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공간에서 타인의 선의를 발견하다
이후로 대략 3시 10분부터 4시 30분까지 사당 능선의 주된 암릉 능선이라 할 만한 바위 지대를 걸었다. 네발로 기어다니거나 난간, 로프를 타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제법 우락부락한 길이다. 덕분에 제법 지쳤다. 예전에 파이프 능선을 더 험한 길로 알고 갔는데, 체감으론 이쪽이 더 험하다. 파이프 능선은 절벽을 기어오른 뒤 벌판같은 바위 능선을 완만히 가는 반면에 사당 능선은 줄곧 작게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어머리, 하마바위, 강아지 바위 따위를 찾는 재미를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 근방에 뭐가 있는지 머릿속에서 지워진 데다, 지쳐서 지도 볼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아하, 왜 등산 초보가 지도를 확인하는 일이 드문지 이유 하나를 다시 알게 되었다. 더럽게 힘들면 고난에서 빠져나가는 것 말고 아무것도 추구할 수 없게 되는 탓이다. 등산할 때뿐만 아니라 삶의 고난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보인다고 하니, 힘든 사람이 더 힘들어지는 건 악몽같은 섭리인가 싶다.
멀쩡한 길을 놔두고 직진 방향의 샛길로 잘못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등의 실수를 하면서 걷고 또 걷자니 슬슬 진이 빠졌다. 나는 이제 편의점 앱 출석 도장으로 받은 초콜릿을 까먹으며 억제로 기운을 끌어올려야 했는데, 설마 이것까지 먹을까 싶었던 비상식량이라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황당했다. 물도 예비용으로 더 넣어둔 분량을 먹기 시작했다. 하여간 등산 준비물에는 과한 게 없다.
4시 52분에서야 관악문에 도착했다. 고인돌처럼 바위가 만들어낸 문으로, 여기까지 왔다면 정상까지 거의 다 온 셈이라 겨우 마음이 놓였다. 다만 여기서부터는 내가 기억하던 대로 길이 제법 험해서 길을 잘 읽으며 걸어야 했다. 뾰족하게 치솟은 바위들 틈에서 발 디디고 손으로 잡을 곳을 찾는 반복은 재미있지만 지친 상태에서 하기에 달갑지만은 않았다. 어째서 이 근방은 올라가는 길만 데크를 깔고 디딜 곳이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곳엔 밧줄도 안 놓았는지 모를 일이다.
(누구나 지나가다 사진을 찍게 되는 관악문)
이때쯤에는 살집이 있는 여성이 지친 채 난간을 잡고 걷는 걸 보며 남편으로 보이는 남성이 “다 왔어.” “거기 서있으면 더 지치니까 빨리 와.“따위로 재촉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는데, 초보에게 할 수 있는 말 중 세상천지에서 가장 거지같은 말로 보였다. 우울증 환자에게 “너보다 힘든 사람 많아.” “죽을 용기로 살아야지.”라고 하는 수준이었다. 그 와중에 뾰족한 돌덩이로 된 절벽까지 기어내려가야 했으니, 아마 그 여성이 다시 산을 찾을 일은 오지 않을 듯싶었다.
(사당능선 최후의 절벽과 계단길)
최후의 절벽과 데크 계단을 오르니 마침내 연주대였다. 도착 시각은 5시 17분으로, 역시나 그 어느때보다 사람이 많았다. 특히 20대 가량의 젊은 산객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여기가 내가 아는 그 산이 맞나 싶을 지경이었다. 곳곳에서 돌아가며 사진을 찍거나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 모두 성취의 환희에 젖어 있었으며, 연주대 정상석 앞에서 줄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조차 지루함을 모르는 기색이었다. 지나가는 누군가는 ‘인생 산’이라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대박 추억’이라고 했다. 그 어느 산에 가도 이 정도로 기쁨이 가득한 광경은 본 일이 없었다. 확실히 젊은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 노는 공간에는 가볍고 밝고 청량한 기운이 감돈다. 아마 새로운 것을 새롭게 여기고 경탄하는 마음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벌써 여러 차례 이 자리에 온 나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초콜릿과 물을 먹으며 산이 아닌 사람의 광경에서 기운을 충전하고 사진을 찍었다.
(요즘은 인증 사진 줄이 한 시간씩도 걸린다는 정상)
출발할 때 시간이 남을 거라는 예상과 정반대로 하산 시간이 촉박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금방 일어나 거대한 바위 옆길로 내려가면 나오는 연주대 응진전으로 갔다. 여기에 공양하는 것도 오늘의 목표였다. 나는 적당한 액수의 지폐를 불전함에 넣고 그보다 과한 소원을 빌었다. 늘 이런 식이지만 설마 천벌을 받진 않겠지.
시간이 없는 만큼 하산은 당연히 신공학관 루트를 택해서 내려갔다. 다만 스릴을 좀 덜 느낀 것 같다는 멍청한 생각이 들어서, 내리막을 거치는 완만한 길이 아니라 바위 절벽과 능선을 거치는 위험한 길인 말바위 능선을 택했다. 지난겨울에 이곳에 눈이 덮였을 때도 별 어려움 없이 걸어갔기 때문인데……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순탄치 않았다. 발 디딜 곳이 눈에 잘 띄지 않았고, 두 번이나 실수했다. 한 번은 다리를 잘못 놀려 바위에 무릎을 찍는 바람에 피부가 까졌고, 한 번은 등산 스틱이 바위에 걸려서 잠깐 균형을 잃었다. 자칫하면 발견되기 어려운 절벽 아래로 추락할 뻔했다. 간신히 안전한 마당바위로 빠져나가 앞으로는 하산할 때 여기로 오지 말자고 생각하며 돌아보니, 머리가 희끗한 아주머니가 내가 온 길을 아무렇지 않게 걸어오는 게 아닌가. 정말이지 함부로 잘난척 하고 다닐 일이 아니다.
하산하며 보자니, 예전에 누군가가 코팅해서 걸어놓은 간이 안내판이 사라졌다. 어디로 가면 무엇이 나오나 아주 상세히 적혀 있어 좋았는데, 공원 관리상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 탓에 나는 지도와 팻말을 한 번씩 더 보고 움직여야 했다.
하산하며 본 사람들 중에는 특이한 사람이 한층 더 많았다. 정상부근까지 개를 안고 온 사람도 둘이나 있었고, 방금 카페에서 나온 듯 커피잔 하나만 들고 다니는 사람, 편의점 가듯 한 손에 지갑과 스마트폰만 든 사람도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큰 스피커로 음악을 틀고 걷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놀랍지도 않지만…….
하산해서 버스 정류장까지 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져버린 7시 경이었다. 꽤 오랫동안 플래시를 켜고 걸어야 했는데, 한 무리의 젊은이들과 속도가 비슷해서 서로의 빛에 의지할 수 있었다. 해가 진 뒤에 하산하면 늘 어둠 속에서 홀로 고독을 씹으며 걸어야 했는데, 이렇게 남의 불빛에 감사하며 걸은 것은 처음이다. 아무튼 오늘등산 앱의 안내대로라면 4시간 걸릴 길을 5시간 걸렸다. 예전에는 안내된 시간의 1.5배는 걸리는게 보통이었으니, 좀 나아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루의 산행을 무사히 마치고 식사를 하러 갈 예정이었는데…… 전혀 뜻밖의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버스를 탔다가 갈아타야 한다기에 바로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자, 어쩐지 블루투스 이어폰 연결이 끊긴 것이다. 그렇다. 스마트폰을 버스에 떨어뜨렸다. 나는 몹시도 망연해졌다. 버스 회사에 연락하고 싶어도 전화가 없었고, 어쩌면 좋을지 알아보려 해도 검색 수단이 없었다. 이대로 집에 가서 분실물 센터를 알아봐야 하나?
우두커니 서 있자니, 정류장에 학생 한 명이 나타나기에 사정을 설명하고 내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이윽고 어떤 남성이 받아서 전화를 떨어뜨린 분이 맞냐기에 그렇다고 하자, 기사에게 맡길 테니 차고지에서 찾으면 될 거라고 했다. 간신히 한시름 놓고 다음 버스로 차고지까지 갔다. 다행히도 차고지가 몇 정거장 뒤에 있는 노선이었다. 물론 차고지에서 내린 뒤에도 기사들에게 물어 반대편 차고지로 건너간 뒤에 들어온 게 없다는 사무실 직원 때문에 가볍게 입씨름을 해야 했지만, 스마트폰을 대중교통에 떨어뜨린 것치고는 대단히 빠르게 회수할 수 있었다. 저번에 나갔을 때는 카드 지갑을 지하철 플랫폼에 떨어뜨려 다음날 찾더니, 아주 날이 갈수록 엉망이 되어간다. 이게 다 보시를 덜 한 탓일까…… 아니, 헛생각 하지 말고 주머니 단속이나 잘 해야겠다.
그리하여 퍽 오랜만에 제법 높은 산의 가본 적 없는 코스를 완주하고, 예상치 못한 소동을 거쳐 국밥과 막걸리로 하루를 마칠 수 있었다. 온몸이 노곤하고 종아리가 당기고 무릎이 쑤셨다. 물론 마음도 지쳤다. 하여간 긴 여행이든 짧은 여행이든 사고가 없어야 평화로운 것이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의 도움으로 하루를 무사히 건너왔다는 걸 생각하면 여간 감사하지 않았다. 그간 산에 가면 완전히 혼자가 되는 자유를 느끼는 게 보통이었는데, 이날은 반대로 사람들간의 선의를 느끼고 귀가한 것이다. 역시 사람 많은 산에도 종종 다녀야 할 모양이다.
교훈
- 산에 자주 다녔다고 없던 능력이 생기진 않으니 대비를 소홀히하지 말자.
- 산행이 익숙지 않다면 등산스틱 한 쪽만이라도 챙기자. 피로도가 압도적으로 줄어든다.
- 백팩을 사용하자. 선선한 날 3시간 산행에 물 500ml 가량 , 식사용 음식, 기력 보충용 음식에 초경량 패딩, 바람막이, 보조배터리, 손수건 등등을 챙기자면 그냥 백팩이 어깨 건강에도 활동에도 낫다.
- 컨버스, 반스처럼 얇은 신발밖에 없다면 산행을 포기하고 구에서 만든 둘레길을 가는 게 본인의 발바닥과 종아리 건강, 그리고 일행의 일정에 이롭다.
- 계획할 때부터 코스 정보를 찾아보자. 앱에서는 오늘등산 앱, 유튜브에선 산타는 제이썬 채널의 브리핑 정보가 각종 정보 얻기에 편리하다.
- 체력이 떨어지는 일행보다 앞서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다. 힘들다고 하면 5분 이상 쉬면서 먹을 걸 챙겨주자. 다음에도 같이 다닐 의향이 있다면.
- 가급적 조용히 다니자. 타인의 고요를 존중하자. 그리고 ‘야호’는 야생동물이 놀라기 때문에 금지된 구시대 풍습이다.
- 주요 등산로는 네이버지도, 카카오맵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로드뷰까지 지원하는 곳이 많다.
- 산 위에서 회복시켜줄 것은 휴식과 음식뿐이니 고열량 식품은 반드시 남을 정도로 챙기자.
- 소지품 관리를 철저히 하자. 옷의 주요한 주머니에는 모두 지퍼가 달린 게 좋다.
- 타인에게 친절하게 대하자. 타인과 있을 때 주고받은 친절이, 나중에 혼자 있는 시간을 지탱하는 기둥이 될 것이다.
추신: 서울 등산로 추천 정리 페이지를 작성해서 조금씩 업데이트 중입니다!
https://www.notion.so/10-2acb2825893a80c384d2d672d1237d34?source=copy_link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종이책, 전자책: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9577892619