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만원의 삼일절
근래에 인기 방송인 ‘유퀴즈’에서 관악산에서 기운을 받으라는 얘기가 나온 뒤로 관악산에 사람이 넘쳐난다는 얘기를 들으니 관악산에 또 안 가볼 수가 없었다. 2월말에 도적떼처럼 몰려든 온갖 일들도 처리했겠다, 3월 1일이 완전히 적기였다. 나는 관악산 등산로 중에서 가장 접근성이 높고 난이도가 적절하다는데 여태 안 가본 ‘사당능선’을 가기로 했다.
그리하여 집을 나서는 마음은 대체로 가벼웠다. 관악산이라면 이게 사람 다니라고 만들어진 길인가 싶은 미소능선까지 경험했고, 사당 능선에서 옆으로 빠지는 비밀의 길, 파이프 능선도 가봤다. 신공학관 코스는 물론이요 자운봉 능선도 돌파했다. 그렇다면 무난한 길인 사당 능선은 금방 완주할 수 있지 않겠는가. 완주하고 시간이 남으면 어디 괜찮은 카페나 둘레길이라도 찾아봐야겠다…… 그런 건방진 생각을 또 습관처럼 했다. 등산 경험과 속도는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또 까먹은 것이다.
사당역에서부터 이미 등산객이 제법 보였다. 젊은층이 많아 혼자 멋대로 좀 반가웠다. 보통의 주택가 도로를 따라가니 오래지 않아 산 입구가 나왔고, 여기에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연령도 다양하고 심지어 백인들도 지나갔다. 접근성이 좋다는 점에서는 관악산 최단코스인 서울대 신공학관 코스보다도 빼어나니 그럴 만도 하다.
1시 37분에 산문을 지났다. 산문 아래에선 어느 아버지가 아들 사진을 찍는데, 아들 표정이 좋지 않아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안온한 집 놔두고 아빠 따라 산 타는 게 반가울 아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아들이 산도 가끔 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쯤엔 아버지가 선뜻 높은 산에 가기 힘들어질 것이다. 누구 잘못이 아니라 자연히 빚어지는 비극이다.
관음사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는 길은 한 번 와본 곳이지만 만만치만은 않았다. 울퉁불퉁한 바위 계단과 다듬어지지 않은 오르막길을 꽤 걸어야 했는데, 경사가 제법 심한 터라 벌써 늘어진 사람들이 보였다. 운동화에 체육복 같은 차림을 한 여학생 둘이었다. 비슷한 또래 남자들 두어 명이 어디선가 다가온 상황을 보아하니 친구들이 날을 잡고 온 모양인데, 여학생들은 힘들어서 더 못가겠다고 우는 소리를 하면서도 일어났다. 확실히 초장부터 가혹한 편이었다. 등산스틱이 없었다면 나도 벌써 지쳤을 것이다. 일본의 유명 등산로에는 입구에 나무를 깎아 만든 지팡이들을 비치해 두던데, 한국도 이용자 책임 하에 그런 걸 쓰라고 두면 좀 어떨까…….
1시 55분에는 데크 계단을 오르게 되었다. 고작 이 정도만 와도 도시 풍경이 탁트여 보이는 게, 과연 관악산의 명코스라 할 만했다. 지금은 황량한 계절이라 산이 심심해보이지만 봄가을엔 감탄스러울 정도로 탁월할 것이다. 물론 가성비와 한강 풍경을 고려하면 아차산이 낫다고 단호히 말할 수 있지만, 관악산 신공학관 코스처럼 계곡만 찔끔 보여주고 사람을 쥐어짜기만 하는 코스는 아니다. 이래서 등산을 하는구나, 하는 설명은 직관적으로 해주는 경관을 품은 셈이다.
(1.조망이 빠르게 보상을 준다는 건 훌륭한 미덕이다)
계단을 오르고 오솔길 능선을 걷는 게 반복되었는데, 그러다 한 번은 팻말이 가리키지 않는 거친 암릉 오르막을 만났다. 오른쪽은 연주대, 정면의 오르막은 어디로 가는지 적혀있지 않았다. 등산을 하다보면 이런 길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되는데, ‘어쨌든간에 위로 올라가다 보면 다시 멀쩡한 길과 합류하겠지’ 생각하고 갔다가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갈 확률도 낮지 않은 터라 지도를 보자니 가벼운 차림의 젊은 남녀 한쌍이 내게 길을 물었다. 나는 지도에서 본 대로 앞은 험한 지름길, 오른쪽은 완만한 우회로 같다고 알려주고 앞장서서 걸었다. 이러다 틀리면 얼마나 민망할까 싶었으나, 다행히 데크길은 산스장을 거쳐 국기봉과 정상으로 나뉘는 갈림길로 이어졌다. 한숨을 내쉬고 다시 길을 올랐다.
이미 써두었지만 정말이지 초반은 데크길 조성이 잘 된 길이었다. 계단을 한참 걸어 올라가니 국기봉이 또 하나 나왔는데, 주변을 둘러보고 왔다가 아까 길을 물어본 커플을 다시 만났다. 사진을 찍어주겠다기에 기꺼이 사진을 부탁했다. 근래에 들어선 좀처럼 하지 않게 된 사진 부탁을 빈번히 주고받는다는 게 이런 인기 코스의 매력이다.
그나저나 출발할 때의 목적대로 주변 사람들을 잘 구경해봤더니 중년 밑으로는 등산화를 신은 사람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체로 러닝화에 가벼운 일상용 운동복 차림으로, 백팩조차 드물었다. 장비가 가벼운 경향은 특히나 여자들에게 또렷했다. 젊은 남자들은 그나마 백팩을 맨 사람이 많았고, 갖고 있는 신발 중 가장 신뢰도 높은 부츠인 듯한 트렉스타의 전투화를 신고온 경우가 종종 관찰되었다. 커플 중에는 연남동 같은 핫플레이스에 온 것처럼 머리를 세팅하고 가디건 따위를 입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관악산 사당 능선 코스에 대한 정보를 어디서 접했는지 모르겠으나, 동네 뒷산 오듯이 생각한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관악산이라는 목적지만 정한 뒤에 무작정 가장 교통편 좋은 길로 온 게 아닐까…….
사당 능선이야 정비가 잘 되어 있으니 위험할 것까지야 없는 길이지만, 가벼운 신발로 온 초보자 모두가 내일 대단한 고통에 시달릴 게 뻔한 일이라 여간 안타깝지 않았다. 그러나 나 역시 관악산에 처음 왔을 때 얼마나 험한지도 모른 채로 등산화가 아닌 가벼운 부츠를 신어 무릎이 상하기 시작했다. 등산을 한다고 본격적인 장비를 갖추는 걸 ‘부끄러운 유난’으로 생각하는 데에는 어떤 인식의 구조가 있는 모양이다.
2시 20분쯤 조망대라고 할 만한 곳까지 고도를 빠르게 높였다. 구경도 하고 휴식도 취할 수 있는 데크 공간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는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지도를 보니 정상까지 4분의 1이나 왔을까 말까 한 곳인데다, 데크길이 저 먼 봉우리까지 굽이굽이 이어진 게 까마득해 보였다. 대단히 장엄하지만, 약간 입맛이 달아나는 광경이었다. 체력 소모가 심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데크길의 반복은 안전하지만 혹독했다.
(2.초입 정비가 잘 되어 있지만 편안한 것은 아니다)
에너지바를 먹고 느린 속도로 이동했다. 한차례 하강했다가 다시 올라갔는데, 그 와중에 앞서가던 여성이 크로스백에 걸어둔 모자가 난간 끝에 걸려 뜯어지는 사고를 목격했다. 모자를 주워주었지만 조절부 한쪽이 터져 분실되었다. 그래도 사람이 안 다친 게 다행이었다. 만약 더 험한 길에서 가방끈이 어디 걸렸다면 구조대 신세를 질 수도 있었다. 사람이란 발이 닿을 거라 생각한 곳에서 1cm만 어긋나도 넘어지는 존재다. 나는 그간 등산할 때 가볍게 크로스백을 매는 것 정도는 괜찮은 일이라 생각했는데, 덕분에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역시 등산할 때는 잘 맞는 백팩을 매는 게 좋다.
(3.봉우리로 이어지는 길이 거의 만리장성으로 보인다)
다시 암릉지대를 오를 무렵, 또 신기한 무리를 마주쳤다. 고등학생쯤으로 되어 보이는 남학생 무리로 대여섯 명쯤 되는 일행 중 한 명이 배낭에 태극기를 꽂고 있었다. 삼일절이라고 작은 태극기를 가져온 사람을 몇 명 보긴 했으나, 아예 가정용 태극기와 국기봉을 지고 온 경우는 처음이었다. 과연 혈기 넘치는 남학생들이 할 만한 일이다. 그들은 중간에 누구 엄마에게 영상 통화가 걸려오자 “야, 우리 엄마한테 인사해!” “안녕하세요!” 하고 왁자하게 인사하는가 하면 적당한 조망점에서 태극기를 들고 돌아가며 사진을 찍기도 했으며, 심지어 거친 길에선 걸음걸음 기합을 넣기도 했는데…… 그래도 보기에 썩 밉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재미나고 멍청한 짓을 가까이서 본다는 건 사실 행복한 일이었다.
3시쯤엔 남들 따라 걷다가 선유천 국기대로 잠깐 빠지고 말았다. 지옥의 절벽처럼 암릉으로 이루어진 오르막을 기어올라 사진을 찍고 나니, 중년 부부가 전에는 겁도 없이 어느 길로 왔다는 둥 옛날을 회상하며 손을 잡고 걷는 게 보였다. 그 뒤엔 젊은 여성 둘이 국기봉 근처에서 너무 멋지다며 이렇게 저렇게 찍어보자고 궁리하는 게 보였는데, 이 두 사람, 암릉에서 내려가서 보니 다른 일행 한 명이 부루퉁한 얼굴로 아폴로 11호의 마이클 콜린스처럼 기다리는 중이었다. 구도를 보건대 등산 경험은 없지만 다소 무서워도 새로운 경험을 즐기는 사람 두 명에, 어쩌다 보니 동행한 사람 한 명으로 구성된 일행인 듯했다.
(4.그 어느날보다 붐비던 선유천 국기대)
이 일행과는 속도가 비슷해져서 한동안 보이는 곳에서 걸었다. 이들은 하산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남았냐고 물었다가 ‘두 시간은 더 가야 하는데?’라는 답을 듣고 기함했는데, 그 뒤에는 그녀들이 먹을 것도 하나 없다는 말에 반대로 하산하던 사람들이 기함하고는 조금만 더 가보고 내려가라고 가르쳐주었다.
‘금방 갈 줄 알았다’는 말을 몇 걸음 뒤에서 들으며, 나는 관악산에 처음 왔을 때 끝이 안 보이는 데크 계단 중간에서 ‘슬슬 다 왔나?’ 했다가 절반 남은 걸 보고 경각했던 걸 떠올렸다. 초보가 지도를 잘 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소요시간 계산도 하지 않고 산에 오르는 건 또 어째서일까? 내 경험에 비추어보건대, 그건 산행이 금방 끝나리라 믿으며, 지도에 산길까지 나와있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 미디어에 등장하는 등산가가 네이버지도나 카카오맵으로 길을 찾진 않으니 어쩔 수 없다. 산 입구에 지도 앱을 보는 방법이 좀 써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계속)
추신: 서울 등산로 추천 정리 페이지를 작성해서 조금씩 업데이트 중입니다!
https://www.notion.so/10-2acb2825893a80c384d2d672d1237d34?source=copy_link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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