산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원효봉 방면으로 이어지는 길은 거친 돌계단과 다듬어지지 않은 길의 반복이었다. 괜찮기도 했다가 걷기가 상당히 성가셔지기도 했다. 오르막도 평온하게 계속 걷기에는 벅찬 수준이 이어졌다. 풍경은 계곡도 능선도 아니라 익숙지 않은 방식으로 각별했다. 적당히 아름답지만, 그에 비해 체력을 빠르게 털어가는 길이었다. 초보에게 권하기엔 감점 요소다.


오래지 않아서 돌풍에 눈송이가 뒤섞이기 시작했다. 배낭에 레인커버를 씌워야 하나 고민될 정도였는데, 일단은 보조배터리와 지갑 따위를 지퍼백에 넣는 것으로 임시 조치했다. 레인 커버를 씌우고 나면 뭘 꺼내는 게 대단히 번거로워지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나를 앞질러간 중년 남자 한 분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심히 충격적이었다. 등산화는 신었으나 그 위로는 배낭도 바람막이도 없는 일상복 차림이었다. 심지어 가볍게 다니는 사람들이 손에 들고 다니는 물통 하나 없었다. 대신 오른손에 크고 무거워 보이는 양장본 전공책 같은 것 한 권만 들고 있었다. 얼핏 보면 강의실에서 다른 강의실로 이동하는 교수같은 모습이었다. 산바람에 고어텍스 재킷을 여미고 방수 대비를 하면서 그런 모습을 보자니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산에서 볼 법하지 않은 모습을 한 사람을 제법 자주 봤지만 이 분은 그중에서도 압도적이었다. 정말이지 산에는 별 사람이 다 모이는 것이다. (계속)


추신: 서울 등산로 추천 정리 페이지를 작성해서 조금씩 업데이트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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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2025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올 한해, 저는 다양한 도전 또는 발버둥을 했고, 그중 절대다수가 허사가 되었습니다. 노력하면 보상을 받는다는 믿음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것인가 올해처럼 절실히 느낀 해가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슬픈 것은 그럼에도 노력하지 않고 무엇을 얻을 방법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새해에도 저는 글을 쓰겠지요. 자신의 오만함을 돌이켜보며, 그동안 꾸준히 응원해주신 독자분들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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